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 *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던 장난이 손쉽게 파훼 당하자 데미안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그늘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나 귀부인이 탄 마차는 달려가봤자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한참 멀어져 있었다.
“뭐야…?”
귀부인에게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당장 원장을 찾아갔다.
“원장님. 오늘 여기를 찾아오신 귀부인님이 누구신가요?”
원장이 곤란함과 짜증이 뒤섞인 표정으로 엄하게 말했다.
“너는 몰라도 된다.”
그리고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벌였다.
“생각해보니 네 학업 성적이 무척 뛰어나 수도에 남아 있는 편이 좋겠더구나. 앞으로 공부에 더 전념할 수 있도록 방도 개인실로 바꾸도록 하고.”
자신이 원하는 건 귀부인에 대한 정보였는데 난데없이 방이 생겼다.
“앞으로는 여길 쓰거라.”
심지어 보육원에서 가장 좋은 방이었다.
데미안은 잠시 눈을 가늘게 떴으나 곧 착한 아이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원장님.”
원장은 일부러 귀부인의 정체를 제게 감추고 있었다.
‘캐물어봤자 날 더 경계하겠지.’
데미안은 얌전히 공부하고 역겨운 식사를 군말 없이 마친 뒤 양치질했다.
착한 아이는 잠들어야 할 밤늦은 시각.
그는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움직여 밖으로 나왔다.
선생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카드 게임을 하는 방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말소리가 들렸다.
“씁, 그 여자는 남편이 죽은 게 언젠데 계속 얼굴을 감추는 거야?”
“3년이나 흘렀으니 칙칙한 상복도 벗고 베일도 치워버리지. 듣자 하니 대단한 미인이라던데?”
다 쓸모없는 정보들이었다.
데미안은 원장실의 자물쇠를 풀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엇도 태울 수 없는 불이여, 반딧불이의 빛처럼 켜져라.”
그는 서류를 뒤졌다.
오늘 새로 작성한 서류인지 깨끗한 종이가 대번에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쓰는 종이는 질이 나쁘기에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쉽게 낡는다.
그랬기에 오늘 작성한 계약서를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걸 통해 데미안은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귀부인이 자신을 후원하기로 했다.
서명란에 적힌 이름은 ‘알렌’이었으나, 어쩐지 그 여자의 이름일 것 같지 않았다.
이건 귀부인이 자신에게 내는 퀴즈 게임 같았다.
‘나는 누구일까요?’
데미안은 귀부인의 생김새도, 이름도, 목소리도 몰랐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까맣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데미안은 그녀에게 별명을 붙였다.
‘까마귀 부인.’
“까마귀 부인은 내가 누군지 알까?”
분명 얼굴도 보지 않았는데.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도 모를 텐데.
데미안은 까마귀 부인이 다시 방문하는 날을 기다렸다.
다소 초조한 날들이 흘렀다.
오늘은 오려나? 내일은 오려나?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여자는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선물을 받게 되었다.
남들이 쓴 글자를 지워 다시 사용하느라 헤져서 너덜너덜한 노트가 아닌, 커버부터 고급스러운 새 노트였다.
원장은 하사품을 내리는 황제라도 된 양 거만하게 말했다.
“귀부인께서 주신 선물이니 아껴서 쓰거라.”
데미안은 노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보드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귀부인님께 편지로나마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원장님.”
* * *
「존경하는 귀부인께.
안녕하세요, 귀부인. 처음 인사드립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제 이름은 데미안입니다.
보육원생들을 가엾게 여겨주시는 따스한 마음씨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편지하게 되었습니다.
귀부인께서 선물해주신 노트는 잉크가 잘 번지지 않아 공부하기가 무척 좋았습니다.
그 덕에 저는 학교에서 1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부 귀부인의 은혜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공부해서 꼭 귀부인께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 ■■■■?
-보육원생 데미안 올림.」
10살짜리가 썼다고 믿기지 않는 정갈하고 반듯한 글씨였다.
내용도 공손하고 사랑스러웠다.
띠링!
[성좌 ‘명탐정’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편지에 감춰진 내용이 있는 것으로 추정. 흐릿하게 번져있는 부분 조사 필요.]
나는 흐릿한 부분을 마력으로 닦아냈다.
그러자 글자가 드러났다.
「부인은 마법사죠?」
데미안은 편지로 나를 떠보고 있었다.
띠링!
[성좌 ‘쎄믈리에’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뭐야… 10살이라며… 무서워…]
그때 알렌이 물었다.
“이 편지는 어떻게 할까요?”
“보관함에 넣어둬. 앞으로도 보육원에서 편지가 오면 내게 가져다주고.”
“알겠습니다. 혹시 답신하시겠습니까?”
[답장하시겠습니까?]
▹답신을 쓴다.
▹무시한다.
※‘무시한다’를 선택 시 1년 후로 시간을 건너뜁니다.
나는 알렌에게 말했다.
“답장은 하지 않을 거야.”
그러자 커다란 괘종시계의 시곗바늘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빙글빙글 돌아갔다.
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
해가 뜨고 지기를 여러 번.
영상을 배속으로 감는 듯 주변의 풍경이 휙휙 바뀌고 나서야 시계가 도로 제 속도를 찾았다.
1년이 흘렀다.
똑똑.
“주인님. 알렌입니다. 보육원에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시간이 빨리 감기 되며 어느새 방에서 사라졌던 알렌이 다음 편지를 들고 나타났다.
“들어와.”
* * *
「친애하는 귀부인님께.
내심 귀부인님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런 답신이 없어서 슬펐습니다.
가엾은 보육원생 데미안은 이번에도 시험에서 1등을 했습니다.
귀부인님께 칭찬받고 싶어서요.
부담스러우시면 답장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고귀하신 부인께서 반드시 답장해줄 필요가 없는 아이니까요.
하지만 보육원에는 언젠가 꼭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11살이 된 가엾은 보육원생 데미안 올림.」
* * *
「부유하신 귀부인님께.
올해 생일 선물로 주신 새 옷과 가방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사과 모양 브로치도요.
하지만 저는 이런 선물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선물 대신 이름을 알려주세요.
제가 보육원생이 아니라 데미안이듯 말이에요.
저는 귀부인님을 까마귀라고 부르고 있어요.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시면 까마귀 부인이라고 이름을 붙이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누구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는지 헷갈릴 수도 있잖아요?
-선물은 필요 없는 데미안 올림.」
* * *
「절대로 답신하지 않는 까마귀 부인님께.
어떻게 3년 동안 제 편지에 답신을 보내지 않으시나요?
그런데도 생일 선물은 늘 챙겨주시는군요.
언제나 최고의 선물을 받았지만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제게 선물이 될 수 있는 건 부인의 편지뿐이에요.
까마귀 부인은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혹시 이미 알고 계시나요?
그렇다면 1년 사이 제 키가 13㎝ 자랐다는 사실도 알고 계세요?
-반에서 가장 키가 큰 남학생이 된 13살의 데미안 올림.」
* * *
「4년째 유령처럼 후원 중이신 까마귀 부인께.
이제 선물 같은 거 보내지 마세요. 저를 후원하지도 마세요. 저는 전교 꼴찌를 할 거고 세상에서 가장 불량한 학생이 될 예정입니다. 그런 제가 안타깝고 불쌍하게 느껴지신다면 저를 만나러 와주세요.
마지막 편지입니다.
-데미안.」
* * *
나의 하루는 데미안에게 1년이었다.
그는 꼬박꼬박 내게 편지를 보냈고 나는 매일매일 생일 선물을 보내는 날이 벌써 며칠째 반복되고 있었다.
{데미안}
나이: 15세
장래 희망: 흥신소 탐정
상태: 기분이 매우 저조함
기억 봉인 해제 진행도: ☆☆☆☆☆
[‘데미안’ 루트를 지지하는 성좌들이 안타까움에 눈물 흘립니다.]
데미안이 한 거라고는 편지를 보낸 것밖에 없었는데 어느새 그를 지지하는 성좌의 수가 급격히 불어난 듯했다.
“안타깝기는 무슨. 이 편지에 홀랑 속아서 답신했다가는 데미안이 곧장 추적 마법을 걸어서 저를 찾아온다고요.”
나는 답장하지 않았고 또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는 알렌이 편지 대신 소식을 전해왔다.
“주인님. 보육원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데미안이 크게 다쳤다고 합니다.”
[보육원으로 가시겠습니까?]
▹간다.
▹가지 않는다.
※‘가지 않는다’를 선택 시 1년 후로 시간을 건너뜁니다.
나는 가지 않는다고 대답하려다가 멈칫했다.
“뭐? 다쳐?”
“팔이 부러졌다고 합니다.”
이때쯤 데미안에게 문제가 생기는 건 원래 있는 시나리오였다.
원래대로라면 데미안이 열감기를 심하게 앓고 있어, 병원을 보내야 한다는 전갈이 와야 했다.
한데 갑자기 팔이 부러졌다니?
“보육원으로 가보시겠습니까?”
[‘데미안’ 루트를 지지하는 성좌들이 보육원으로 가기를 강력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띠링!
[성좌 ‘금쪽같은 내 새끼 데미안’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데미안 보러 가자ㅠ_ㅠ 애기 불쌍해…]
성좌들의 반응이 이해되었다.
나도 마음이 불편하니까.
하지만 성인이 되기 전의 데미안을 만나게 되면 뒤틀린 애착 관계가 형성될 수도 있었다.
즉, 그의 장래 희망이 결혼이 아니라 나의 몰락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성좌들이나 오즈월드에게는 정상적인 루트 따위 알 바가 아니겠지.
띠링!
[던전 퀘스트: 보육원으로 가기]
▸보상: +3,000,000코인
▸실패: 데미안 호감도 대폭 하락
※거부는 실패로 처리됩니다.
이렇게 던전 퀘스트까지 뜨는 걸 보면.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상황을 풀어나가는 수밖에.’
가장 정석적인 루트로 속전속결 던전을 클리어하려 했던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알렌에게 말했다.
“보육원으로 갈 테니 마차를 준비해, 알렌.”
“알겠습니다,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