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277)

기숙사는 어떻게 됐어?”

가장 좋은 방으로 배정받았습니다짐도 미리 옮겨두었으니 개강일에 확인해보시면 됩니다.”

개강 전까지의 보름은 <신의 유희>를 플레이하는 유저를 위한 튜토리얼 기간이었다.

이때 기숙사와 집을 오가는 방식 중 원하는 걸 선택할 수 있었다.

통학을 선택하면 가족들과의 유대감이 깊어져 앞으로의 플레이에서 적극적인 서포트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리비에 한해서였다.

테레제는 집을 떠나는 쪽이 차라리 안전할 테니까.’

기숙사 루트를 선택하면 캐릭터 능력치를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다.

더 중요한 건 남자 주인공들과 자주 마주할 일이 생긴다는 거였다.

<신의 유희>는 총 네 명의 남자 주인공이 있다.

학생회장이자 원수 가문의 후계자인 [클라이드 윌로우].

부학생회장이자 평민 출신인 [데미안 웨스트].

천재 마법사이자 마법 학교 발할라의 교수 [일리야 번스타인].

황제 [유지스 로드리고].

학교에 무려 세 명의 남주가 존재하니 기숙사를 선택하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명백한 허점이 있지.’

그렇게 되면 황제인 유지스와 만날 루트가 급격히 줄어든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고?

<신의 유희>는 모든 남주에게 각각 진엔딩과 배드엔딩이 존재했다.

진엔딩을 보려면 한 가지최소 조건이 있었다.

모든 남주의 배드엔딩 요소를 제거할 것.’

그렇지 않으면 어느 남주와 이어지더라도 멸문당하거나 암살당하는 등의 배드엔딩으로 이어지게 된다.

남주를 네 명이나 만들었는데 다 찍먹은 해봐야지.’

그런 의도로 집어넣은 설정이 지금의 내게 어떻게 작용할지 모를 위험한 변수가 되어버렸다.

남자주인공의 호감도가 최악으로 치달으면 베드엔딩이 뜬다.

한데 테레제는 모든 남자주인공과 원수 내지는 반드시 죽여야 할 가문의 딸.

리비처럼 성인이 되도록 가문 밖에서 자랐다는 특수성이 없었다.

이 세계에서 벗어날 때까지 과연 내가 배드엔딩을 피할 수 있을까?

심지어 테레제는 너무 유명해서 다른 나라로 망명도 불가능해.’

하아아아.”

내 한숨에 시녀가 몸을 움찔했다.

그녀는 테레제의 옷 중에서도 단출한 편인 연보라색 드레스를 불안하게 힐끗거리며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역시 이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거죠당장 다른 드레스로 바꿔오겠습니다.”

아냐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드레스는 마음에 들어.”

시녀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기색이었으나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꼭 흉포한 곰을 자극하지 않으려 일부러 느릿하게 움직이는 사람처럼…….

몸단장을 끝낸 후 방구석에 처박힌 새것 같은 책상에 앉았다.

새것 같은 게 아니라 새것이겠지테레제가 책상을 쓸 리가 없으니.’

나는 긁힌 자국 하나 없이 매끈한 호두나무 책상 위에 잉크종이를 꺼냈다.

스콰이어 가문에 들러붙어 곳간을 털어먹는 식충이 목록부터 작성해야겠다.’

플레이에 확실한 지장을 주는 악역은 미리 처리할 예정이었다.

집을 떠날 때쯤 주면 되겠지.’

그 전에 이런 걸 줬다가는 어떻게 알았느냐고 추궁당할 수도 있고혹시라도 내가 후계자 자리에 미련이 있다고 비추어질 수도 있었다.

전부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열성적으로 명부를 작성하고 있을 때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지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들어와.”

내가 명부를 감추고 마법서를 꺼내며 대답하자 방으로 하인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은 이 추운 날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가씨가구를 전부 교체해야 하는데잠깐 문을 열어두어도 괜찮겠습니까?”

갑자기 멀쩡한 가구는 왜?”

주인님께서 아가씨의 품위에 맞지 않는다며 새것으로 바꾸라 명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테레제한테 품위가 어딨어.’

으응그래.”

기숙사도 배정받았으니 내가 이 집에 돌아올 일은 없었다.

사용할 주인이 없는 데다 내가 떠난 뒤에도 전혀 활용되지 않을 이 구석진 방에 새 가구를 채우는 게 몹시 낭비처럼 느껴졌다.

내 돈 쓰는 건 아니니까 상관없나가구야 필요해지면 누구든 가져다 쓰겠지.’

……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이 되자 미란다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아가씨지금 막 전용 마차가 도착했는데보시겠어요?”

누구 거를 말하는 거야?”

당연히 테레제 아가씨께서 쓸 마차죠!”

그런 거 산 적 없는데?”

가주님께서 생일선물로 주셨답니다어서 보러 가요다들 난리예요.”

테레제의 전용 마차 같은 설정을 넣은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야?

띠링!

[성좌 하하버스’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찾았다내 안식처.]

나는 얼떨떨한 상태로 미란다와 함께 마차를 보러 갔다.

엄청난 슈퍼카를 구경하러 온 구경꾼들처럼 가솔들이 옹기종기 모여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아한 모양의 차분한 올리브색 마차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으응?”

너무 익숙한 디자인에 순간적으로 얼이 빠졌다.

난 이 마차의 색상코드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어?”

리비가 생일선물로 받아야 할 마차인데?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차를 보던 내게 도노반이 다가왔다.

벌써 오셨군요아가씨곧 다른 분들도 내려오실 겁니다마차는 마음에 드십니까?”

당연히 마음에 들었다.

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들려고 디자인에 무척 신경 쓴 마차니까.

이게 내 전용 마차라고?”

그렇습니다주인님께서 아가씨의 생일선물로 들이라 하셨지요.”

하지만 나 백지수표도 받았는데마차까지는 너무 과하잖아.”

내 말에 도노반의 표정이 묘해지더니 어쩐지 더 공손해진 태도로 말했다.

백지수표도마차도 전부 아가씨의 생일선물이 맞습니다기쁘게 받아주십시오주인님께서는 전혀 과하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아니내가 과하다고 생각한다고.’

[성좌들이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물질만능주의’ 님이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이미 받아버린 마차를 어떻게 할 수도 없고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공작 부부와 리비주세페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라울은 이미 도착해 마차를 보고 있던 날 발견하더니 무뚝뚝한 얼굴로 물었다.

몸은 어떻지?”

나는 단번에 알아듣지 못한 표정으로 라울을 쳐다보았다.

쓰러졌었지 않았느냐.”

이런 걸 왜 묻지?’

쓰러진 건 벌써 이틀 전의 일이었다.

…… 쓰러진 건 아니고 잠깐 어지러웠던 것뿐이었어요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함의를 라울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느낀 모양이었다.

다들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울은 잠깐 헛기침하더니 마차를 힐끗 보며 물었다.

마차는 마음에 드느냐?”

이 빙의에 다행스러운 점은기초적인 예법 정도는 반사적으로 나온다는 거였다.

나는 예를 갖춰 말했다.

감사합니다아버지잘 쓰겠습니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라울은 인사하는 나를 어딘가 착잡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꼭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사람처럼.’

내가 빙의되어서 한 일이라고는 테레제답게 라울을 화나게 한 것뿐이었다.

실제로 라울은 계속 실망하고 화냈지.’

생일을 잊은 게 그렇게 미안했나하지만 테레제 생일이잖아.

잊는 게 당연한 건데.

갑자기 자식을 평등하게 돌보는 아버지 노릇을 하고 싶어진 거라면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그거였나?’

게임에서는 스콰이어 가문의 내밀한 사정을 다루지 않는다.

그러니 이건 자동으로 스토리 여백이 채워지며 생긴 설정의 여파일 수 있었다.

이제 라울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니까내가 너무 단순하게 여겼어.’

라울은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을 원하는 듯하니 장단을 맞춰야겠다.

나는 마차를 더 자세히 보고 싶은데 차마 말하지 못해서 움찔거리고 있는 주세페에게 말했다.

가까이 와서 살펴봐도 돼.”

주세페는 약간 자존심 상한 표정을 지었으나 결국 참지 못하고 마차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과연 한창 자동차 같은 거에 환장할 나이대의 소년다운 반응이었다.

흐음이런 형식은 처음 보는데.”

주세페는 애써 뚱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마차 문도 휙 열어보았다.

겉치장에 비해 내장재가 좀 아쉽네. 21년식 마차들에 비하면 내부 디자인도 너무 단순하고.”

나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주세페에게 한 수 알려주었다.

그래서 내부가 넓잖아원래 뭐든 단순한 모양일수록 더 뛰어난 기술력이 필요해내부는 습기와 열에 모두 강한 자재를 사용하느라 겉보기만 검소하지가격은 엄청 비싸쓸데없는 무게를 줄여서 바퀴 마모도 덜할 테니 안전성도 높고.”

내가 말을 마치자 다들 날 희한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주세페의 표정이 가장 압권이었다.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그야 사랑받는 공녀리비가 공작저로 돌아와 처음으로 맞은 생일날 받는 선물인 만큼나랑 우리 팀이 혼을 갈아 만든 마차니까.

띠링!

[성좌 문송합니다’ 님이 1,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과가 또…….]

이건 이과랑 상관없다고요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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