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일리야가 원로 회의를 하러 떠나자 델리오스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누가 보면 이미 각인한 사이인 줄 알겠습니다. 천계 최고의 잉꼬부부가 탄생한 줄 알겠다고요! 이런데도 왜 각인을 안 하는 겁니까? 이건 기만입니다, 기만!”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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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그 말임]
잉꼬부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일리야 님이 하기 싫다고 하셨잖아요. 왜 제 탓을 하시죠?”
“그럼 당신이 설득해야죠!”
아니, 근데 아쉬운 쪽이 누군데 지금 나한테 윽박지르지?
“쓰읍. 각인이 애들 장난입니까?”
“네?”
“하고 싶다고 아무나 다 하는 거냐는 말입니다. 대답해보세요!”
“그, 그건 아니죠….”
“서로! 평생! 함께할! 반려를 정하는 일인데! 닦달하기만 하면 해결됩니까?!”
델리오스는 내 박력에 밀린 듯 당황한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 그렇지만 테스트 결과가 엄청났잖아요! 천사가 평생 함께할 반려를 찾을 확률이 얼마나 낮은데 이 기회를 걷어차려고요? 심지어 상대가 무려 일리야 님인데?”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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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오스 볼수록 수행 천사가 아니라 일리야 추종자 같은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그런 거에 관심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앞으로 델리오스 님이 얼마나 잘하는지에 따라 제 생각이 바뀔 수 있겠죠.”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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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관이 천사가 될지 악마가 될지는 여러분의 행동에 달려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델리오스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미심쩍은 듯 물었다.
“원하는 거라도 있습니까?”
당연히 있었다.
일리야는 원로 회의에 갔고, 거기서 나올 이야기는 너무 잘 아는 내용이었다.
제작자로서 앞으로 다가올 불행을 대비해야 하지 않겠어?
“목장으로 데려다주세요.”
몰래 페가수스를 타고 클라이드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 * *
일리야는 회의장으로 들어섰다가 잠깐 걸음을 멈췄다.
회의 테이블에는 원로 중 가장 권위 있는 천사인 사무엘만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무엘의 머리카락 색은 빛바랜 듯 탁한 캐러멜 블론드였다.
그는 군사경찰대장인 자카리의 부친이기도 했다.
“오늘도 정확히 같은 시간에 도착했군. 어서 와서 앉게.”
“다른 분들은 어디에 계신 겁니까?”
“내가 나오지 말라고 했네. 오늘 나눌 대화는 굳이 여러 천사가 모일 필요가 없으니.”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의미심장한 자리를 마련한 것일까.
일리야는 알 수 없는 불쾌감에 휩싸인 채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사무엘은 담백하게 서두를 꺼냈다.
“자네에게 천계의 진실을 알려주려고 하네.”
천계의 진실?
“자네는 왜 마계가 천계와 차원의 거리가 가까워지는지, 왜 융합되려고 하는지 아는가?”
“신계에서 독립한 여파 때문에 그런 게 아닙니까?”
“그 말이 맞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네. 사실 그런 식이라면 진작 인간계도 천계와 융합됐어야 하지 않았겠나?”
사무엘의 말대로 천계는 인간계와도 차원의 거리가 상당히 좁혀진 상태였다.
그래서 천계에서 소멸한 영혼이 윤회하여 인간계에서 태어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하나 아예 차원 균열을 통해 침입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천계와 마계가 융합하려는 이유는 그곳이 원래 천계였기 때문일세.”
사고가 정지했다.
사무엘이 어렵게 이야기한 게 아닌데,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계가 원래는 이곳과 같은 천계였다는 말일세. 그래서 본질이 같은 두 계가 손쉽게 융합되려는 거고.”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 차원은 신계에서 독립하는 일에 실패했지. 오랜 시간이 흘러 차원은 완전히 변질됐고 악마라는 종이 탄생하게 된 것일세.”
“…….”
일리야는 문득 테레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 품이 주는 부드럽고 온화한 감각에 중독되어서일까.
지금 너무나 간절하게 그녀의 품이 그리워졌다.
그만큼 일리야는 충격받은 상태였다.
지금까지 견고하게 믿어온 것들이 무너져내렸다. 파괴되었다.
의심, 불신, 실망, 분노, 혐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새까맣게 들끓기 시작했다.
사무엘은 계속해서 고저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제 천계수에서 태어난 천사의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더군.”
그 사실은 일리야도 보고받아 알고 있었다.
“그건 시작에 불과하네. 곧 약한 섬들부터 하나둘 아래로 추락하겠지. 얼음 땅은 범위를 더 넓힐 테고.”
“왜 신계를 벗어나 이 사달을 만드신 겁니까?”
사무엘은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듯이 말했다.
“누구도 지배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네, 일리야.”
일리야는 지금껏 내면 깊숙한 곳에 처박아두고 꺼내 보지 않았던 진심을 사납게 토해냈다.
“신의 종이 스스로 그 위치를 포기한 순간 다 끝났던 겁니다.”
“자네 같은 보수주의자는 그렇게들 말하지. 하지만 말일세, 일리야. 우리는 왜 인간들처럼 독립한 계를 소유할 수 없단 말인가? 우리가 훨씬 우수한데 이상하지 않나?”
“그래서 클라이드의 희생으로 죽어가는 차원에 에너지를 공급하겠다는 겁니까?”
“그래. 우리에게 더 방법이 있나? 그러지 않으면 이 차원도 결국 마계가 되어버릴 걸세.”
“…….”
일리야는 손수건이 들어있는 부근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감정을 배제한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드는 생각은 ‘클라이드를 희생시키는 건 안 된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제가 죽겠습니다.”
“자네만큼 뛰어난 통치자가 없기에 불허하겠네. 클라이드의 희생은 불가피해.”
일리야는 지금껏 원로원에서 제게 꾸준히 요구했던 문제를 거론했다.
“중앙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여성체 천사와 각인 매칭률 테스트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후계자가 될 천사를 낳겠다는 뜻이었다.
일리야는 테레제와의 각인 매칭률을 철저히 함구시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죽을 테고, 아이는 이 역겨운 천계에 이용당해야 한다.
사실 일리야는 그게 크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어쩐지 테레제는 무척 괴로워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는 절대로 각인하지 않을 것이다.
‘클라이드에게 부탁해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게 해야겠군.’
감이 좋은 쌍둥이는 또 어떻게 속여야 할지 벌써 골치가 아팠다.
사무엘은 이만하면 일리야가 엄청나게 양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쯤에서 합의했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걸세.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일리야는 처음으로 천사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 * *
“와, 엄청 빨라!”
나는 페가수스를 타고 섬을 이동하고 있었다.
“비올레타! 저 페가수스 한 마리만 훔쳐 타도 될까요?”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죠?”
비올레타는 안전장치까지 빌려주며 해가 지기 전에 꼭 돌아오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냥 천사들도 이동속도가 빠르긴 하지만 페가수스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페가수스는 섬의 아래에 드넓게 펼쳐진 대륙으로 하강했다.
“어, 저기 마을 보이지? 근처에 냇가가 있으니 거기에 내려줘.”
화려하고 웅장한 섬 위의 건물들에 비하면 다소 초라하지만 아기자기한 집들이 모인 마을이 가까워졌다.
마을의 가장 큰 특징은 단단한 요새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약한 천사들을 보호해주기 위한 클라이드의 작품이기도 했다.
대륙은 통제 불가능한 강력한 야생 마법 동물들이 살고 있었기에 위험했다.
인간계와 달리 이곳의 마법 동물은 같은 늑대라도 크기부터 달랐다. 그야말로 몬스터라 불릴 법한 존재였다.
더불어 차원의 균열도 대륙에서만 발생했다.
그래서 중급 천사 이상은 전부 섬에서 사는 거였다.
그곳은 안전하니까.
나는 페가수스의 등에서 내려 마력을 듬뿍 먹여주었다.
“고생했어. 조금만 있다가 다시 위로 올라가자.”
푸르릉!
‘여기 어디쯤에서 클라이드가 하급 천사들을 신나게 갈구고 있을 텐데. 이상하게 조용하네.’
그때 페가수스가 귀를 쫑긋하더니 날개를 퍼드득거렸다.
푸르릉…!
‘뭔가를 경계하고 있어.’
스스스스.
그 순간, 풀잎이 뭔가에 쓸리는 불길한 소음이 귓가를 스쳤다.
아직 정오임에도 검은 그림자가 빽빽하게 드리워진 숲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리고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바실리스크!”
대천사도 길들일 수 없는 포악한 괴물의 등장에 서둘러 마력을 끌어올렸다.
‘과연 내가 바실리스크를 상대할 수 있을까?’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바실리스크가 내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천천히 움직이며 다가오지 않았다.
…혹시 바실리스크도 내게 호의를 느끼는 건가?
선뜻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내 등 뒤의 마을의 요새로는 도저히 바실리스트를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접근했다.
바실리스크는 눈만 깜빡거리며 날 쳐다볼 뿐, 공격하려는 전조는 없었다.
마침내 지척에 다다르자 손을 뻗어 차가운 비늘을 짚었다.
매끄럽고 단단한 촉감과 대비되는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바실리스크는 내 존재를 반가워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굴이 무너져서 화가 났었구나.”
대륙에는 바실리스크 외에도 엄청난 포식자들이 즐비했다.
그중에는 마기에 오염된 동물들도 있어 날이 흐를수록 영역 싸움이 심해진다고 토로했다.
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실리스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하급 천사로군.”
“!”
뒤를 돌아보자 긴 은빛 장발을 늘어뜨린 클라이드가 고고하게 서 있었다.
띠링!
[성좌 ‘얼굴감별사’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미친]
“안녕하세요, 클라이드 님.”
“나를 본 적 있나?”
“아니요. 하지만 유명하셔서 잘 알죠. 천계의 유일한 쌍둥이 형제 중 한 분이시기도 하고요.”
클라이드는 픽 웃더니 바실리스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녀석이 네 말은 듣는 거 같은데, 마을을 공격하지 말라고 좀 전해주지 않겠어? 저기에 허약해 빠진 녀석들이 모여 살아서 말이야.”
“물론이죠.”
나는 바실리스크에게 마력을 먹여주며 살살 달랬다.
“분풀이로 남의 집을 부수면 안 돼. 알겠지?”
바실리스크는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클라이드가 곧장 단검으로 내 목을 겨눴다.
칼끝에 얇은 금줄이 걸려 금속이 쓸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왜 이러세요?”
“섬에서 여기까지 온 목적이 뭐지? 중앙 본부의 개.”
하여간 전생이든 현생이든 더럽게 싸가지 없는 XX.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