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
“그러니까 이분이 돌아가신 황후…….”
“네, 맞아요.”
“이 사람이 버그가 된 건 영애를 지키려고…….”
“네, 그랬죠.”
“디아나, 이것부터 먹어 봐.”
디아나와 진지한 대화를 하는데 진달래 화전을 집은 젓가락이 쑥 디아나와 내 사이로 파고들었다.
버그이자 디아나의 모후인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디아나를 재촉했다.
디아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치를 보다 냠, 하고 그 화전을 입에 물었다.
잠시 맑아졌던 눈이 다시 흐려졌다.
“아니, 그럼 차애가 나라고 했던 건 최애가 디아나라서 그런 거였어…… 요?”
남의 엄마라고 생각하니 더는 버그를 하대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마지못해 존댓말을 하며 그녀에게 계속 질문했다.
“맞아.”
그녀는 웃으며 나를 칭찬하듯 내게도 화전을 하나 집어 입에 넣어 줬다.
어이가 없어서 계속 벌어져 있던 입으로 꿀에 젖은 화전이 쏙 들어왔다.
지금 화전 먹을 때냐고!
울컥 화를 내려던 나는 디아나의 미소를 보는 순간 그대로 입을 콱 다물었다.
내가 진짜 디아나 때문에 참는다.
우물우물.
눈을 가늘게 뜨고 버그를 노려보며 찹쌀 반죽을 꼭꼭 씹는데,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데이지도 귀여운 면이 있어.”
됐어! 너한테 귀여움 받고 싶지 않아!
그러나 말로 뱉지는 못했다.
하, 정신이 없다.
나는 방금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됐다.
1차 베타 테스트는 사실 인체 실험이었다고 한다. AI에게 감정 학습을 하려고 인간의 뇌와 연결한 거라고 하는데, 자세한 원리는 모르겠다.
설명해 주긴 했는데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2차 베타 테스트는 저 버그가 만든 거라고 한다.
혼자 만든 건 아니라고 하는데 어쨌든 버그가 만들었다고 한다.
유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캐릭터들은 고뇌를 반복했고, 그 바람에 수많은 버그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다시 만나기 위해 세계를 다시 만들었다.
‘멀티 메타야……?’
이거 무슨 멀티 유니버스도 아니고.
의 게임 서버를 우회해 새로운 서버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오직 우리만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버그는 우리의 행복 극대화를 위해 진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 아니야?
우리의 행복을 위해 움직인다니.
너희한테 무슨 이득이 있다고.
나는 잔을 내려 두며 시선을 틀었다. 그러자 미소를 짓고 있는 디아나가 보였다.
디아나의 얼굴 근육이 부드럽게 풀려 있고 눈은 맑게 빛났다.
나는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디아나를 보고 있으니 저 버그 자식의 말에 묘하게 설득력이 느껴진 탓이다.
행복…….
나는 잠시 버그가 말한 그들의 목표를 곱씹어 봤다.
영애들과 함께 여행을 계획하는 것도 즐거웠고, 나를 위해 세심하게 짐을 챙겨 준 비에른과 웬디의 마음에 감사했고, 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요한을 생각하면…….
나는 한 손으로 뺨을 누르며 턱을 괬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행복한 것 같았다.
다시 시선을 드는 순간 버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내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
그게 불편해서 나는 술이나 마시려 했다. 술병으로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드르륵 쾅.
장지문이 거칠게 열렸다.
“폐하!”
“대체 왜 또 호위도 없이 잠행을 나가신 겁니까!”
익숙한 남자 둘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을 빛내며 들어왔다.
삼검과 사검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남장한 디아나에게 박혀 있었다.
나는 우람한 장정들이 내뿜는 기세에 움츠러들었는데, K 장녀 디아나는 동생들의 시선이 그저 간지러운지 고운 눈썹만 까닥 들어 올렸다.
“또 미행을 한 건가?”
“이렇게 매번 말도 없이 사라지시니 안 할 수 있습니까?!”
삼검은 부정하지 않으며 대들었다. 그러나 사검은 침묵했다.
“너도 거들어라! 언제까지 이렇게 막 다니게 할 수는 없잖아.”
“…….”
“사검!”
삼검은 제 말을 무시하는 사검에게 버럭 소리치며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넋이 나간 사검을 발견한 그는 사검의 시선을 따라 디아나의 맞은편에 앉은 이를 쳐다봤다.
그 순간 방이 고요해졌다.
깊은 심연에 들어간 것처럼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곧 삼검과 사검이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어붙은 삼검과 사검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 디아나의 모후면…….’
삼검의 붉은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혼잣말하듯 말했다.
“……어머니?”
사검은 제가 울고 있다는 걸 모르는 듯하나 그의 얼굴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디아나를 쳐다봤다.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던 디아나가 내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스크롤을 꺼내 보였다.
모자 상봉의 시간. 남의 집안일이니 자리를 피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이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도 되니까.
디아나는 삼검과 사검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다시 내게 시선을 틀더니,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아래로 살짝 손을 흔들었다.
찌이익.
나는 바로 눈을 감고 숙소로 돌아갔다. 버그의 막장 취향이 내게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원을 품으며.
***
여름국에서 진실을 알게 된 이후 의심이 생겼다.
나는 하얀 말의 고삐를 정리하는 요한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요한도 버그일까?
푸른 하늘 아래로 비처럼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요한은 평화롭게 말의 갈퀴를 쓰다듬었다.
그는 교감을 끝냈는지, 내 쪽으로 말을 끌고 왔다.
나는 시선을 살짝 움직여 하얀 말을 쳐다봤다.
“저 이제 말 잘 탄다니까요?”
“[잘 타도 알려 드리겠습니다.]”
요한은 웃으며 내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마족 지대에서 내가 승마는커녕 혼자 말에 오르지도 못하는 모습을 봤으니 저 반응을 이해했다.
하지만 진짜인데.
나 이제 어디서든 승마 스킬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단 말이야.
요한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잡고 말에 올라타라는 거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요한의 손을 잡는 대신 말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안장을 잡고 발을 굴렀다.
휙.
붕 떠오른 몸이 자석처럼 안장에 착 달라붙었다.
고작 말안장에 제대로 앉았을 뿐이지만, 나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으며 요한을 내려다봤다.
“봐요. 잘 탄다고 했잖아요.”
요한은 조금 놀란 듯했다. 푸른 눈동자에 자리한 검은 동공이 순간 넓어졌다.
저런 걸 보면 버그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버그라면 내게 스킬이 있다는 걸 알 테니 놀라지 않을 거다.
요한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동안 연습을 많이 하셨군요.]”
“그렇다니까요.”
갑자기 승마를 잘하면 마족 지대에서 거짓말을 한 게 될까 봐 나는 사계국으로 돌아온 이후 열심히 승마 연습을 했다고 둘러댔었다.
“정말~ 승마는 따로 배울 필요 없어요~.”
나는 요한을 놀리듯 오만하게 말꼬리를 끌며, 말을 타고 요한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요한은 가만히 선 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제가 뭘 가르쳐 드릴 필요가 없네요.]”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가 잘 타서 자존심 상해할까 살짝 걱정했는데.
근데 왜 좋아하는 거지?
말을 멈춘 나는 몸을 숙여 요한의 표정을 살폈다.
“기분 좋아 보이네요?”
요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일정을 당겨도 될 것 같아서요.]”
“무슨 일정이요?”
그때 요한이 말고삐를 잡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그 바람에 나는 코앞에서 그와 얼굴을 마주하게 됐다.
당황해 움찔 물러나자 요한이 그만큼 앞으로 고개를 기울여 다시 간격을 좁혔다.
그는 입매로 호선을 그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데이지와 함께 여행을 가고 싶습니다.]”
얼마 전에 여름국에 갈 때 두고 갔더니, 그걸 마음에 담아 둔 모양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어디로 가고 싶어요? 여름국? 겨울국?”
“[여름국도 겨울국도 다 갈 겁니다.]”
“아하, 욕심이 많네요.”
“[가을국도 다시 갈 거고요.]”
“아, 가을국까지?”
놀리듯 장난치며 그의 말꼬리를 잡았다. 그러나 요한은 미소를 지은 채 계속 제 계획을 늘어놓았다.
“[네, 따뜻한 바닷가에서 모래사장에 파묻혀 보고, 선선한 숲으로 가서 사냥도 하고.]”
그는 짧게 미소를 지으며 여행을 가고 싶은 이유를 털어놓았다.
“[데이지는 늘 집 안에서만 지냈잖아요.]”
예전에 요한에게 몸이 좋지 않아 저택에서 갇혀 지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그 말을 신경 써 온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좋은 곳을 많이 보게 해 줄게요.]”
푸른 눈동자에 가득한 다정한 마음이 간지러웠다. 나는 괜히 바닥으로 시선을 내려 그 눈빛을 피했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말에 붙어 있던 요한의 그림자가 떨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말은 잘 타시니까 저만 노력하면 되겠네요. 여행지는 잘 찾아볼게요.]”
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포근한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요한이 말 갈퀴를 쓰다듬고 있었다.
“노력 안 해도 돼요.”
내 말에 요한이 고개를 들었다.
“같이 알아보면 되니까.”
요한의 입술 사이로 가벼운 바람이 새어 나왔다.
“[‘같이’ 한다는 게 좋네요.]”
그는 내 손을 잡았다. 맞닿은 살갗을 타고 온기가 흘러왔다.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게 설레거든요.]”
“제가 말조심하랬죠.”
나 설레는 말에 약하단 말이야.
나는 괜히 헛기침했다.
그런데 손으로 전해지던 온기가 잠시 거둬지더니, 등으로 옮겨 갔다.
순식간에 요한이 말 위로 올라탔다.
“왜 갑자기 올라…….”
고개를 돌렸던 나는 놀라 숨을 멈췄다. 몸을 숙인 요한의 얼굴이 맞닿을 듯 가까웠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시선이 얽혔다. 좁은 거리로 전해 오는 무언의 눈빛에 나는 긴장했다.
그때, 뺨을 간질이는 따스한 숨이 천천히 내려갔다. 입술로 다가온 온기가 가볍게 내려앉았다가 멀어졌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 입가를 손끝으로 닦고는 가볍게 다시 한번 입술을 내리눌렀다.
“[가고 싶었던 곳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냥 어딜 가든 좋을 거 같은데요.”
“[저도 그런데.]”
그가 웃음을 흘리는 동시에 하얀 말이 발을 내디뎠다.
“[첫 여행지는 금방 고를 수 있겠네요.]”
요한은 고삐를 쥔 내 주먹 위로 손을 겹쳐 왔다. 나는 내 손을 덮은 긴 손가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 다가올 여행을 기대하며 뭉게구름이 가득한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든, 그날이 언제이든 행복할 것 같았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감싼 봄의 하늘은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따사로울 테니까.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