외전. 남주 시점 전개
166화.
발걸음을 따라 설원이 부서졌다.
사람이 지날 수 없는 겨울의 산맥. 나무조차 자라지 않는 하얀 광야에 발자국이 긴 점선을 그려 냈다.
요한은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었다.
몸을 채우는 한기가 편안하다.
그는 맑은 하늘을 눈에 담았다.
깨끗한 밤하늘에 은하수가 뜬 날이었다.
어린아이가 실수로 쏟은 설탕처럼 달콤한 빛들이 어둠을 가득 메웠다.
그중에서도 유독 빛나는 별이 있었다.
요한은 고요한 시선으로 그 세 개의 별을 쓸었다.
한때 삼각형을 그리던 세 별은 이제 일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오늘이다.’
세 개의 별이 직선을 그리는 날, 그가 깨어났다.
세 개의 별은 동면 시계였다.
요한은 두 번의 동면을 치렀지만 제대로 저 시간을 맞춰 본 적이 없었다. 동면은 그만큼 까다로운 이능이었다.
단 한 존재만이 저 세 개의 별을 시계 삼아 동면을 맞출 수 있었다.
요한의 눈이 어두워졌다.
그는 머리를 덮은 후드 자락을 더 깊게 내리고 다시 걸음을 뗐다.
기온이 문제였던 건지 검투 대회 이후로 요한의 몸은 빠르게 회복됐다.
설원을 걸은 지 일주일.
그럼에도 지치지 않았다.
자박 자박.
서늘한 적막 속에서 제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 규칙적으로 귓가를 간질이던 그 소리가 갑자기 사라졌다.
걸음을 멈춘 요한이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이상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파도처럼 그 바람은 밀려오다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연보랏빛으로 물든 설원에서 그는 시선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찾았다.
바다처럼 넓은 설원에 검은 웅덩이가 있었다. 그림자였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데, 마치 누군가 검은 먹물을 떨어뜨린 것처럼 선명한 타원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자 앞으로 걸어간 요한은 손을 들었다.
강한 바람이 그의 손을 거부하듯 밀어냈으나 요한은 그 바람을 억누르듯 천천히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길을 따라 벌레 떼가 움직이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음이 밀려왔다.
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
하늘에서 개미 떼가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투명한 막이 무언가에 먹혀 가며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진 얼음벽 뒤에는 거대한 성이 한 채 있었다.
얼음으로 축조된 성은 어둠과 설원의 색채가 고루 녹아들어 어둡고 또 밝았다.
요한의 시선이 성벽으로 내려왔다.
연약한 색채를 흠뻑 빨아들인 탓인지 성벽은 새하얀 울타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탑은 밤하늘의 어둠을 고스란히 담아 압도적인 두려움을 자아냈다.
탑에 달린 거대한 창문은 마물에 물린 이빨 자국처럼 검푸른 피를 토해 스산한 느낌을 주었다.
요한은 무감한 눈으로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낸 마왕의 동면지를 응시했다.
큰 결심을 했으나, 표정에 드러나지 않아 그는 차분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다른 이들이 느끼는 두려움과는 결이 다르지만, 마왕을 만나기 위해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 감정은 두려움이라 말하는 게 옳았다.
사박.
햇볕에 녹고 다시 얼기를 반복해 온 눈이 그의 발아래서 부서졌다.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눈더미 위로 최초의 손님의 발자국이 찍혔다.
마왕의 침실에 도착했을 때는 하루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자정과 새벽의 그 중간.
밤을 흡수한 성은 희미하게 밝았다. 거대한 창으로 들어온 달빛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침소의 물건들이 잘 보였다.
침대와 의자, 벽난로.
동면에 들기 전에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신 듯했다.
벽난로를 보면 인간이 아닐까 싶었다.
요한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후드 모자를 걷으며 걸음을 뗐다.
침실 한가운데에 수정처럼 솟은 거대한 얼음이 있었다.
그 안에 있는 남자가 요한의 시선을 잡아챘다.
남자의 긴 머리카락이 발치에 고여 있고, 큰 전투를 치렀는지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그러나 옷 틈으로 드러난 단단한 신체에는 작은 상처 하나 없었다.
요한은 제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결국, 여기까지 왔으나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지 않을 수도 없었다.
정말로 사계국의 모든 인간을 멸망시킬 생각으로 동면에 드신 거라면 막아야 했다.
왜 이제 와 멸하려는 걸까?
이는 불안에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짐작 가는 이유가 하나 있기는 했다.
그는 너무나 쉽게 인간계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살아남은 건 그에게 인간이 필요했다는 증거였다.
인간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뿐이다.
제 탓인 것 같아 요한은 시선을 내린 채 그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뜻을 거스를 수 없지만, 그대로 둘 수도 없었다.
그에게도 사계국을 지켜야 할 이유가 있었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으니 그녀에게는 사계절이 필요했다.
수정에 갇힌 머리카락과 발끝을 보던 요한이 고개를 들었다. 수정의 겉면이 부서지며 가루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완전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요한은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두려워했던 얼굴을 보는 순간 입술의 안쪽 살을 깨물었다.
아직 감겨 있는 눈과 차분한 표정이 꼭 지금이라도 도망가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밤하늘에 간간이 빛나는 별처럼 깊은 두려움 속에서 희망이 이따금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먼 과거의 기억처럼 제게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주실지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그의 긴 머리칼이 살랑였다.
또한, 찢긴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근육이 짙은 선을 그려 내다 흐려지길 반복했다.
그가 깨어나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마음과 달리 요한의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요한은 그가 제 죽음을 바란다면 기꺼이 내어 드릴 마음으로 찾아왔다.
원하는 건 그가 제 청을 들어주는 것뿐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인간에 대한 분노를 거두고, 자신을 벌하기를 바랐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사실 자신이니.
파리하게 질려 있던 그의 안색에 생기가 도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곧 그의 눈두덩이 아래에서 눈동자가 움직이더니, 천천히 달빛을 머금은 하얀 속눈썹이 간격을 벌리기 시작했다.
50년의 동면을 끝낸 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그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는 요한에게 남자의 시선이 내려왔다.
뜻을 알 수 없는 고요한 시선이 요한을 짓눌렀다. 하지만 요한은 피하지 않고 그의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예상했던 얼굴이라 요한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그는 제 붉은 입술을 열어 예를 갖추었다.
“제1 수호성 인사드립니다.”
남자는 말없이 요한을 내려 보다 팔을 하늘로 쭉 뻗었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잠들 때 봤던 제1 수호성은 이렇게 잘생긴 놈이 아니었는데.”
“알요사는 현재 제2 수호성으로 격하되었습니다.”
“난 알요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알요사가 너보다 못생겼다고 여기는구나.”
“…….”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꺾었다.
“그래. 제1 수호성이 되는 데 몇 년이나 걸렸지?”
요한은 왜 이런 걸 묻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름을 아니, 제가 누군지 먼저 말해야 했나.
요한은 우선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동면을 포함하면 106년입니다.”
“흐음.”
남자는 시간을 계산하듯 허공에서 눈을 굴리다 피식 웃었다.
“인간의 나이로는 열여섯인가?”
기본적으로 동면은 50년 단위였다.
말한 적 없는데 남자는 한 번에 요한의 실체를 눈치채고 그의 시간을 읽어 냈다.
요한은 장난스러운 남자의 표정을 보면서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 말에 담긴 온기가 따뜻해서 소름은 전신을 뒤덮기 전에 사라졌다.
“역시 내 아들이야.”
시원한 웃음이 요한의 귓가를 간질였다.
“알요사가 속앓이 좀 했겠구나. 500년이나 어린 놈에게 자리를 뺏겼으니.”
“……알고 계셨습니까?”
“무엇을?”
“제가…….”
누구인지.
끝맺지 못한 말을 이해한 남자가 미소를 머금은 채 몸을 굽혀 앉았다.
“어떤 아비가 하나뿐인 제 아들을 알아보지 못할까.”
차갑고 커다란 손이 요한의 턱을 쓸었다.
웬만한 성체의 마족들은 요한보다 작았다. 그만큼 요한은 거대한 체격을 가진 마족이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서는 작은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드럽게 뺨을 쓰는 손길에 요한의 무감한 표정에도 감정이 담기기 시작했다. 무섭고 나약해지는 마음이었다.
어린 날에 버렸던 나약한 자아가 되살아나는 듯해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거부감은 고개를 들기도 전에 바스러졌다.
남자가 먼저 그에게 이마를 붙여 왔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무겁게 적셨다. 옮겨붙은 습기에 요한의 목소리도 축축하게 젖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저 때문입니다. 제가 미숙해서…….”
“네 탓이 아니다.”
말을 잘라 낸 남자가 요한의 턱을 들게 했다. 맞춰진 시선을 타고 진득한 감정이 밀려왔다.
남자는 다시 입을 열어 낮게 읊조렸다.
“네 탓이 아니다, 요하네스.”
요한은 입을 다물었다. 답을 바라지 않는 말씀이기에.
남자는 눈을 접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거 참 네가 우는 꼴을 안 보려면 말해 줘야겠구나.”
울지 않는다고 반박하고 싶었으나 말은 나오지 못했다. 그저 턱 근육만 반항하듯 움찔댔다.
아버지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웃음을 참다 말했다.
“사실 나도 4개월 전쯤 잠깐 잠에서 깬 적이 있다.”
“동면 중에 깨셨단 말씀입니까?”
“그래. 다시 잠들어 기상 시간을 맞춰 나오긴 했다만…… 나도 동면을 완벽하게 다루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어린 네가 동면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네 어머니는 그걸 알면서도 너와 함께한 거고.”
그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였다.
“인간의 시간은 우리와 달라. 우리가 동면에서 깨어나듯 그들은 죽음 후에 다시 생으로 돌아오지. 시간이 맞물리면 몇 번이고 다시 만날 수 있어. 우리와 다른 건 그저…….”
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는다.
“그들은 지난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요한은 그 말의 뜻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다.
“나는 수천 년의 시간 동안 네 어머니를 16번 만났다. 그러나 날 사랑한 건 딱 한 번이었지. 너를 남기고 떠난 그 시간대 말이다.”
그의 미소를 따라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왔다.
“그러니 널 원망하고 증오하는 게 가능할 리 없지. 난 그저 그 시간의 증표인 네가 살아남아 주어 고마울 뿐이다.”
그는 그 말을 하고는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살다 살다 이런 말도 다 하는구나.”
그는 제 말이 민망한 듯했다. 남자는 인간계에서 가져온 소파에 앉았다.
한쪽 팔걸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 거의 눕다시피 자세를 취한 그가 요한에게 물었다.
“이제 네가 하려던 이야기를 해 보거라.”
미세하지만 요한의 어깨가 움찔했다.
마왕은 참지 않고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모를 줄 알았느냐?”
그는 제 다부진 턱을 손으로 쓸며 웃음의 여운을 즐겼다.
“널 원망한다 여겼으면서, 내가 찾기도 전에 먼저 찾아온 걸 보면 청이 있는 거겠지.”
요한은 그의 의뭉스러운 미소를 눈에 담다 입을 열었다.
“사계국을 멸망시킬 생각이십니까?”
“그럴 생각이었지.”
“그럴 생각이셨다는 뜻은…….”
“내 아들이 죽었으니, 그들의 자식도 거둬 가야 응당하지 않나?”
요한은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아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럴 생각이 없으시다는 뜻입니까?”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틀었다.
“요하네스.”
남자는 달빛에 반짝이는 창틀에 시선을 둔 채 미소를 지었다.
“네가 왜 사계국을 욕심내는지 그 답을 듣고 결정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