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8. 마지막 연대
195화.
아침이 오고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들렸다. 잠에 젖은 눈꺼풀이 올라가는 순간 상태창이 보였다.
[축하합니다! 모든 유저가 남주 선택을 완료했습니다.]
전체 공지였다.
이른 아침부터 떠오른 공지가 불쾌했지만, 나는 협탁에 놓인 물을 마시며 다음 내용을 기다렸다.
[남주에게 내장된 시나리오로 유저의 [전]-[결]이 자동 업로드됩니다.
시나리오 업로드 시간은 유저와 남주의 키워드 매칭률과 에피소드 개수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들은 차분하게 다가올 [전]-[결]에 대해 알려 주었다.
[남주와 유저의 키워드가 상반될수록, 함께한 시간이 적을수록 업로드 속도가 늦어집니다.]
그렇구나.
무감하게 글을 보는데 이상한 말이 눈에 들어왔다.
[사계국의 타임라인은 10일 후 마감됩니다.]
타임라인의 끝. 모든 게 종료되는 날짜가 공지되었다.
모든 유저가 함께 [결]을 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었다.
이상하게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든다.
그때, 시스템 창이 붉게 변하며 새로운 텍스트를 띄웠다. 마치 경고 문구처럼.
[※주의※ 타임라인 마감일 내에 시나리오 업로드 미완료 시, 게임 클리어에 실패합니다!]
“뭐? 클리어 실패라니!”
당황한 나와 달리 시스템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게임 클리어에 실패할 경우 20억 정산이 취소됩니다.]
[현재 유저의 업로드 진행률은 AI 담당자를 통해 조회 가능합니다.]
나는 침대 위에 앉은 채 허공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나는 바로 내 업로드율을 확인했다.
‘저 업로드 얼마나 됐나요?’
남주를 선택한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내가 선택한 남주는 요한이었다.
혹시라도 또 버그가 생겼을까 봐 긴장됐다.
그러나 웬일인지 게임은 내게 좋은 결과를 알려 주었다.
[유저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의 남주 시나리오 업로드율은 100%입니다.]
내 시나리오는 업로드가 완료되어 있었다.
“다행이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 문제 없이 업로드가 끝났다.
하지만 우울함은 그대로였다.
‘10일 후면 모든 게 사라진다니.’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던 나는 침대 아래 숨겨 둔 노트북을 꺼냈다.
전체 공지가 올라오고 나면 커뮤니티가 활성화됐다. 분명 지금도 커뮤니티에 글이 잔뜩 올라와 있을 거다.
나는 다른 유저들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그러면 이 불안함이 조금 가라앉을까 싶어서.
제목: 미친 그럼 이제 완전히 끝인 건가? [0]
제목: 나가기 싫다... 진짜 나가기 싫어 ㅠㅠㅠㅠㅠ[0]
제목: 아 나 진짜 눈물 나... 다음 주에 아빠 생일인데 축하도 못 해주겠네.... [2]
나와 비슷하게 미련이 깊은 사람들이 많았다.
제목: 차라리 마감일 알려줘서 다행이지! 빡세게 즐기고 로그아웃 하자 [3]
제목: 영애들 20억 타면 뭐 할 거야? 난 일어나자마자 퇴사 갈길거임 ㅠ^ㅠ [4]
소수지만 바로 다음 일을 준비하는 영애들도 있었다. 그들은 현생으로 돌아간 뒤의 일을 고민하기도 했다.
반응은 다르지만, 눈앞에 닥친 현실은 같았다.
일어나면 다시 하루가 시작될 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분명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저 꿈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살게 될 테니.
나는 마지막이 되어서야 내가 어떤 유저였는지 깨달았다.
나는 몰입 거부자가 아닌 과몰입 유저였다. 결국 현실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울적해지는 찰나, 어떠한 글 하나가 내 시선을 잡아챘다.
제목: 그동안 미안했어ㅜ [23]
『나가기 전에 내가 썼던 글들을 봤는데, 그동안 왜 그렇게 순위에 목을 맸던 건지 모르겠어.
그깟 경쟁이 뭐라고…….
영애들 같은 사람을 만난 건 내 인생의 행운이었는데 그 기회를 날려버린 것 같아.
인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사과하고 싶고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었어.
여기서 즐거웠던 기억, 행복했던 기억을 돌아보니까 그건 영애들이랑 함께했던 순간들이더라.
밖으로 나가서도 영애들이 알려준 따뜻한 연대의식 잊지 않을게.
영애들이 어떤 삶을 사는 사람들인지는 모르지만, 나가서도 꼭 행복하고 잘 지내길 바랄게.』
└ 나도 반성... 대체 왜 그랬을까 ㅠㅠ 익숙함에 속았었나 봐
└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결국 서로 응원하고 돕고 그랬잖아 ㅎㅎ 영애도 분명 누군가에게 힘이 된 적이 있을 거야! 죄책감 갖지 말구 나가서도 건강하게 잘 지내!
└ 맞아 다 같이 [결]까지 온 거 정말 대단하다... 우리 다 고생 많았어 ㅌㄷㅌㄷ
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그래서 공감도 갔고, 슬프기도 했다.
한 명이 스타트를 끊으니,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며칠 후.
커뮤니티를 뒤집을 새로운 글이 업데이트되었다.
제목: 안녕, 리안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0]
***
봄국 남부.
그곳은 광활한 경작지가 있는 영토였다.
영지민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고, 귀족은커녕 성을 가진 이들도 많지 않았다. 그런 동네에 드레스 수요가 높을 리 없었다.
리안은 작은 창문을 열고 그 앞에 앉아 푸른 보리밭을 바라봤다.
심지어 리안은 제대로 된 양장점을 얻지도 못했다. 그녀의 가게는 작은 여관에 붙어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 평화로운 마을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로그아웃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로그아웃하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직 이 세계에 미련이 남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도망치듯 남부로 내려왔다.
리안은 밭에서 잡초를 뽑다 허리를 펴는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치마가 아닌, 고무줄로 발목과 허리를 조인 얇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정확히는 치마 위에 그 옷을 덧입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작업을 하는 모든 여인이 그 편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리안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석 달 치 가게 월세를 책임져 준 상품이었다.
기존에 만들던 고급 드레스와 달리 기능에 의존한 편안한 옷.
예쁜 걸 만들지 않아도 옷을 만드는 건 여전히 좋았다.
저 바지도 버프를 받은 건지 인기가 좋았다. 옆 나라까지 소문이 나서 리안은 지난주에 외국에서 들어온 주문까지 모두 제작을 마쳤다.
배송을 마치고 나니 일이 없는 적막한 일상이 찾아왔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는 선선한 봄바람을 느끼며 찻잔을 내려 두었다.
딸랑.
그때, 누군가 그녀의 작은 가게로 들어왔다.
누구지?
몸을 돌리려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리안.”
몸을 돌린 리안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청회색 눈동자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다가와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제가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당황한 리안은 의자에서 일어나 남주를 일으켰다.
“이, 이러지 마세요!”
“제가 왜 그랬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대를 찾아다녔습니다.”
남주는 정말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리안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갑자기 자길 찾아와 용서를 구하는지.
#후회남 키워드라도 있는 건가?
사정이 무엇이든 간에 리안은 그를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리안은 그날의 감정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왜 절 찾아왔는지 모르지만 돌아가 주세요.”
“리안.”
그녀를 부르는 안타까운 목소리와 달리 남자는 순순히 리안의 손길을 따라 물러났다.
적어도 그날은 그랬다.
하지만 남주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여관에 묵으며 리안의 주변에서 계속 머물렀다.
가뜩이나 할 일이 없는데 그녀의 가게를 청소하고, 들에서 꺾어 온 꽃을 화병에 가득 채워 두고, 식사까지 챙겨 주는 남주 때문에 리안은 더 할 일이 없어졌다.
리안은 그가 가져온 흰 빵 바구니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주는 흠칫했다.
“흰 빵을 싫어하십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녀는 시선을 들어 남주를 바라봤다.
‘윽, 대체 왜 저렇게 생긴 거야.’
리안은 자신의 취향 그대로 생긴 남주에게 흔들리는 마음을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물었다.
“대체 언제까지 머무실 거예요?”
“아.”
남주는 목덜미를 쓸며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돌아갈 날을 딱히 정해 두지 않아서요.”
“일 안 하세요?”
“네. 안 해도 됩니다.”
사실 외관만 봐도 일을 안 해도 충분히 먹고살 것 같아 보이긴 했다. 그래서 그 대답은 놀랍지 않았다.
리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예요. 일 안 해도 되니까 그만 도와주세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주는 웃으며 살짝 화병을 돌렸다. 꽃이 쏠린 방향을 그녀 쪽으로 바꾼 그는 해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당신을 도울 수 있어서 행복한걸요.”
“원래 이렇게…….”
능글맞았나?
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남주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심지어 이름조차 몰랐다.
며칠이 지나도 그녀는 이름을 묻지 못했다.
그와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 리안의 마음과 달리, 남주는 그녀의 곁에 있는 게 진심으로 기쁜 모양이었다.
남주는 한 달이 지나도 돌아가지 않았다.
***
봄비가 내리는 오후였다.
기울어진 창문에 맺힌 빗물이 툭툭 떨어졌다.
리안은 그 모습을 보다 남주에게 시선을 틀었다.
그는 리안이 만든 편한 셔츠를 입고 천장을 고치고 있었다. 빗물이 새는 곳에 나무를 덧대 망치질을 하는 남주를 보던 리안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제는 물어야 했다.
“그때 그 여자분은 어떻게 된 거예요?”
지금 천장을 고치고 있는 저 남주는 분명 다른 영애의 슬롯에 담겼었고, 선택까지 끝났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찾아온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템을 쓴 건가?
그 영애가 남주 교환권을 쓰고 슬롯 제거권까지 사용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건 전부 리안의 추측이었다.
직설적인 질문에 곤란해할 줄 알았는데 남주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마저 보수를 끝냈다.
못질을 마친 남주가 시선을 내렸다.
“짧게 할 얘긴 아닌데, 길게 해도 괜찮아요?”
남주는 그렇게 말하며 에일을 담아 둔 병을 힐긋 쳐다봤다.
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주는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고는 바로 술을 가져왔다.
그는 리안에게 먼저 잔을 따라 준 후 제 잔을 채웠다.
“실은…….”
남주는 리안이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그동안 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