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해피 버스데이(2)
조진기?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우리가 관심을 보이자, 연국대병원의 정보통 중원이 형이 말을 이었다.
"걔, 근황 들어 보니까 완전 망한 것 같더라."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던 근욱이도 귀를 쫑긋이며 고개를 들었다.
"몇몇 과들은 프로퍼(proper, 지망하는 인턴) 몇 명인지 확인하려고, 치프 레지던트가 애들 모아 봤던 거 알지?"
"알죠."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9월 중순.
이제 슬슬 스토브 리그 때와는 또 다른 진풍경이 펼쳐지는 시기다.
일종의 <눈치싸움 시즌>이랄까?
자신이 원하는 과에 가기 위해 서로 탐색전을 벌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밖에 찬스가 없으니까.’
레지던트 지원은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2지망이 있긴 하지만, 여기에 속하는 과는 비인기과뿐.
그래서 1지망에 떨어진 인턴들은 아예 1년을 쉬었다가 다시 지원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말이 1년이지.
누구나 실패 없이 논스톱으로 원하는 과에 가고 싶을 것이다.
게다가, 떨어진 남자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대한민국 병무청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
대부분의 남자들이 레지던트 과정이 끝난 후 군대로 가지만, 레지던트에 불합격한 인턴은 바로 군대를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턴 대나무숲에도 이런 대화들이 슬슬 오가기 시작하고 있다.
―얘들아, 올해는 어느 과로 몰릴 것 같냐?
―성적 좋은 애들 말 좀 해 봐 ㅋㅋㅋ
―올해 PS(성형외과) 의외로 노려 볼 만한 부분?
―응 돌아가. 성적 좋은 애들로 자리 꽉 찼음.
―그렇게 소문내 놓고 자기가 넣으려고? ㅋㅋㅋ
―아잇씨 들켰네 ㅋㅋㅋㅋ
등등…….
B22
벌써부터 눈치싸움이 치열하다.
물론 공식적인 레지던트 지원은 12월에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전부터 경쟁이 치열한 과들은 사람들이 몰린다.
그래서 몇몇 과들은 지원자들을 모아 놓고 딱 정원만큼, 혹은 +1명 정도로 경쟁자들을 좁혀 준다.
이를 <어레인지 해 준다>라고 표현하며, 어떤 과들은 이런 어레인지 없이 경쟁을 붙이기도 한다.
"얼마 전에 피부과 프로퍼들 한자리에 모았는데, 거기 9명 모였거든."
"9명이나요?"
역시 피부과.
정원이 단 2명인 것을 생각하면 높은 경쟁률이다.
아마 9명 모두 성적이 쟁쟁한 지원자일 것이다.
"역시 인기 과네요."
"그래. 그런데 거기 조진기도 갔다더라."
물론 놀라울 건 없다.
조진기는 원래 학부 성적이 좋기도 했고, 피부과 지망이었으니까.
그래서 예전에 내 피부과 스케줄을 비싼 값으로 교환해 가기도 했었지.
강남에 빌딩을 세우는 의사가 되겠다며 희희낙락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근데 그놈, 가자마자 쌍욕 먹었대."
"예?"
"얼굴 보자마자 <네가 여기를 왜 와 새끼야!> 하고 치프 레지던트가 면상에 볼펜 던졌다는데?"
와…….
녀석도 대단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런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거지?
어지간히 평판이 최악이 아니라면 그렇게 문전박대를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피부과에서 인턴 생활을 망쳤나 보네요."
"어. 얘기 들어 보니까 아주 한 달 동안 푸짐하게 똥을 쌌다더라."
대충 듣기만 해도 조진기의 전력은 기가 막혔다.
외래 초진 과정에서 환자와의 말다툼.
회식 자리에서 술 먹고 헛소리를 했는데, 본인은 기억도 못 함.
등등…….
압권은 그다음이었다.
"컨퍼런스(conference, 회의) 하는 도중에 야동 틀었대."
"뭐라구요?"
"푸헙."
근욱이와 명인이가 맥주를 뿜을 뻔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회의실 컴퓨터로 불법사이트에 들어가다 컴퓨터에 악성 코드가 깔렸다나?
그 결과, 회의를 하는데 화면에 19금 광고 장면이 수시로 올라왔다고 한다.
회의하는 중간에 과장님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레전드 장면을 찍었다니 말 다 했다.
그런 짓을 해 놓고 지원자 모으는 곳에 얼굴을 들이밀었으니…….
원하는 과에 가기는커녕, 인턴 과정을 무사히 패스할 수 있을지도 모를 행보를 걷는 중이었다.
"푸하하. 꼴좋다. 내가 그 자식 결국 그렇게 몰락할 줄 알았어!"
근욱이는 배를 잡고 웃더니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게 다 선한이 너 때문 아니냐?"
"내가 뭘?"
"걔 너한테 발려서 최하점 받고 난 다음부터 주르륵 미끄러지더니 그렇게 된 거잖아."
참 내.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녀석은 원래 그런 놈이었던 거고, 일을 하면서 점점 본색이 드러난 것뿐이다.
"그나저나 중원이 형은 조진기랑 좀 친했던 거 아니었어요?"
"아니야, 그 새끼 못 써먹겠어."
웬만하면 모두와 친하게 지내는 중원이 형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같이 공부할 때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일해 보니까 인성이 영 아닌 것 같아서 손절 쳤다."
쯧쯧.
업보로다.
레지던트들에게도 구박받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버림받다니…….
부디 남은 기간 동안 사고나 치지 말고 조용히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때 중원이 형이 화제를 전환했다.
"야, 그나저나 류명인 너는 어디로 갈 거냐? 인턴 동기들 모두 궁금해하던데."
"비밀이에요. 쿠쿠쿡."
류명인이 의뭉스럽게 웃었다.
학부 수석 졸업생.
인턴 1위 유력 후보.
류명인 같은 에이스가 어느 과에 지원하는지는 초미의 관심사다.
왜냐하면, 녀석이 지원하는 과에는 다른 사람의 자리가 없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류명인은 그렇게 주목받는 상황이 너무나도 즐거운 듯했다.
"선한이 형도 제가 어디 갈지 궁금하죠?"
"내가?"
"알고 싶지 않아요?"
"아니, 하나도 안 궁금한데."
"아, 왜요?"
류명인이 억울한 표정으로 묻는다.
나는 픽 웃었다.
네가 어딜 가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나는 메이저 써저리(surgery, 외과) 지망.
즉, 흉부외과(TS)나 일반외과(GS) 등을 생각하고 있다.
이쪽은 피 터지는 경쟁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일운대 출신인 나에게는 그마저도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남들이 눈치게임을 할 때 마음 편하게 관전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었다.
"아무튼 다들 어디로 갈지 마음 정해 놔라! 곧 10월이다."
"그러게요. 정신 차리면 금방 연말이겠네요."
"이번 크리스마스는 솔로로 보내야 하나?"
"크크. 근욱이는 결국 또 여자 얘기여?"
이런 걸 깔때기형 대화라고 하던가?
마침 맥주집 벽면의 스크린에 아이돌 뮤직비디오가 나오고 있었다.
"요새 아이돌은 왜 저렇게 다들 예쁘대요?"
"저도 요새는 아이돌 음악만 듣습니다. 트웰브 청연이 진리죠."
"너 이 자식, 뭘 좀 아는구나!"
"형두?"
"어, 나두!"
"근욱이 형, 제가 한 잔 드릴게요!"
"그래, 한 잔 따라 봐라!"
어느새 팬심으로 의기투합한 류명인과 김근욱이 술잔을 함께 기울인다.
그야말로 남자들의 대화로군.
한동안 부인과에 있다가 이런 대화 속에 있으니 고향에 온 것 같다.
정신없던 일상 중에, 마음 맞는 동기들과 잠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니 재충전이 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중원이 형이 낄낄대며 맥주잔을 기울이며 내게 물었다.
"근데 선한이 너는 이제 산과 돌 차례인가?"
"예. 내일 인계하고 나면 부인과 스케줄 끝나요."
"이야, 좋겠구만. 2주간 꿀 좀 빨겠네."
무슨 말이지?
꿀이라니.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원이 형이 피식 웃으며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가 보면 안다. 산과 인턴이 왜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고 불리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같은 산부인과라고는 하지만, <산과>는 <부인과>와는 또 다른 영역이다.
그곳에서 나는 또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 * *
다음 날.
부인과의 업무가 끝났다.
그리고 화제의 막장 드라마인 『천벌받을 여자』도 마지막 회였다.
어머니 환자들은 모두 스크린 앞에 모여서 흥미진진하게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저 드라마는 끝을 어떻게 내려고 저런대?"
"그러게요."
"결국 배다른 남매끼리 결혼하기로 한 거야?"
나도 미선 누나와 함께 잠시 휴게실 앞에서 멈춰 선 채 TV를 구경했다.
스크린 속 배우들은 비가 오는 야외 결혼식장에서 키스를 하고 있었다.
콰르릉~
갑자기 결혼식장에 번개가 친다.
잠시 후.
번개를 맞은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쓰러진 채 손을 붙잡으며 말한다.
<우리는 천벌받은 거야…….>
―그동안 『천벌받을 여자』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뭐야?!"
"둘 다 벼락 맞아 죽은 겨?"
"저게 뭔 개 같은 결말이래!"
"아이고, 또 속았다. 내 저딴 드라마 다시는 안 본다."
아주머니들은 씩씩 분개하며 흩어졌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다음 드라마의 애청자가 될 것임을.
저렇게 욕을 하면서도 보게 되는 것이 막장 드라마의 마력이 아닐까 싶었다.
한편, 병동에는 드라마와는 달리 해피 엔딩으로 향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병리검사 결과는 무척 희망적인 편이네요. 같은 난소암이라도 종류가 여러 개 있는데, 가장 착한 녀석인 것 같아요."
"선생님, 그러면……."
"예. 항암치료 잘 받고 하시면, 완치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거예요."
정순례 환자의 가족들은 회진을 돌던 교수님의 말에 얼굴이 밝아졌다.
지난 며칠.
나는 정순례 환자를 예의 주시했다.
다행히 출혈 소견이 없었던 환자는 수술 후 다음 날부터 피를 묽게 하는 약을 쓸 수 있었다.
수술 후 이틀째, 꿈속에서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던 그날도 병동을 몇 바퀴 돌면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 통증은 좀 어떠세요?"
"아이고, 어제보다 훨씬 좋아요."
웃는 얼굴로 정순례 환자는 대답했다.
<출혈로 인한 재수술>을 막은 것이 미래를 바꾼 것일까?
물론 확신할 순 없다.
하지만 작은 변화에도 우리 몸은 다양하게 반응할 수 있는 법.
내가 만든 그 작은 변화가, 정순례 환자가 중환자실이 아닌 여기 병동에서 웃으며 운동할 수 있게 해 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오늘.
결국 부인과 마지막 날, 무사히 퇴원하는 것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심장에 스텐트 들어가 있는 거 잊지 마시고, 혈전 생기면 안 되니까 약은 꼭 거르지 않고 꾸준히 드셔야 돼요!"
"어휴, 알겠어요 선생님."
"꼭입니다."
나는 퇴원하는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재차 당부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강조했으니 괜찮겠지?
가족들의 손을 잡고 퇴원하는 정순례 환자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환자분, 나중에 해외여행 가셔서 예쁜 호수 구경 꼭 하세요.’
나는 다시 한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부인과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음 날부터 산과 인턴의 생활을 시작했다.
* * *
산과(産科, obstetrics).
임신과 분만을 다루는 과.
병원에 있는 모든 과는 기본적으로 한 생명이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어떤 과도 새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그런데, 그중 딱 한 곳.
오로지 여기 산과에서만 새 생명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
"선한아!"
이른 아침 6시 50분.
나는 출근하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미선 누나를 만났다.
앞으로 2주간 다시 페어로 일을 하게 되었다.
"누나, 좀 피곤해 보이네요?"
"어. 어제 애기가 늦게까지 안 자서 나도 못 잤어."
퀘엥~
눈 밑이 시커멓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고 있는 미선 누나가 피곤한 듯 하품을 했다.
"그러고 보니 누나는 산과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저보다는 익숙하겠네요."
"얘, 애 낳아 봤다고 산과 인턴 잡 잘하면, 헬스장 다녀 본 사람이 트레이너도 할 수 있게? 나도 너랑 똑같이 초보야."
"그런가요?"
"뭐, 물론 산모들 마음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겠지만. 호호호."
우리는 그런 대화를 하며 산과 안으로 들어섰다.
지잉―
문이 열렸다.
"선생님, 3호실 환자 좀 빨리 봐주세요!"
그때, 스테이션에 오가는 부산스러운 발걸음 소리와 목소리들이 우리의 귀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