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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자영업자 2화 (2/119)

S급 자영업자

2화

* * *

또륵.

링거액이 좁은 플라스틱 튜브 안으로 흘러내렸다.

하얗게 질린 손등에 꽂힌 링거 호스, 빳빳한 병원복. 가슴께에서 살랑이는 검은 머리카락까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빙의되었던 그날처럼 나는 갑작스럽게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왔다.

병원 서랍장 위에 놓인 손거울로 얼굴을 비춰 보자 구불거리는 은발에 따뜻한 녹안을 가진 청초한 미인이 아닌, 검은 머리에 매서운 눈매를 가진 창백한 낯의 여자가 보였다.

‘……아, 김유정이다.’

오랜만에 보는 내 모습에 뭐라 감회를 느낄 새도 없이 병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곧바로 웬 여자가 엉엉 울며 병실로 들어섰다.

“내가 그래서 그 자식은 아니랬잖아!”

여자는 덥석 내 어깨를 잡고는 네가 뭐가 못나서 그런 놈에게 목을 매냐며 더 좋은 사람 소개해 줄 테니 제발 그만하라며 나를 흔들었다.

와, 토할 것 같다.

이대로 가다간 서로 좋은 꼴 못 보겠다는 생각에 급하게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잠, 잠깐. 아, 좀!!”

“어, 어?”

“흔들지 좀 말아 봐요!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토하겠네. 자, 나 쳐다보고 숨 쉬어요. 하나둘, 하나둘.”

“으, 응? 어? 후, 하. 후, 하.”

“좋아,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네. 그래서 그쪽은 누구세요?”

염색한 갈색 머리에 진주 귀걸이, 코랄색 눈 화장을 하고 말끔하게 정장까지 갖춰 입은 이는 대략 20대로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는 얼굴인데 누구지?

어색함이 표정에 드러난 듯, 여자가 다시 울상을 지었다.

“왜, 왜 그래. 유정아아…… 너 내가 함시혁이랑 헤어지라고 했다고 이러는 거야, 지금?”

두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여자가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유정아, 함시혁 그 자식이 너한테 두 번 다시 딴 사람 안 만나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집에 여자를 들였다며! 너 설마 또 그 자식 용서해 줄 건 아니지?!”

“네? 용서?”

“그것만은 안 돼! 차라리 내가 소개해 줄게. 응? 20대 초반 젊은 애들도 많은데 네가 뭐가 못나서 그런 놈을 만나!”

“20대 초반? 젊어?”

그 말에 나는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분명 조금 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기억 속에서의 모습과 다르게 더 마르고 성숙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다른 세계에 가 있는 동안 잠들어 있어서 살이 빠진 것일 수도 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여자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사실 내가 그쪽 세계에서 7년을 사는 동안 이쪽의 현실에서도 역시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던 거라면?

그렇다면…….

“유정아?”

나 대신 7년 동안 내 몸을 움직인 사람은 누구일까?

* * *

보통 빙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될 경우, 그동안 원래 세계의 시간은 멈춰 있거나, 혹은 아주 짧은 시간만이 지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랬다. 나는 당연하게도 모든 것이 그대로일 줄로만 알았다.

“그으래서…… 내가 함시혁이란 애랑 사귀었다고? 그것도 무려 5번이나, 바람 핀 놈이 미안하다고 하면 다시 받아 주면서?”

“으응…… 그보다 유정아. 진짜 의사 선생님 안 불러도 되겠어? 머리에 큰 문제 생긴 거면 어떡해.”

“괜찮으니까 말이나 계속해 봐. 기억이 날 듯 말 듯하니까.”

나는 이마를 짚은 채로 고개를 까닥였다.

눈앞의 여자가 말한 정황이나, 내 과거 행적과 저쪽 세계에서 들은 아멜리아의 평판을 비교해 봤을 때, 아무래도 7년간 내 몸에 있던 것은 진짜 아멜리아 캠벨인 것 같았다.

내가 7년간 아멜리아로 살았던 것처럼 그녀 또한 김유정으로 살았던 게 아닐까. 서로 몸이 바뀌는 이야기는 흔하니…….

‘……그렇게 믿자.’

진실이 어떻든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았다. 다른 이라면 짐작도 안 갈뿐더러, 섬뜩하기까지 했으니까.

어쨌든 아멜리아(추정)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고자 노력한 듯했다.

“하지만 너, 예전에도 그런 적 있잖아.”

지금 눈앞에서 걱정되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저 여자도 바로 아멜리아가 만든 인연이었으니까.

“그 사건 이후로 종종 기억에 혼동이 온다고 들었어. 역시 검사부터 받자, 응?”

그 사건이라면 지하철에서 쓰러졌던 일을 말하는 건가? 아, 갑자기 인격이 바뀌게 되었으니 변명거리가 필요했겠구나.

말없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고 있으니 여자가 불안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여자의 이름은 한세영. 무슨 센터에서 일하고 있다는데 오늘은 나 때문에 반차를 냈다고 한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는데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마 아멜리아가 내 몸에 빙의한 뒤 새로이 만난 듯했다.

그럼 오민아는 어떻게 된 거지? 연락이 끊긴 건가? 문득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아니, 괜찮아. 그보다 나 때문에 반차 써도 돼?”

“응. 나는 가이드다 보니 건강상 문제가 생기면 일반 회사에 비해 쉽게 반차 낼 수 있거든. 아프다고 거짓말 좀 했지.”

관광업계 쪽이 반차 내기 쉽구나. 의외네.

“아, 우리 집 위치는 고등학교 때 그대로야? 우리 가족은 건강하지? 24살이면 대학 졸업했으려나…… 나 취직은 했어? 아님 취준생? 아, 휴학했나?”

쉴새 없이 중얼거렸다. 내 말이 길어질수록 한세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갔지만, 내게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생각해 봐라. 7년이다.

한세영의 눈에는 미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는 것보다 그동안 쌓인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게 더 중요했다.

애초에 만나 본 적도 없는 아멜리아의 흉내를 내는 것도 무리고.

“유, 유정아…….”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창백한 낯으로 불안하게 눈을 굴리던 한세영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에 나는 한세영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로 숨을 들이켰다.

“………뭐? 대학을 안 갔어?”

우선 김유정은 졸업은커녕 대학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물론 아멜리아가 이전의 나처럼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녀 역시 글자부터 새로 익혀야 할 판이었을 텐데 곧장 입시 준비가 가능할 리가.

하지만 우리 집은 어디를 가든 대학은 꼭 나와야 한다는 주의였다.

그래서 나는 목표를 낮추든, 재수를 시키든 어디라도 보냈을 거라고…….

“자영업자? 꽃집을 운영하고 있다고? 내가?”

그런데 꽃말은커녕 꽃 이름도 잘 모르는 내가 꽃집을 운영하고 있단다.

사업을 할 바엔 사회의 톱니바퀴 중 하나가 되어 월급쟁이로 살 거라는 내 인생관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더구나 전 남친에게 돈을 빌려줬어? 그것도 오백이나? 차용증도 없이??”

그나마 보증은 안 서 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모든 게 충격적이었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이것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시골로 귀농하셨다고?”

집이 사라졌다.

* * *

7년 만에 현실로 돌아오니 어렸을 때부터 죽어라 일구어 놓은 학력이 물거품이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취직했으나 얼마 안 가 퇴사.

그 이후 알바를 전전하다 꽃집을 운영하기 시작했으니 그나마 일한 경력도 단절.

게다가 쓰레기로 추정되는 전 남친에게 차용증도 없이 오백만 원을 빌려줬단다.

덕분에 당장 있는 재산이라고는 갚아야 할 대출금과 그 대출금으로 마련한 작은 꽃집, 원룸이 전부인 상황이었다.

“이건 꿈일 거야…….”

끔찍한 악몽이 분명하다.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니 화도 안 난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바닥만을 응시하던 때였다.

병실 문이 열리더니 이번에는 웬 남자가 들어왔다.

“유정 씨!”

“아, 현우 씨. 지금 상황이 안 좋아서 우선 퇴원 수속 밟고 유정이 집으로 돌아가서 얘기해요. 제가 다 설명해 줄게요.”

남자와 아는 사이인 듯한 한세영이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런 그녀를 발견하고 한결 풀린 표정을 짓던 남자가 나를 보더니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지금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유정 씨 집이 무너졌다고 해요.”

뭐?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 대신 한세영이 물었다. 한세영의 물음에 남자는 한참을 망설였다.

흘낏 내 눈치를 보는 게 안 그래도 허약해 보이는 내가 또 쓰러질까 걱정하는 듯했다.

“괜찮으니 말해 봐요.”

내가 침착한 낯으로 재촉하자, 남자가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그게…… 유정 씨 집 근처에서 고위 에스퍼의 폭주가 일어났는데, 그 여파로 유정 씨 집이 무너졌어요.”

에스퍼는 또 뭔데. 무슨 태풍 이름 같은 건가?

도로에 코끼리라도 나타난 게 아니라면 왜 멀쩡한 집이 무너지는 건데.

안 그래도 없는 재산마저 사라졌다는 이야기에 나는 조용히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뒤로 넘어갔다.

“유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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