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 돈미새-72화 (72/225)

뜻 밖의 기회

오래간만에 아주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다.

플리츠 롱 원피스를 입은 아린이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조용한 분위기 속에 둘이 눈이 맞았고.

우리 둘은 서로의 얼굴을 서서히 맞대고 있었다.

쿵. 쾅. 쿵. 쾅.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와 함께 아린이가 먼저 눈을 감았다.

이어 나도 눈을 감고 입술을 맞대려는데···

잠에서 깨버렸다.

아. 아! 이 중요한 타이밍에···

내 첫 경험의 순간이었는데!

주전자 끓듯, 분노가 치솟았다.

누구야. 이런 개 시벌새끼. 죽일 테다.

하··· 역시나 이 자식. 도움이 안 된다.

-야! 야! 너 괜찮냐? 살아있어?

어제 방송 때문인 것 같았다.

“······왜 이래?”

“너 어제 게스트가 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죽을뻔했다며!”

“그, 그렇긴 한데···”

“뭔데? 뭔데? 말해줘 봐!”

상상도 하기 싫은 어제 기억이지만, 나는 술술 그 내용을 전달했다.

공포를 공유하면 그나마 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얘기를 듣던 박필준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뭐? 십탱? 그거 영혼의 결혼식이라도 하려고 했던 거 아냐?”

“영혼의 결혼식?”

“어. TV에서 본 적 있는데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결혼하는 거지.”

듣기만 해도 끔찍하다.

으··· 날 더듬던 얼음장 같은 손길은 떠올리기만 해도···

박필준이 뜬금없이 물었다.

“야. 근데··· 혹시 그 여자 예뻤냐?”

나는 작은 한숨을 한번 내뱉고는 대답했다.

“소개해 줄 테니까 한 번 만나 볼래?”

박필준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통화가 끝난 후.

나는 기분전환을 위해 문자를 살폈다.

[ 아린아 뭐해♥ ]

분명, 어제 보낸 문자인데.

역시나 바쁜 임아린은 아침에도 나에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

아침에도 필라테스로 바쁜 걸까.

그렇게 점심이 돼서야 답변이 왔다.

< 아. 맞다 사장님 죄송해요. 어제 후원창은 제 친구가 장난친 거예요 >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핸드폰 화면을 연신 들여다봤다.

장난이라고?

그··· 하트가?

그럼 우리 사이는···

문자를 보고 난 후 한참 동안 답장을 할 수 없었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내 심장이 굳은 것만 같았다.

30분 후.

나는 창피함과 우울함이 겹친 마음을 끝내 삼키며 고심 끝에 답장을 보냈다.

[ 나도 장난이었어 ]

씁쓸한 마음을 혼자 또 삼켰다.

이제 곧 성인인데.

나는 도대체 언제쯤 사랑이라는 걸 할 수 있을까?

물론, 귀신이랑 말고 말이다.

“아들? 아들 점심 먹어. 얼른 나와.”

아주 구수하고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찌르며 내 정신을 깨운다.

내가 아주 잘 아는 맛있는 냄새였다.

실연당한 듯, 슬펐던 얼굴에 그나마 미소가 번졌다.

“오늘은 우리 엄마표 명품 청국장이네?”

힘 없이 일어나 밥상 앞에 앉자 맛있는 반찬들이 눈에 쏙쏙 박힌다.

멸치볶음, 계란 프라이, 잡곡밥, 배추김치까지.

그래.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

건강이나 챙기고 돈이나 벌자.

사실, 요즘 하도 귀신을 많이 만난 터라 기가 많이 허해졌다.

나는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 붙이고 소리쳤다.

“자알 먹겠습니다!”

우걱우걱. 쩝쩝.

떨어진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니. 두 번째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식사에 집중했다.

순식간에 두 공기의 밥을 해치웠고, 소화도 시킬 겸 설거지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어제 상황이 또 떠올랐다.

이제는 팥, 소금, 햅쌀 같은 건 전혀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고···

앞으로의 방송을 위해서는 내 몸을 좀 더 보호할 방법이 없을까?

설거지하는 내내 끙끙 앓며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돌려 엄마에게 얘기했다.

“엄마.”

“응?”

“나 좀 나갔다 올게.”

나는 시장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장 어느 상점을 들렀다.

귀신을 퇴치할 수 없는 능력이 없으니 장비 빨 이라도 세울 계획이었다.

“정이루! 아니.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간 가게 안에는 수많은 기독교 및 불교용품이 깔려있었다.

십자가를 기본 바탕으로 한 책, 액자, 캘린더, 시계 등등.

보기만 해도 자신감이 팍팍 차는 느낌이다.

“어떻게 오셨나요?”

인자한 미소를 가진 아주머니 한 분이 나를 맞이해주셨다.

나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크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주머니. 혹시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귀신 퇴치용 물건 있을까요?”

“귀신 퇴치요?”

아주머니는 잠시 멈칫거리는가 싶더니 곧장 나를 한 쪽으로 안내했다.

“네. 여기 모든 게 있습니다. 골라보세요.”

“우와···”

내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곳엔 집안 인테리어 용품을 비롯한 액세사리들이 가득했다.

시계, 액자, 캘린더, 핸드폰 케이스부터 시작해서, 악취 방지용 마스크, 목걸이까지.

심지어 옷과 장 칼도 여러 가지 종류로 걸려 있었다.

나는 일단 내 몸에 지닐 수 있는 액세사리를 살폈다.

디자인부터 길이, 가격까지 천차만별인 제품들.

나는 매의 눈으로 신중하게 살펴보다 하나를 집었다.

바로 목걸이.

주인아주머니는 내가 목걸이를 집자마자 방긋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티벳‘옴’자 목걸이라는 건데요. '옴'은 가장 최초의 신성한 소리이며,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모든 만트라, 즉 진언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으로... ”

나는 두 눈만 껌뻑거리며 아주머니를 쳐다봤다.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다.

주인아주머니는 1분간을 랩하듯 열심히 퍼부어대더니 말을 잠시 끊었다.

그리고 씩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심신 강화 및 두려움 극복에 힘이 되는 목걸이랍니다.”

“아···”

그제야 알아들은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물개 박수를 쳤다.

“와. 시벌. 아 죄송합니다. 딱 제가 찾고 있는 목걸이네요. 잠시만, 껴봐도 되나요?”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걸이는 내 목에 아주 딱 맞았다.

길이도, 디자인도, 마치 나만을 위한 것처럼.

“얼마인가요?”

33,000원입니다.”

“컥.”

시벌. 이 작은 게 뭐가 이리 비싼 거야?

귀신 퇴치용품이라 그런 건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 아주머니 눈치를 보며 일단 살짝 내려놓았다.

급하게 사긴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좀 더 보고···

문득 눈에 띄는 다른 액세사리를 발견했다.

바로 반지.

은색깔로 된 반지에는 알 수 없는 특수한 문자들이 쓰여있었다.

내가 이리저리 한참을 살펴보자 또다시 주인아주머니께서 거들었다.

“그건 수공예 방식으로 룬 문자를 새긴 은제품인데요. 수호 반지예요.”

“수호 반지··· 룬 문자요?”

“네. 초기 게르만족의 한 종족인 마르코 마니족이 1세기 경부터 쓰던 특수한 문자에요. 그리스 문자의 흐름을 받은 유럽 북부 지방의 문자를 변형시킨 것이 룬 문자라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또한 북유렵 신화의 신인 오딘에 의해...”

이 아줌마 뭐야?

네선생도 아니고, 반사적으로 설명이 술술 나오네.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마찬가지로 나는 그저 이해하는 척 고개만 끄덕였다.

“반지에 새겨진 뜻을 설명하자면, 날카로운 통찰력을 주어 곤란한 일을 미리 알아차려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거나, 자신을 저주하는 힘과 외부에서 덮쳐오는 사악한 힘이 자신을 덮칠

때 주인을 지키는 역할도 한다고 합니다.”

마지막 설명을 듣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나는 다시 한번 물개 박수를 쳐댔다.

“와우··· 저한테 완전 딱인 반지네요. 혹시 이건 가격이?”

“35,000원입니다.”

뭐야 시벌. 죄다 가격이 이 모양이야?

35,000원 정도면 흉가에서 영상편지를 하거나, 귀신들린 마네킹이랑 악수 또는 포옹까지 해야 되는 금액이다.

하··· 고민되네.

자동적으로 손이 떨려대는 금액에 나는 잠시 반지도 내려두었다.

하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른 염주와 비법들을 살펴보던 중에.

“목걸이랑 반지 두 개 세트로 사시면 할인도 해드려요. 저희가 10주년을 맞아...”

아줌마의 환상적인 입 장사에 못 이겨.

나는 결국 대답했다.

“살게요.”

그렇게 티벳옴자목걸이, 은 수호 반지, 그리고 잡다한 오방 잡귀 소멸 비법, 냄새제거용 약쑥, 돈벼락 비법. 마지막으로 인기, 인연을 얻는 비법까지.

백화점을 나오자 내 한 손에는 용품들이 한가득 쥐여져 있었다.

돈은 생각보다 많이 썼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사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이 돈을 벌기 위해 나는 그 고생을 했고, 앞으로도 더한 고생을 위한 충분한 준비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 용품들을 사고 나니 마음 한편도 정말 든든해졌다.

물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갈증을 채워주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두 손 한가득인 용품을 들고 집에 가는데.

왠지 모르게 드문드문 사람들이 날 신기하게 힐끗 쳐다본다.

좀 많이 사긴 했지?

내 또래 비슷하게 보이는 여자 둘이서 웃으며 다가왔다.

“혹시··· 정연우 씨 아니세요?”

화들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누구지?

전혀 모르는 얼굴인데.

“네. 근데 누구···”

대답과 동시에.

여자 둘이 손뼉을 쳐대며 꺅꺅댄다.

“꺅! 저희 구독자예요! 엄청 재밌게 보고 있어요!”

“와! 저희 동네 사셨구나! 실물이 훨씬 잘생겼어요!”

“하하···”

갑작스러운 환영에 얼떨떨했다,

시벌 뭐야 이거?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입가에는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그 사이 여자 둘은 내게 더 가까이 붙어 핸드폰을 내밀었다.

“죄송한데, 사진 한 장 같이 찍을 수 있을까요?”

“사진이요?”

나는 옆에서 벙찐 얼굴로 굳어 서있었다.

그러자 두 명의 여자가 양쪽으로 나에게 찰싹 붙어 포즈를 취했다.

어. 어··· 이거 밀착이 너무 심한···

하지만. 내 두 입가는 이미 귀까지 올라가 핸드폰에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하나, 둘, 김치이이!”

“꺅!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 이후로도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이 날 보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정연우야? 우리 동네 살았네.”

“대박! 그 돈미새?

나는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일부러 느끼며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30분이 걸릴 거리를 한 시간.

아니. 두 시간에 걸쳐 빙빙 돌아왔다.

“아들 왔니? 아이고. 뭘 그렇게 많이 샀대?”

“어. 엄마. 그냥 이것저것.”

나는 봉지를 내려놓자마자 낡은 액자부터 갈았다.

집을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액자.

[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

음. 갈고 나니 마음이 굉장히 든든하다.

우리 엄마가 교회 장로님이니까. 이 정도는 훗.

물론 끝이 아니었다.

내 장비를 사는 김에 엄마를 위한 팔찌도 하나 샀다.

큰 구슬 앞면과 뒷면에 "옴"자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 수술이 체인 형태로 4개가 달려있어서 손목에 착용하면 찰랑찰랑하게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팔찌였다.

“엄마. 손 좀 이리 줘 봐.”

“이게 행운, 건강, 소원성취를 해주는 팔찌래. 엄마 생각이 나서 시장에서 하나 샀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순 은에 109,000원이라는 거금을 들였다.

엄마의 걱정을 덜기 위해 거짓말을 좀 섞었다.

엄마는 팔목에 딱 맞는 예쁜 팔찌를 보며 이리저리 둘러 구경해댔다.

그러다 활짝 웃으며 내게 얘기했다.

“잘 차고 다닐게. 고마워 아들.”

엄마는 갑자기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엄마 어디 가?”

엄마는 내게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엄마, 동네 사람이랑 약속 있어서, 우리 아들이 선물해 준 거 자랑하러 가야지.”

그렇게 엄마가 집을 나간 지 10분쯤 지났을까.

누군가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계세요?”

집에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내가 조심스럽게 나간 대문 밖에는 한 낯선 남자가 멀뚱히 서있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자마자 씩 웃더니 다가왔다.

그리고 명함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내게 건넸다.

얼떨결에 그 명함을 받았고, 명함을 확인했는데···

순간, 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