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수인 영애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키웠다.
“자세히 좀 볼게요. 제 취향이라.”
“……저 남주는 마왕이잖아요!”
내가 힐난하듯 말하자 키스카가 씁쓸하게 웃었다.
“위험한 남자가 취향이라서.”
그래서 일검 주식을 샀던 건가.
수인 영애는 유명한 희빈파 수장이었다.
세계관 흑막, 녹스를 슬롯에 담은 안젤리카도 말없이 마왕의 얼굴에 집중했다.
어쩌다 보니 여기에 취향이 위험한 유저가 둘이나 있다.
나는 한숨을 삼키고 다시 화면을 쳐다봤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마왕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황녀 영애를 쳐다봤다.
“대체 뭐 하는 걸까요?”
호기심을 참지 못한 수인 영애가 물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 중 그 누구도 답을 알지 못했다. 그때, 갑자기 마왕이 몸을 숙였다.
“어어!”
그는 긴 손가락으로 황녀 영애의 입술을 만졌다. 그러다 살짝 뺨을 눌러 입술을 벌렸다.
입을 맞추는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마왕은 간격을 둔 채 움직임을 멈췄다.
마치 제 숨을 불어넣는 듯한 모습이었다.
“정말 뭐 하는 걸까요?”
수인 영애가 아까보다 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지만, 이번에도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황녀 영애의 입술 사이로 희미한 연기가 새어 나왔다. 그 한기를 모두 빨아들인 마왕이 그녀의 입술을 닫아 주었다.
그때였다.
황녀 영애가 천천히 눈을 떴다.
“허억, 지금! 지금! 일어나셨어요!”
놀란 안젤리카가 숨을 들이켜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수인 영애가 줌을 당기자,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황녀 영애가 푸른 눈동자를 움직이며 초점을 찾는 모습이 보였다.
황녀 영애는 제 앞에 있는 마왕을 발견하더니 눈썹을 팔자로 내렸다.
우리는 모두 침묵했다.
“뭐지? 마왕이랑 아련한 서사라도 있으신가?”
수인 영애는 내려 두었던 발을 소파로 올려 아빠 다리를 했다. 마치 재밌는 영화를 보듯이 몰입한 모습이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긴, 황녀 영애는 전생에 마왕의 부인이었으니까.
대충 예상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잠들기 전에 선택한 남주가 마왕인 모양이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사연이 있었나 보다.
우리는 조용히 시선을 엮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런데 갑자기 황녀 영애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빡.
“으윽!”
스피커 밖으로 마왕의 신음이 들렸다.
그는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싼 채 웅크렸다.
황녀 영애는 박치기를 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마왕을 발로 걷어차 침대에서 떨어뜨렸다.
“이 사기꾼 새끼가!”
“으억!”
황녀 영애는 굴러떨어진 마왕의 위로 올라타더니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감히 누구한테 사기를 쳐! 결혼하면 살려 준다며!”
“살려 주었지 않은가!”
마왕은 억울한지 어눌한 겨울국어로 소리쳤다.
그러나 황녀 영애는 쉬지 않고 마왕을 마구 팼다.
“얼려 버리는 게 어떻게 살려 주는 거야! 고문이지 이 자식아!”
“그때는 내가 너무 화가 나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 죽일 것 같아서, 일단 한숨 자는 거라고, 설명하지 않았나. 으윽! 그만! 일단, 진정해라!”
황녀 영애는 마왕의 변명을 듣지 않고 베개로 그를 마구 후드려 팼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퍽퍽퍽.
“으윽! 진정해라, 제발!”
협탁 위로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참 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우리 황녀 영애님…… 위험하지는 않으신 것 같네요.”
“예. 다행이네요.”
디아나도 떨떠름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안젤리카는 입을 뻐끔거리다 물었다.
“다, 다행인 거 맞겠죠?”
우리는 착잡한 눈으로 황녀 영애게 처맞고 있는 마왕을 응시했다.
눈치 빠른 키스카가 말했다.
“아무래도 마왕을 슬롯에 담거나 남주로 선택하신 모양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전에 알렉스랑 몰래 황녀 영애 있는 탑에 갔었는데, AI가 황녀 영애님은 이미 남주 선택을 하셨다고 알려 줬어요.”
그 말에 디아나가 헛웃음을 흘렸다.
“마왕이 선택 남주인가 보네요.”
퍽퍽퍽.
“윽! 아프다! 아프다고!”
“닥쳐! 아프긴 뭐가 아파!”
찰진 타격음과 신음 그리고 욕설과 변명이 스피커를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마왕이 맞는 모습에 익숙해진 우리는 그 장면을 보며 평온히 대화를 이어 갔다.
“혹시 발현된 키워드가 #계약결혼이신가?”
키스카는 그 둘의 모습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턱을 쓸며 말했다.
“맞는 것 같아요!”
안젤리카가 손뼉을 쳤다.
디아나는 기가 찬지 실소했다.
“그 키워드가 여기서 나올 줄이야.”
긴장이 풀어진 것도 잠시.
타격음이 사라졌다. 고개를 든 황녀 영애가 창가를 보더니 그대로 굳어 버렸다.
“뭐지?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에요?”
안젤리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 화면 안으로 제삼자의 뒷모습이 등장했다. 나는 익숙한 로브와 실루엣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요한?”
“아는 사람이에요?”
나는 키스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선택한 남주예요.”
마왕이 도망쳐서 요한이 그를 추적해 온 모양이었다.
나는 긴장했다.
아무리 부자지간이라고 해도 마왕은 황녀 영애에게 미쳐 있었다.
아들이라고 해도 자신을 막아서면 힘을 쓸까 봐 걱정됐다.
“[돌아가시죠.]”
스피커를 타고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짧지만 의사가 분명한 한 마디.
요한의 말에 마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도 인간계에 자주 넘어가면서 나한테만 이러는 건 염치가 없지 않으냐.]”
“[저는 그분이 원하지 않으면 더 이상 경계를 넘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와 달리.]”
그 말에 마왕이 입을 다물었다.
이쪽도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데이지 영애 마족어 해석 버프 있지 않아요?”
“아, 네.”
나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그들에게 대화를 통역해 주었다.
“헉, 그럼 둘이 부자지간이에요?”
“아, 닮긴 했네요. 아빠는 장발이고 아들은 머리가 짧은 게 다르고.”
그들은 금세 긴장을 놓았다.
부자지간이라니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황녀 영애는 잔뜩 굳은 채 마왕에게 물었다.
“뭐야, 지금 무슨 말 하는 건데.”
“아, 그대는 처음 봤겠군.”
마왕은 그제야 황녀 영애의 혼란을 이해했는지, 상반신을 일으켜 앉으며 요한을 가리켰다.
“내 아들이야.”
그 말에 요한과 황녀 영애의 푸른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요한은 무표정했지만 미묘하게 동공이 흔들렸다.
나는 홀로 차오른 감동을 꾹 눌렀다.
오랜 시간 헤어졌던, 모자 상봉이라니.
눈이 젖어 들려는 찰나 리베라가 마왕에게 다시 물었다.
“……아들이 있었어?”
감동은커녕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너 이 새X 유부남이었어?”
바닥을 향해 내려갔던 커다란 베개가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퍼억.
“이 미친놈이! 유부남이 처녀를 꼬셔서 결혼을 해? 애도 있는 새X가?!”
“아니, 잠깐만! 그런 게 아니다! 으억!”
“어디서 변명이야! 입 다물어!”
황녀 영애 리베라는 아까보다도 더 세차고 빠르게 마왕을 패기 시작했다.
그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요한은 움찔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쪽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입을 달싹이던 키스카 영애가 물었다.
“유부남도 남주가 될 수 있나요?”
“없죠.”
나는 당황한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었다.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자세히 알려 드릴 수는 없는데…… 요한은 리베라 영애의 아들이에요. 전생에 마왕이랑 낳은 아들이라.”
“네?”
“전생이요?”
키스카와 안젤리카가 동시에 놀라 나를 쳐다봤다. 그러나 디아나는 크게 놀라지 않은 듯했다.
“아, 그렇게 엮였군요.”
디아나는 그간 삶의 굴곡이 많았는지 이 정도는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안전한 거 같은데, 저희 황녀 영애님께 같이 가시죠.”
화면에는 엄마 아빠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덩치 큰 아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아무리 어른이라도 부부 싸움을 지켜보는 건 아이의 정서에 좋지 않으니까요.”
“아이요?”
“농담이에요. 어쨌든 리베라 영애가 많이 당황했을 테니 상황을 알려 줄 필요가 있을 거 같아요. 같이 가요, 다들.”
“그래요. 아무것도 모르시니 얼마나 당황스럽겠어요. 우리가 가서 도와드려야죠.”
“네, 저도 태블릿을 찾아와야 하니까 가야겠어요.”
그런데 가만히 있던 과몰입 유저 디아나가 입을 열었다.
“근데 이제 녹스는 어떻게 되는 거죠?”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유저가 한꺼번에 고개를 틀어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디아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구심을 표했다.
“황녀가 깨어나지 않아서 협회장이 황제 대행을 한 거잖아요. 그런데 이제 황녀 영애가 깨어났잖아요.”
키스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네요? 이제 녹스는 완전 끝이네.”
세상에. 이제 아우로라 황실이 복권되는 건 시간문제구나.
이미 녹스는 녹스파에게 신임을 잃기도 했고, 황녀 영애 리베라는 정통성이 있는 데다 무시무시한 남편과 아들까지 업고 있다.
마왕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마지막 황제의 누이.
겨울국에 무언가 큰 변화가 생길 것 같았다.
***
사박사박.
나는 탑 근처 정원으로 요한을 데려갔다. 그리고 주변을 몇 번 살핀 후 뒤돌아 그를 응시했다.
요한은 갑자기 끌려 나와 당황했는지 눈썹이 약간 올라가 있었다.
나는 목소리를 줄이고 물었다.
“대체 마왕이랑 왜 여기에 있어요?”
요한은 예상했던 질문인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성에 계속 계시길래 포기한 줄 알았는데 반지를 찾으시는 거였어요. 찾자마자 사계국으로 건너가셨길래 저도 바로 추격했고요.]”
“반지요?”
“[네. 어머니의 결혼반지라고 합니다.]”
마왕은 그걸 찾으려고 마족 지대로 갔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찾자마자 다시 돌아왔고.
눈이 흐려졌다.
아무리 모두가 애처가인 세상이라지만, 개그캐 세계관 최강자까지 로맨틱할 필요 있냐고…….
요한은 변한 내 표정을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한걸음 가까이 다가온 그가 몸을 숙여 시선을 맞췄다.
“[경계에 갇히는 바람에 조금 늦었습니다. 혹시 제가 도착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아뇨! 마왕은 오자마자 황녀님을 찾아갔어요.”
“[근데 왜 그런 표정을 짓습니까?]”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데요?”
“[무언가를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걱정되죠.”
마왕이 건너왔는데!
나는 힐긋 귀빈성을 보다 다시 요한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토벌대원들이 황성에서 지내고 있거든요.”
괜히 그들이 마주쳤다가 기껏 막아 낸 재앙이 발현되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마왕이 미쳐 날뛰는 거 아니냐고.
요한은 나를 따라 시선을 틀어 귀빈성을 쳐다봤다.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어머니께서 인간을 죽이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럴까요?”
“[네, 어머니의 말은 절대적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절대적이라.
나는 좀 찜찜하긴 했지만, 요한을 믿었다.
요한의 남주 시점 전개로 마왕의 태도를 본 적이 있는데, 마왕은 전생에 황녀 영애에게 목줄을 채워 달라고 애원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 리베라 영애를 믿어 보자.
황녀 영애를 믿기로 한 나는 걱정을 내려 두고 다시 요한을 쳐다봤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요한이 설풋 웃었다.
“왜 웃어요?”
잠시 침묵하던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그는 손등에 입을 맞추더니 입매를 휘었다.
“[보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