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그사이 나는 문득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주세페, 너 키 컸니?”
“……갑자기 뭐야? 말 돌리지 마.”
주세페는 내 말에 얼굴이 빨개져서 괜히 신경질을 냈다.
그는 어느새 자라 내 턱 언저리까지 키가 커져 있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나?
“곧 나랑 비슷해지겠어.”
내가 키를 재보려 손을 뻗자 주세페는 뾰로통한 얼굴로 다가왔다.
“네가 집구석에 안 들어오니 알 턱이 있나. 키는 달마다 계속 컸어. 다리가 쑤신다고.”
이는 제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뜻이 틀림없었다.
나는 미안함을 담아 주세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주세페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는 내 드레스를 만지작거리며 응석 부렸다.
“진짜 짜증 나……. 이렇게 입지 마, 누나.”
“왜? 이상해서 그래?”
“쓸데없이 예쁘게 꾸미지 말라는 뜻이잖아. 지금 집에 외간 남자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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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쪽이 어디서 그런 말 배워왔어? 더 해봐]
나는 주세페의 말랑말랑한 볼을 쭉 늘리며 놀리듯 물었다.
“이제 누나라고 불러주는 거야?”
“아, 장난치지 말고! 너 지금 그 후작 때문에 이러는 거지? 그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아니.”
내 대답에 엘로이즈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반응했다.
“네에? 그렇게 잘생겼는데 어째서요?! 그럼 연애라도 해주세요. 그런 얼굴을 가만히 둔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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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남자주인공들 다 한 번씩 찍먹하게 해 준다면서 ㅠㅠ!! 오즈월드도 맛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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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월드가 남자주인공으로 들어오고 방송 개떡상함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성좌의 말에 순위를 확인해보려고 방송 설정 창을 열어보았다.
▼
[방송 설정]
채널명: BJ악역영애
채널 등급: 다이아
채널 순위: 9위
후원금: 298,777,000코인
▲
클라이드가 사라지고 나는 엉망이 되었는데 성좌들은 이에 열광하고 있었다.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정말 내 기분이나 상태 같은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구나.’
성좌들은 내게 응원을 보내주고 위로도 해주며 친구처럼 대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선 위치가 달랐다.
그들은 내 삶을 관람하는 시청자였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위해 다채로운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줘야만, 응원과 위로와 우정을 받을 수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
기대에 어긋나는 순간 쉽게 끊어질, 일방적인 관계라는 뜻이었다.
‘콘텐츠라는 게 원래 그런 거지.’
이 세계가 내게는 현실이지만 그들에게는 오락거리였다.
오즈월드가 내게 장난감이라 했던 말이 정확했다.
하하. 절로 자조적인 웃음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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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프로그램에서 오즈월드처럼 중간에 들어오는 사람을 메기라고 하는데 ㄹㅇ 강력한 메기 들어온 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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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월드……. 천박한 광대 같은 차림새였을 때와 달리 지금은 품위가 있더군요. 정성이 갸륵하니 기회를 줘보도록 하죠.]
글쎄. 나한테 오즈월드는 남자주인공이 아니라 처치해야 할 악역이었다.
게다가 마침 나와 뜻이 같은 존재가 접선해온 상황.
‘그 사람이 내게서 발견했다는 가능성이라는 게 대체 뭘까?’
오즈월드가 직접 방송에 개입한 것과 관련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즈월드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머리통이 어떻게 되어버린 게 아닌 이상 본인이 증오받고 있다는 걸 알 텐데, 왜 굳이 남자주인공으로 이 세계에 등장했을까?
‘무슨 생각이야, 오즈월드.’
내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나머지 세 사람은 설전을 벌였다.
주세페는 가뜩이나 매서운 눈초리를 더욱 치뜨며 말했다.
“딱 봐도 성격 더럽게 생겼던데, 테레제도 성격이 나빠서 절대 안 돼. 얘는 말 잘 듣고 착하고 생각 없는 남자를 만나야 잘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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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풀이 하는 줄 알았네;]
리비는 뭔가를 곰곰이 떠올리는 표정으로 느릿하게 호응했다.
“확실히 무척 근사한 분이셨어. 모두가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얼굴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너무 귀족적이라서 난 무서웠어.”
엘로이즈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원래 로맨스에서는 그렇게 콧대 높고 오만해 보이는 미남이 주인공이에요. 척 봐도 가진 거 많아 보이고! 재수 없고!”
“그러니까, 그래서 성질머리 더러운 테레제랑은 안 된다니까?”
오즈월드를 두고 다들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하녀장인 미란다가 나타났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발렌시아 후작님과 정식으로 인사해야 하니 준비가 끝났으면 1층 응접실로 내려오라 하십니다.”
미혼의 공녀에 불과한 나는 대귀족인 오즈월드 발렌시아 후작에게 깍듯한 예를 차려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그를 찾아가 인사할 수는 없었다.
라울이 소개시켜주지 않는 이상 내가 그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는 게 이곳의 법도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런 번거로운 일을 거쳐야 했다.
나는 담담한 척하는 표정으로 질색하는 속내를 감추었다.
“알았어. 지금 내려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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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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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테레제가 오즈월드 좀 싫어했던 거 같은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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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랑은 혐관에서 시작하니까 ㄱㅊ]
그러고 보니 내가 오즈월드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성좌들은 잘 모르겠구나.
‘우리가 마주칠 때는 보통 광고가 틀어져 있었으니까. 판테온에서는 아예 방송이 꺼져 있었고.’
그래서 다행이었다.
‘지금부터는 조심해야겠어.’
오즈월드에게는 팬이 많다.
빙의 초기 때, 그와 인터뷰한 날이 떠올랐다.
오즈월드를 언급하는 후원 코멘트를 블라인드 처리하지 않고 전부 띄웠을 때 보았던 압도적인 광경은 여전히 소름 끼쳤다.
그리고 판테온에서도 그의 인기를 실감할 일이 종종 있었다.
시작부터 완벽하리만큼 깔끔하게 밸런스가 붕괴된 관계였다.
나는 불만 가득한 주세페를 달래고, 리비의 걱정과 엘로이즈의 열띤 응원을 받으며 슈퍼 갑에게로 향했다.
1층 응접실이 있는 위치로 가는 중간, 라울과 동선이 겹쳐 자연스레 합류했다.
라울은 내 모습을 확인하더니 자부심과 더불어 약간의 씁쓸함을 느끼는 표정으로 말했다.
“날이 갈수록 예뻐지는구나.”
이런 종류의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라서 당황하고 있을 때, 라울이 내게 팔을 내밀었다.
“발렌시아 후작이 널 보자마자 청혼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다. 아비는 아직 널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저는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예요.”
라울은 내 말을 믿지 않는 표정으로 “글쎄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기는 어렵지 않겠느냐.”
뭐가 어렵다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라울이 피식 웃었다.
“넌 모르고 있는 게 낫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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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테온이 허락한 유일한 마약, 테레제]
어느새 우리는 응접실에 도착했다.
달칵.
어제까지만 해도 하늘에 구멍이 뚫려버린 것처럼 비가 쏟아졌었다.
한데 오늘은 날이 참 맑았다.
투명한 햇살이 응접실 전면 유리를 넘어 들이비치고, 활짝 열어둔 테라스 문을 타고 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다.
이토록 좋은 날, 내 앞에 오즈월드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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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잘생길 필요 있냐고 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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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 ‘얼굴감별사’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와우 이렇게 꾸미니까 클라이드랑 박빙인데? 오즈월드에 미친 성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알겠다 ㅋㅋ]
성좌들은 오즈월드의 등장에 열광했다.
이상할 정도로 그에게 부정적인 여론이 없었다.
‘설마 일부러 다 거르는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사실 내 사견을 빼놓고 보자면 오즈월드의 외모는 누구든 좋아할 만했다.
특히 오늘의 오즈월드는 염색된 부분 없이 깨끗한 금발을 넘겨 화려한 이목구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어, 절로 감탄이 나오게 했다.
더위를 느끼지 않는 듯 목을 조인 크라바트는 오만하고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겼고, 몸에 딱 달라붙게끔 재단된 검은 슈트는 위압감마저 들게 했다.
리비가 왜 그를 보고 무섭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라울은 누구보다도 대귀족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모습의 오즈월드에게 나를 소개했다.
“후작이 구해주었던 내 딸아이라오. 테레제, 오즈월드 발렌시아 후작님이시다. 인사드려라.”
나는 전날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듯, 위험을 모르는 초식 동물처럼 그의 앞으로 사뿐사뿐 다가섰다.
오즈월드는 내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묘하게 기꺼워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미미하게 올라간 입꼬리만으로도 저토록 무례해 보일 수 있구나. 새삼 놀라울 따름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발렌시아 후작님. 스콰이어 가문의 장녀, 테레제입니다.”
내가 치맛자락을 잡고 예를 갖추자 오즈월드가 피식 비웃었다.
“……!”
그때 무슨 짓을 했는지 내 손이 저절로 그의 앞을 향했다.
오즈월드는 태연자약하게 손등에 키스했다.
“오즈월드 발렌시아입니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