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보살님의 추천 장소. 12
나는 세상이 떠나갈 듯 큰 한숨을 내쉬었다.
“하···”
곧장 자연스럽게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는데.
나는 약과에 불과했다.
남자는 거품 물기 직전이었다.
새처럼 얇은 다리가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지, 진짜 올라가는 건가요?”
남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선택권은 없었다.
그저 귀신이 되지 않으려면 말없이 따를 뿐.
“귀신의 장난감이 되고 싶지 않으면 가야죠···”
- 연우 표정 무엇
- 혹한기 훈련할 때 딱 저 표정인데
- 옆에 남자는 이미 지옥문에 다다른 것 같다.
- ㅋㅋ 내가 봐도 토 나온다야
- 가다 실신하는 거 아니지?
- 미리 119에 신고 좀 해주랴?
- 거기 말고 저승에 미리 예약해 놔야 할 듯.
- ㅅㅂ 저 계단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 만든 사람도 뒤지게 힘들었겠지?
- 저거 만들고 귀신 되지 않았을까
이제 막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선녀보살님은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해맑은 목소리로 우리를 보며 말했다.
“새벽 공기가 정말 좋네요.”
“······”
시벌···
우린 이 계단을 지금 세 번째 밟고 있다고요···
정말이지. 학교 운동장을 30바퀴 도는 게 더 나을 지경이었다.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 게 신기한 상황.
우리가 어지간히 힘들어 보였는지, 선녀보살님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우리에게 건넸다.
“힘드시죠? 그거 한 모금씩 드세요.”
땀을 어찌나 흘렸던지, 탈수 증상까지 온 나였다.
그 통을 냉큼 건네받아 쳐다도 보지 않고 벌컥벌컥 마셔댔다.
그런데··· 새콤. 아니. 시큼한 신맛이 내 정신을 번쩍 깨웠다.
“웁! 웩! 왜 이렇게셔! 선녀보살님. 이거 물이 상한 것 같은데···”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그제야 통을 바라봤다.
새빨간 것도 모자라 자잘한 알맹이가 통 바닥 안에 잔뜩 깔려있다.
마치 피와 흡사한 색깔인 그것을 보며 나는 기겁하듯 중얼거렸다.
“으익! 이거 뭐예요? 설마···”
동네 어르신들이 몸에 좋다며 비슷한 것을 마시는 것도 여럿 보았는데.
설마 이거 동물 피 같은 건 아니겠지?
옆에 있던 남자도 갈증이 심했는지, 입으로 가져가다 멈칫거렸다.
선녀보살님은 우릴 보며 해맑게 웃었다.
“맞아요. 소 피요.”
순간, 내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비위가 좋지 않아 시장에서 생선을 손질하는 것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나인데···
뒤늦게 나는 잽싸게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넣어 셀프 구역질을 해댔다.
“우우웨엑! 우웩!”
- 레알 소 피라고?
- 시벌. 생 간을 먹는 것 봤어도 생 피를 마시는 건 첨인데
- ㅋㅋ 미친. 설마 피를 줬겠냐
- 잘못 먹으면 큰일 난다고 그런 건
- 뭐 홍차나 약초나 뭐 그런 거겠지.
- 연우가 참 순진해
- ㅅㅂ 연우가 순진하다고? 후원 뜯어내는 거 보고도 그런 소릴 하냐
- 그것만은 좀 아이러니 하긴 한데···
- 진짜 피여야 레전드다
“하하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이런 상황에 나를 놀리다니···
이렇게까지 내 앞에서 호탕하게 웃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오늘 기분 좋은 일이 있으신가?
“히비스커스 차라는 거예요. 열대지방에서 주로 재배되는 무궁화 속에 속한 식물이죠.”
나는 처음 듣는 차 이름에 천천히 계단을 밟으며 물었다.
“······이, 이 차가 어디에 좋은 건데요?”
“특유의 붉은색을 가진 차로 피부미용이나 혈관 건강, 면역력 강화, 피로 회복에 좋다고 알려져 있어요.”
“아··· 좋은 거구나.”
선녀보살님의 설명을 들은 남자가 벌컥벌컥 물을 마셔댔다.
뒤늦게 조금이라도 먹어볼까 차례를 기다렸지만.
갈증이 심했던 걸까.
남자는 한 모금도 안 남기고 그 물을 다 마셔버렸다.
“어··· 음···”
나는 결국 입맛만 다시며 계단을 마저 올라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계단을 밟았다.
대장정 40분이라는 시간을 오르고 나서야 대웅전 앞에 도착했다.
“후우··· 후우···”
한 체력 하는 나의 몸도 오늘만큼은 많이 벅찼던 것 같다.
아니. 다시 마주한 대웅전의 서늘한 기운 때문인 건가.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한다.
내 옆에 남자도 서서히 몸에 반응이 오는지, 내 옷깃을 꼭 붙잡고 있었다.
- 와. 결국 이 계단을 다 올라왔네
- 진짜 미쳤다.
- 보고 있는 우리도 지친다.
- 내 여자는 체력도 좋네? 아힛 사랑스러.
- 이 계단 다 올라오고도 개 멀쩡한데?
- ㅅㅂ 체력까지 좋은 너란 여자. 도대체 날 얼마나 애태울 작정이야!
- 이 와중에 연우는 다 죽어가네
- ㅋㅋ 다리 후들거리는 거 보소.
- 갓 태어난 송아지인 줄.
- 다리가 길어서 기린에 가깝지 않나?
순간, 선녀보살님이 얼굴에 웃음기를 지웠다.
그 모습에 주위 공기가 다른 공간에 온 듯, 싹 바뀌어버렸다.
무겁다···
그럼에도 귀신을 마주했을 때처럼 불쾌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마치 범접할 수 없는 그 든든한 무언가가 우릴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만 같았다.
감히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느낌이랄까.
선녀보살님은 한참을 이곳저곳에 시선을 뿌리더니, 어느 한 곳에 시선을 한참 머물렀다.
바로 그곳이었다. 대웅전.
“서, 선녀보살님. 저기가 아까 제가 갔었던···”
그 순간.
쾅!
“워어어어!”
“와아악!”
선녀보살님의 그 기운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
열려있던 대웅전 문이 굉음을 내며 제멋대로 닫혀버렸다.
시벌··· 깜짝이야. 도대체 뭔데?
우리들. 아니 선녀보살님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아까 나한테서 도망쳤던 이유도 선녀보살님의 기운 때문인 건가?
살며시 선녀보살님의 얼굴을 바라봤는데.
청순했던 눈은 어디가고 어찌나 예기처럼 반짝거리는지 숨이 막힐 정도였다.
고요한 적막을 깨고 선녀보살님이 입을 열었다.
“이승에 꽤나 오래 머물고 있던 영가네요.”
나는 선녀보살님이 쳐다보던 대웅전을 한번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네? 뭐, 뭐가요?”
“저분과 연우 씨를 괴롭혔던 영가요. 독한 정도가 아니예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선녀보살님의 말에 대답했다.
“잘 모르겠지만, 그,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그러니 선녀보살님도 이번에는 조심···”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녀보살님은 무구 부채를 들고 성큼성큼 대웅전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머쓱한 표정과 함께 입을 오므리고, 주인 따르는 강아지처럼 그 뒤를 졸졸 쫓았다.
- 꺄아아악! 역시 거침없어 내 여자.
- 귀신계 담당 일진.
- 잔챙이는 빠져 있으라고!
- 그냥 뒤에 조용히 짜져 있어!
- ㅋㅋ 연무룩.
- 선심 써서 걱정해 줬는데 1도 듣지 않음.
- 어디 무당 견습생 따위가 베테랑을 걱정하는가!
- 그냥 그 후들거리는 다리나 붙들고 순돌이나 지키고 있으라규!
- 저승사자도 후드려 팰 기세다.
그런데.
덜컥. 덜컥. 덜컥.
잠금장치가 있다 해도 시원찮을 낡은 대웅전 문.
마치 쇠로 만든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선녀보살님은 고개를 들어 문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오히려 나는 당황하여 문 손잡이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어? 이거 왜, 왜 이러지?”
물론, 열리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안에서 순돌이가 짖어댔다.
왈! 왈!
그 순간.
우당탕탕! 챙!
쨍그랑!
안에선 물건 집어던지는 소리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내 인상을 잔뜩 찌푸리게 만드는 신음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깨개개갱!
순돌이가 내는 신음 소리였다.
순간, 나는 인상을 팍 찌그러트리며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야 이 미친 귀신아! 순돌이 엄마도 네가 죽였냐! 순돌이한테 손 하나라도 까닥했다간 아주 성불이고 뭐고 그냥 묵사발을 만들어버린다아아아!”
순간, 내 괴성과 함께 주위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 호우~ 요 새끼. 선녀보살 버프 있다고 큰소리치네.
- 아쭈! 어깨뽕 이 잔뜩 올라왔다 너?
- 복식호흡인가?
- 내 귀가 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네 ㅅㅂ
- 근데 이 소리 뭔데?
- 안에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격한 소리들인데?
잠시 후.
고스트 박스에선 음성이 터져 흘렀다.
[ 치지지지익- 꺼져 치지지지익- 씨발 치지지지익- 죽인다 ]
“······”
그 살기 넘치는 목소리에 내 등줄기엔 얼음 물을 끼얹은 듯, 소름이 쭈욱 타고 흘렀다.
그래도 용기를 냈다.
무엇보다 순돌이의 가족을 죽게 만든 것이 저 영가 때문일 거라는 일방적인 의심, 그리고 분노 때문이었다.
“시벌··· 내, 내가 그런 거에 눈 깜짝할 것 같냐! 이 문··· 부숴버리면 그만이지!”
나는 곧장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차기 위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아니, 흥분한 나를 선녀보살님이 말렸다.
“연우 씨.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그게 저들이 원하는 거예요.”
“······”
선녀보살님은 나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순돌이는 괜찮을 거예요. 영가들은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힘을 가하려면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해요. 저 영가가 원하는 건 순돌이가 아니에요. 뭘 원하는지는 연우 씨가 잘 아시겠죠?”
“······”
설마 몸을 지켜줄 액세서리 하나 없는 텅 빈 몸의 나인가?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선녀보살님이 갑자기 눈을 살며시 감았다.
이내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는 불쌍한 영혼이여··· 무슨 한이 이리 깊게 남아서 이렇게까지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냐··· 내 그 한을 풀어줄 터이니, 날 믿고 이 문을 열어다오.”
쾅! 쿵. 쿵.
쨍그랑!
선녀보살님이 대화를 시도하려는 것 같았지만, 어림없었다.
고집이 어지간히 센 게 아니었다.
굳게 닫힌 대웅전 안에선 원인을 알 수 없는 소리들만 잔뜩 들려올 뿐이었다.
- 아니. 안에 사람 있냐?
- 이거 대체 뭔 소리야?
- 뭐 깨지는 소리도 나고 떨어지는 소리도 나고
- 그냥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리얼한데?
- 순돌이 아까 보니 천재견 같던데, 설마 얘한테 교육이라도 시켰냐
- ㅅㅂ 이제 사람으로 만족 못 하고 개까지···
- 대단한 놈이네. 대기업이랑 손잡으면 그런 것도 가능한 건가
- 미친놈들. 소설 쓰냐
선녀보살님은 이내 무구 방울까지 합세해 흔들며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마음 다 이해하니라. 이승에 남아 있는 것들 중에 억울하지 않은 놈이 어디 있겠나. 자, 그러지 말고 어여 이 문을 열어라. 내가 아주 좋은 곳으로 보내줄 터이니···”
그 후, 한참을 잡다한 소리가 계속되었다.
어느 순간 적막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선녀보살님이 흔들던 무구들을 살며시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덜컥.
드르륵.
놀랍게도 문이 스스로 열렸다.
“시, 시벌··· 뭐지? 혀, 형님들···”
- ?
- 뭐야?
- 갑자기 닫혀있던 문이 왜 지맘대로 열려?- 헐. 순돌이가 진짜 천재견이었나
- 미친. 저걸 순돌이가 어떻게 열어. 선녀보살이 한 거지.
- 고작 몇 마디 중얼중얼 거렸는데 문이 열렸다고?
- 무당이 아니라 마술사였음?
- 저렇게 낡아 보여도 문만큼은 최첨단 자동시스템 인가?
- 귀신이고칼로리네 시벌
문이 열리자마자 순돌이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나는 이리저리 순돌이의 몸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야. 순돌아. 너 괜찮아?”
왈! 왈!
다행히도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것도 잠시, 순돌이는 대웅전 안을 향해 으르렁 거리기 시작했다.
그르르르릉.
나는 자연스레 대웅전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아까 나를 극한으로 몰았던 그 영가의 실체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