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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79화 (180/208)

179화.

감각이 돌아왔다.

크게 숨을 마셔도 쓰라린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야가 어둠에 순응하자 익숙한 전경이 담겼다.

달빛에 물든 넓은 방. 화장대와 거울에 비친 잠옷 차림의 내 모습.

나는 그대로 손을 들어 뺨을 매만졌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온기에 움찔했다.

방금까지 이어지던 기억과 상반된 감각이었다.

평온하고 따뜻하다.

그리고 혼자였다.

화마에 휩싸였던 흔적도, 얼음에 갇혔던 감각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방금 일어난 일이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서랍을 열었다.

스크롤을 챙긴 나는 간이 옷장에 걸린 외투를 걸치자마자 바로 종이를 찢었다.

***

새하얀 자작나무 숲에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무작정 숲을 가로지르는데 알람이 들렸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한 발을 내디뎌 보세요. 첫걸음이 당신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할 거예요.]

다른 경계로 넘어가지도 않았는데, 바로 마족 지대로 넘어왔다.

이제는 이 변덕이 누구의 짓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경계에서 있던 일도 다 그 버그의 짓인 듯하다.

다음에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나는 새 스크롤을 꺼내며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참아 냈다.

일단 지금은 요한을 만나야 했다.

내가 본 게 진짜인지 확인해 줄 존재는 요한뿐이었다.

스크롤을 찢고 눈을 뜨니 주인을 알 수 없는 방 안이었다.

나는 요한과 마족성을 생각하고 종이를 찢었는데 방으로 들어온 걸 보면 여긴 요한의 방인 것 같다.

불의 이능을 쓰는 존재답게 요한의 방에는 등불이 가득했다.

한밤중인데도 어둡지 않다.

그러나 정작 그 불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방을 시선으로 훑던 나는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러다 다시 뒤를 돌았다.

요한의 책상 위에 투명한 유리 상자가 있었다.

나는 홀린 듯 요한의 책상으로 다가가 그 작은 유리관에 손을 올렸다.

“읏.”

상자는 유리가 아닌 얼음이었다.

투명한 얼음 너머로 보이는 것들이 너무나 익숙했다.

가죽 봉투와 마족어가 적힌 종잇조각, 낡은 모포.

성에서 도망칠 때 내가 챙겼던 물건들이었다.

‘……꿈이 아니야.’

나는 그대로 문을 열고 복도를 달리며 요한을 찾아다녔다.

“요한!”

겁도 없이 요한을 부르면서 뛰어다녔다.

식당으로 내려가 보기도 하고, 도서관까지 둘러봤지만, 요한은 없었다.

답답한 숨을 내쉬며 계단을 내려오는데 뺨으로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쾅.

얼음으로 만들어진 창이 아슬아슬하게 나를 스쳐 난간에 박혔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채 창이 날아온 곳을 쳐다봤다.

열린 성문에 마족들이 붙어 있었다. 요한과 매번 싸우던 그 마족이었다.

“저 자식들…….”

요한을 쫓아냈던 놈도 저놈들이겠지.

솔직히 달려가 멱살을 잡고 같이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는 무력이 없었다. 그런 내가 마족과 싸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놈들을 노려보며 스크롤을 손에 쥐었다.

진짜 화가 났다. 하지만 다음에…….

다음에 꼭 복수해 줄 거다.

나는 눈으로 욕을 하며 스크롤을 찢었다.

내 앞으로 얼음 창이 다가왔지만, 그보다 먼저 공간이 일그러지는 바람에 창은 내게 닿지 못했다.

“우윽.”

나는 자작나무 숲이 펼쳐지는 광경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계속 뛰어다닌 탓에 숨이 모자란 데다, 눈도 감지 않고 스크롤을 사용하는 바람에 속이 메스꺼웠다.

나는 설원에 웅크린 채 잠시 그대로 있었다.

차츰 호흡이 평온해졌다. 그러자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하, 씨…… 어디 갔어.”

마왕의 처소에서 얘기 중이었을까? 아니면, 마왕성에 없는 건가?

마구간에 요한의 말이 있는지 확인부터 해야 했나?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스크롤을 꺼냈다.

빨갛게 언 손가락 위에 작은 종이가 놓여 있다.

‘이제 한 장 남았는데…….’

나는 눈에 젖기 시작하는 스크롤을 꼭 쥐었다.

‘일단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스크롤부터 사고…….’

머릿속으로 할 일을 정리하며 경계를 찾아 걷는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바닥이 울퉁불퉁했다.

움푹 팬 곳에도 눈이 쌓여 있어 그 경계가 흐릿했지만,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희미한 흉터가 설원에 점선을 그려 냈다.

발자국이었다.

나는 말없이 발자국을 향해 걸었다.

사박.

감각이 사라진 발 하나가 움푹 팬 자리 위로 올라갔다.

커다란 발자국 위로 작은 발자국이 겹쳐졌다.

혈관이 얼어붙었는지 피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정신이 혼미해졌다.

생각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발자국을 따라 걸어 숲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사막처럼 드넓은 설원이 보였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새하얀 평지가 망망대해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시야에 걸리는 것이 없으니 나는 아주 먼 거리에 있는 존재까지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때, 뒤에서 마물이 울부짖는 섬찟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하나도 거슬리지 않았다.

오직 잿빛 세상 속에 찍힌 하얀 점 하나만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작정 설원을 내달렸다.

꿈속의 꿈.

시간 속의 시간.

반복된 것들이 머릿속을 헤집으며 모든 현실감을 앗아 갔다.

나는 더 이상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진실이 간절했다.

반복된 신기루와 허상이 진짜라고 말해 줄 존재가 간절했다.

애타는 마음과 달리 얼어붙은 다리는 속도가 느렸다. 늪을 헤치는 것처럼 종아리까지 올라온 눈에 다리가 푹푹 빠졌다.

심지어 요한은 말을 타고 있었다. 달리는 건 아니었지만 지치지 않는 말의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해 달렸다. 그럼에도 요한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억울함이 밀려오고 무력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게다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명치를 툭툭 치댔다. 통각에 가까운 막막함을 느끼며 나는 소리를 질렀다.

“요한!”

제발 멈춰.

“요한!”

닿지 않는 목소리에 눈물이 터졌다.

네가 확인해 줘야 한단 말이야.

흐느낌과 뒤섞인 고함은 그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소리가 들렸을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마물의 포효만이 화답하듯 거세게 들려왔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달렸다.

그때, 기적처럼 요한이 멈췄다.

말이 천천히 머리를 트는 모습이 눈에 담겼다.

“하아.”

그 작은 움직임에 안도의 숨이 토해졌다.

나는 그제야 내가 겁에 질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고작 그가 멈췄을 뿐인데 전신에 힘이 풀렸다.

이윽고 흘러온 시선이 몸을 옥죈 사슬 같던 불안을 잘라 냈다.

눈물이 얼어붙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나 잠시였다. 통각마저 얼었는지 곧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달릴 수 없었다.

억지로 남은 힘을 쥐어짜 걸음을 내디뎠지만, 발이 눈에 깊이 박히는 바람에 앞으로 넘어졌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와중에도 요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요한은 점점 가까워졌다. 심지어 내가 죽을 각오로 달릴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요한.”

마지막 숨을 내뱉듯 나온 말이 뿌연 연기와 흩어졌다.

나는 지쳐 있었다.

무겁게 내려온 눈꺼풀이 느릿하게 올라가길 두어 번 반복했을 때, 몸이 위로 번쩍 올라갔다.

검은 시야가 다시 걷히자 거친 눈보라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선 말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요한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나를 품에 안고 눈을 털어 주고 있었다.

빠르게 한기를 털어 낸 요한은 반동을 주어 나를 조금 더 안정적으로 안았다.

그는 한쪽 무릎에 나를 앉히고는 떨어지지 않도록 내 팔을 제 목에 둘렀다.

툭.

그리고 곧장 내 신발을 벗겨 냈다.

신발은 눈에 잔뜩 젖어 있었다. 그리고 발과 발목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감각이 없다 싶더니 동상에 걸린 모양이었다.

요한은 커다란 손으로 내 발을 움켜쥐었다.

“읏!”

갑자기 뜨거운 온기가 훅 덮쳐 왔다. 벌레가 기어오르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참지 못하고 발끝을 오므리자 요한은 참으라고 강요하듯 손으로 내 발을 꾹꾹 주물렀다.

빳빳하게 언 발이 요한의 손길을 따라 부드럽게 풀려 갔다.

그 멀리서 이걸 어떻게 본 건지 모르겠다.

그게 신기해서 요한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요한은 내 발끝에 온 신경이 쏠렸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제 온기를 나눠 주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열기와 함께 다시 간질간질한 감각이 퍼졌다. 움찔하자 요한이 나와 눈을 맞췄다. 아니 눈을 맞춘 게 아니었다.

그는 바로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를 입술로 눌렀다.

“읏.”

신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혈을 찾듯 신중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곧 얼어붙은 혈관으로 뜨거운 숨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하아.”

굳어 있던 근육이 풀어지며 자연스럽게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요한은 움직이지 않고 손으로는 내 발을 녹이고 입으로 혈관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차츰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희미했던 심장 소리가 다시 들릴 정도로 사라졌던 감각들이 선명해졌다.

체온이 돌아왔는지 새 나오는 하얀 숨도 차츰 농도가 짙어졌다.

한참 후에 요한이 입술을 떼어 냈다.

그는 푸른 눈동자를 부지런히 움직여 내 안색을 살폈다.

“--.-.--.”

그가 말을 건넸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요한은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인지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틀었다.

그는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날카로운 마물 소리가 들려왔다.

내 팔을 감싸고 있던 요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는 저곳으로 들어가야 했다. 숲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자, 내가 돌아갈 수 있는 문이었다.

요한의 시선이 다시 내게 내려왔다.

그 시선이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요한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을 줍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숲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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