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미모사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데미안은 예전 같지 않고, 아버지는 이제 슬슬 약혼해야 하지 않냐고 그래. 곧 졸업이잖아.”
“그렇지. 여름 무도회가 끝나면 2학기가 시작되니까.”
“황실 마법사가 될 게 아니라면 빨리 약혼부터 하래. 하지만 난 둘 다 하기 싫단 말이야.”
“그러면 어떤 걸 하고 싶은데?”
“……몰라. 난 딱히 잘하는 것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는걸. 넌 좋겠다. 잘하는 것도 많고 좋아하는 것도 분명해서.”
으음. 어쩌다 이런 대화를 하게 된 거지.
나는 난감하게 볼을 긁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아는 미모사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거든.”
미모사가 멍하니 댄스 플로어를 응시하던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학교 축제에서 네 클럽이 연주한 곡, 네가 작곡한 거잖아.”
“그거야 어릴 때부터 배운 거니까 그냥 하는 거지.”
“데미사 엠블럼도 네가 직접 디자인한 거고.”
“내가 가진 장신구만 몇 개인지 알아? 맨날 보는 게 그런 건데, 그 정도는 그냥 만들지.”
“그리고 너는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해서 학교에서 두 번째로 회원이 많은 클럽도 만들었잖아.”
“너 지금 테랑둥이 클럽이 회원 수가 제일 많다고 자랑하는 거지?”
미모사는 괜히 툭툭거리면서도 내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런 미모사가 귀여워서 절로 웃음이 번졌다.
“너 재주 많아. 그리고 특별해.”
나름대로 비중 있는 악역이니까 특별하다는 내 말은 틀리지 않았다.
미모사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볼을 부풀렸다.
“……너 나한테 뭐 바라는 거 있니? 그래서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거지?”
“오, 내 말이 듣기 좋았나 보네?”
내가 놀리자 미모사의 얼굴이 곧 뻥 하고 터질 것처럼 새빨개졌다.
“이익…! 아니거든?! 하여튼 꼭 이렇게 초를 친다니까!”
미모사는 기분 좋아졌다는 사실을 들켜 창피한지, 버럭 성질부리다가 이내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흥. 너 오늘 세실리아나 조심해.”
“세실리아?”
“연회장에 들어오기 전에 우연히 카펜터 공작가 사람들을 봤어. 세실리아 걔 엄청 소리 지르더니, 혼자 어디로 가버리더라니까? 눈빛이나 표정이 미친 사람 같았어.”
미모사는 불길한 것을 떠올려 찝찝하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하여간 진짜 이상해 보였으니까 조심해. 너 걔랑 원한 있잖아.”
황족의 피가 흐르는 미모사가 이상함을 느낀 거라면 뭔가 있다는 뜻이다.
“세실리아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
“나야 모르지. 집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면 황궁을 돌아다니고 있지 않을까?”
그 말에 조금 난감해졌다.
‘황실에 있는 낙원의 문을 열어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이래서야 혼자 다니기 껄끄러운걸.’
“충고 고마워. 네 말대로 조심할게.”
“흥. 널 위해 알려준 거라고 착각하지 마. 세실리아가 싫어서 알려준 거니까.”
띠링!
[성좌 ‘티 없이 맑은 아이’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미모사 보면 볼수록 공격력 약한 치와와 같아]
미모사는 내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사실이 쑥스러웠는지, 갑자기 바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떠나버렸다.
때마침 두 번째 춤곡이 끝났다.
‘자카리랑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내가 창조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지, 혹시 일리야 행방을 아는지, 클라이드에 대한 단서가 있는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러나 날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오는 유지스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쏠린 가운데, 나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시자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유지스는 허리 숙인 나를 직접 일으켜주며 팔짱을 끼라는 뜻으로 본인 팔을 내밀었다.
대화가 길어질 것을 암시하는 행동에 벌써 한숨이 나올 듯했다.
나는 그의 팔을 감싸 쥐고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따끔했다.
“벌써 비전 마법을 익혔다고 들었다. 황실 마법사들이 어떤 마법인지 몹시 궁금해하더군.”
“모두 폐하의 은혜 덕분입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여기나?”
유지스는 빈 술잔을 치우고 가득 찬 술잔으로 바꿔 들다가 날 쳐다보았다.
“아, 이런. 불과 얼마 전 짐을 그리 호되게 꾸짖었는데, 또 술을 마시게 되었군. 충고를 무시해서 미안하게 됐어, 공녀.”
그리고는 입안에 술을 툭 털어 넣었다.
“…그때 분명 뒤탈은 없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폐하.”
“그랬지. 그래서 짐이 지금 공녀에게 벌을 주었나? 오히려 상을 준 것 같은데.”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미소만 지었다.
‘상 같은 소리 하네.’
당신 때문에 황제의 여자로 소문이 파다하게 났는데, 이딴 게 상이냐?
“공녀가 짐의 은혜로 덕을 봤다면 작은 부탁 정도는 흔쾌히 들어줄 수 있겠지?”
“저처럼 하찮은 귀족 영애가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청을 들어드릴 능력이 있을까요……?”
“들어주기 싫다는 소리를 길게도 하는군.”
“그럴 리가요. 뭐든 말씀하세요.”
쓸데없이 눈치만 더럽게 빠르네.
유지스는 나를 댄스 플로어로 이끌며 무심하게 말을 내뱉었다.
“일단 춤부터 추지.”
마침 세 번째 춤곡이 연주되기 전이었다.
나는 이미 파트너와 첫 춤을 춘 상태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도 춤을 출 수 있었다. 그래서 문제 될 건 없었다.
황제의 첫 춤 상대가 나라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폐하, 오늘의 첫 춤이신 걸로 압니다. 그런데 샤티 부인이 아니라 저와 추시겠다고요?”
당신 붉은 하트 3개 채워야 댄스 파트너가 되는 설정이라고!
유지스의 호감도 상태는 여전히 검은 하트 2개였다.
유지스는 댄스 플로어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시큰둥하게 나와 춤춰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다들 짐이 공녀에게 미쳐서 비전 마법서를 돌려줬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교계에서는 이미 우리를 연인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그것도 아니면 황제가 일방적으로 나를 짝사랑 중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부 엘로이즈가 알려준 사실이다.
유지스는 그 점을 지적했다.
“한 가문의 비전 마법을 되찾아주는 일은 생각보다 엄청난 여파가 미치는 일이다. 공녀도 그 사실을 알기에 짐을 만류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그러니 짐이 공녀에게 눈이 돌아서 간이고 쓸개고 다 주려는 머저리가 되는 쪽이 말이 되겠지. 그런 상황에서 짐이 공녀와 춤을 추지 않으면 꽤 이상할 것 같지 않나?”
“이상하겠죠…?”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군.”
설명이 끝났을 때는 댄스 플로어의 한가운데였다.
황제가 첫 춤을 추기에 모든 커플이 비켜난 상황이었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 유지스가 내게 속삭였다.
“아까 보니 춤을 잘 추던데. 이번에도 기대하지.”
“아하하…….”
영혼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자세를 잡고서 연주에 맞춰 발을 옮겼다.
오즈월드처럼 내 속을 긁는 소리만 내뱉을 줄 알았던 유지스는 뜻밖에도 조용히 춤추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딱 한 마디만 내뱉었다.
“잘 추네.”
그의 입에서 진심 어린 칭찬이 나왔다.
안목이 높은 황제가 보아도 [댄싱 머신]은 대단한 모양이었다.
춤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다들 이리도 좋아하니 한 번 더 춤춰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고개 저었다.
“아니요. 발이 아파서 그런데 잠깐만 저쪽으로 가서 쉬는 게 어떨까요, 폐하.”
내가 가리킨 으슥한 장소를 확인한 유지스가 눈썹을 휙 치올렸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네.”
유지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아까부터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두통이 온 게 분명했다.
“어서 가요.”
유지스는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순순히 내 손에 이끌려왔다.
나는 연회장 구석으로 가는 도중 물잔 하나를 챙겼다.
다행스럽게도 귀족들은 우리를 연인으로 오해하고 있는 탓에 이리로 접근하지 않았다.
오히려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눈을 찡긋대며 자리를 비켜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이목을 끌지 않고 테라스 근처의 화병에, 물잔에 든 물을 부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빈 잔에는 포션을 채웠다.
“이거 드세요. 저번이랑 같은 포션이에요.”
황제의 건강 상태가 나빠 보이는 것은 큰 약점이 된다.
그걸 떠나서 유지스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물을 마시는 척할 수 있도록 일부러 물잔을 챙겨온 거였다.
“의심되시면 제가 한 모금 마시고 드릴까요?”
여기까지 온 이유를 깨달은 유지스가 잠깐 말이 없더니 아까와는 다른 느낌의 헛웃음을 흘렸다.
“됐으니 이리 내.”
그는 “뭘 기대한 건지.”하고 중얼거리더니 독주를 원샷하는 사람처럼 포션을 들이켰다.
유지스가 미간을 와락 찡그렸다.
“끔찍하게 달군.”
“…약이 달면 좋은 거지….”
“뭐라고 중얼거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단맛을 중화할 만한 간식을 챙겨 올 테니까요.”
제일 쓰고 떫은 걸로 챙겨와야지.
내 불순한 계획을 알아차린 건지 유지스가 됐다며 거절했다.
“짐이 다섯 살짜리 아이인 줄 아나? 쓸데없는 짓 말고 여기 있어.”
시종을 불러서 시키려나 했더니 유지스는 놀랍게도 스스로 간식을 챙기러 갔다.
나만큼이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궁인들도 이쪽을 지켜보다가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떡 벌렸다.
따각따각!
그때 딱딱한 게 대리석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귀를 잡아챘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시선을 내리니 나무 인형이 보였다.
이건 필시 스티그마타의 마음 인형이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어느새 다가온 세실리아를 발견했다.
“여기서 뵙네요, 선배님.”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