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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자영업자 12화 (12/119)

S급 자영업자

12화

그렇게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다음 날 그 상태 그대로 일하러 갔다.

없는 체력을 끌어모아 일을 마치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옆에서 옷을 갈아입던 여자 알바생이 내 옷을 가리켰다.

“어? 언니, 그거 A 브랜드 아니에요?”

“뭐?”

“와, 맞는 거 같은데. 이거 한정판 아니에요? 지금 부르는 게 값이라고 들었는데 이걸 실제로 다 보네. 산 거예요?”

“……아니. 친구 옷이야.”

“되게 부자인 친구인가 봐요. 부럽다~.”

“…….”

모르고 해골 물을 마셨던 원효 대사의 마음이 이러할까.

옷을 반납하기 위해 나는 퇴근하고 곧장 어제 갔던 오피스텔로 향했다.

세탁은 하지 않았다. 보통 세탁하고 돌려주는 게 예의겠지만, 이런 옷을 맡겼다가 자칫 잘못되기라도 하면 감당할 자신이 없다.

커다란 유리문 앞에서 기억하고 있던 호수 버튼을 누르자, 주연우의 급한 목소리와 함께 곧바로 출입문이 열렸다.

출입문이 열리자 무전기용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고 있던 보안 요원들이 위에서 연락받았다며, 엘리베이터를 열어 주었다.

전날 정신없을 때는 주연우의 얼굴 확인과 동시에 바로 통과되었었는데, 제정신인 상태에서 보니 엄숙한 분위기에 홀부터 복도까지 화려한 풍경이 눈에 들어와 기분이 조금 멋쩍어졌다.

“왔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주연우는 카페에서 보아 왔던 모습과 달리 가볍게 흰 티에 카디건 차림이었다.

“저 온 거 어떻게 알았어요?”

“발소리가 들려서요.”

비싼 집치곤 방음이 좋지 않나 보다.

“아, 그런데 연우 씨 그때 줬던 옷 있잖아요-.”

“들어와요. 춥지 않아요? 단 거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마침 지인이 메모리아의 케이크를 선물한 게 있어서요. 여기가 그렇게 유명하다면서요?”

“거기 케이크라면 엄청 유명하죠.”

메모리아의 케이크는 가격도 가격이지만, 예약하는 데만 해도 일이라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제발 체인점 좀 내 달라는 말이 많은데도 맛을 유지하겠다며 내지 않고 있었다.

나도 몇 번이고 구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케이크였기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모처럼 받았는데 저는 케이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혼자 먹기에도 너무 많고…… 괜찮으시다면 드시고 가시겠어요?”

권하는 목소리에 약간의 난처함이 묻어 나왔다.

그래, 세탁 건에 관해서 설명해야 하긴 하지. 그리고 크림 타르트도 있었으면 좋겠다.

“아…… 그럼 마침 할 말도 있으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홀리듯 집안으로 들어섰다.

밤새 어지럽혀 놓아서 엉망이었던 집은 하룻밤 사이 깨끗해져 있었다.

음료는 뭐 마실 거냐는 물음에 주방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어찌 된 게 일반 가정집에 업소용 커피 머신기가 있다.

어제도 저런 게 있었던가? 정신없었던 전날을 상기하다 문득 그때 건네받은 옷이 생각났다.

“아, 맞다. 이 옷 돌려드릴게요. 원래는 세탁하고 드리려고 했는데, 혹시라도 잘못해서 옷이 망가질까 걱정되어서 그냥 가져왔어요.”

“그 옷, 드린 거예요.”

“아뇨, 괜찮아요.”

“취향이 아니시면 다른 것으로 드릴까요? 아, 그러니까, 이름이…….”

주연우가 나를 지칭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말끝을 흐렸다.

“아, 통성명이 아직이었네요. 김유정이에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다섯이요.”

“저는 스물셋인데…… 누나라고 불러도 돼요?”

“상관은 없는데…… 굳이요?”

“그쪽이 더 친해 보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모습이 잘 그려진 그림 같았다. 외적인 의미에서 한 말이라기보단 분위기가 그랬다.

“그런데 안색이 안 좋아 보이셔서 그런데 혹시 어제 무슨 일 있으셨나요?”

“아…… 새로운 숙박소 구하는 게 생각보다 잘 안 되어서요. 당일 예매면 아무래도 가격이 있다 보니-.”

“친구분 집에서 머무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그…… 친구가 집에 없어서요. 휴대폰이 망가져서 연락도 안 되고……. 아, 있다가 다시 가 볼 생각이에요.”

나는 가장 앞에 놓인 케이크를 포크로 갈랐다. 무스인지 잼인지 모를 것이 포크에 끈적하게 묻어나왔다.

주연우가 소파 팔걸이 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그가 물었다.

“혹시…… 마땅히 머물 곳이 없으시다면 이 집에서 머무시는 건 어떠세요? 빈방도 많은데.”

“네?”

“아, 저는 집에 잘 안 들어오거든요. 들어와도 대부분 방에만 있고……. 이 건물 보안 요원들이 실력이 좋은 편이라 보안도 나쁘지 않고요.”

한참 말을 이어 가던 주연우가 살짝 시선을 틀더니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꺼냈다.

“만약, 그게 싫으시다면…… 차라리 제가 숙박소를 잡아 드리면 안 될까요? 보답해 드리고 싶다고 했었잖아요. 이쪽 부근 보안이 그래도 괜찮은 편이에요.”

주연우가 내민 화면 속 호텔의 1박 가격을 확인한 나는 설핏 눈살을 좁혔다.

이게 공이 몇 개야…… 이 사람은 무슨 전생에 은혜 갚는 까치였나……?

목숨을 구해 줬으니 당연한 대가라며 받아도 되나 고민이 들었다.

만약 지금 내가 아멜리아였다면 별생각 없이 받았을 거다.

헤르만 제국에서는 그랬다.

키센도 첫 만남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마법에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막 백작가에서 탈주한 나를 제집에서 머물게 해 줬고, 병에 걸린 딸을 살려 준 보답으로 자기 재산을 반 주겠다는 귀족도 있었으니.

그런데 지금은 김유정이고, 아예 다른 세계라고 치기엔 묘하게 현실감이 있어서 좀 걸렸다.

“저 이거 못 갚아요.”

“갚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갚아야죠.”

“아니, 그래도 이건…….”

역시 좀 걸린다.

구해 준 값이라기엔 이미 내가 더럽힌 8천의 코트값과 더불어 위험 언질을 준 것으로 충분히 값을 치른 것 같았다.

그는 내가 구해 줬다는 이유만으로 기밀 사항에 대해 언질을 주었으니 말이다.

논쟁이 몇 번 오갔다.

조심스럽기 그지없던 사람이 이런 쪽에서는 제 의견을 굽히지 않더라.

아무리 그래도 추천해 준 호텔들은 가격이 과하다. 하루에 이 가격이 말이 되냐.

하지만 제가 불편하시지 않으시냐. 이쪽에서 머무는 편이 낫다.

연우 씨가 불편한 건 아니다. 오히려 연우 씨가 나 때문에 불편할 거다.

“저 원래 방에서 잘 안 나와요.”

논쟁은 주연우의 집으로 정해지며 끝났다.

‘금액이 과하다’가 그럼 이 집에서 머물면 따로 돈이 나갈 일도 없고 괜찮지 않으냐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곧바로 그럴 필요 없이 내 돈으로 알아서 숙박소 잡으면 된다고 말하려던 내 머릿속에 통장 금액이 스쳤다.

“…….”

아주…… 앙증맞고 귀엽다.

현실은 멀리 있지 않았다. 당장 지갑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럼…… 며칠만 신세 지겠습니다.”

상식 추구고 뭐고 당장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게 더 문제다.

계산을 마친 나는 주연우가 내미는 출입용 카드 키를 받아 들었다.

* * *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라 그런지 모텔은 당일 취소임에도 약간의 수수료만 제하고 환급되었다.

‘그래, 어차피 며칠 안 되니까.’

집도 크겠다, 대충 에X비앤비에서 호스트와 한집에 있는 개인실을 이용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나는 출근한 카페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은 최근 주연우가 하루가 멀다 하고 카페에 방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 퇴근 10시 맞죠?”

늦은 오후에 방문한 그는 이 시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처럼 모르는 사람 취급하며 시간을 보냈건만, 퇴근 10분 전에 위기가 찾아왔다.

주연우가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무, 와, 오…….”

불과 5분 전까지만 해도 오늘따라 눈이 편하다며 떠들던 여자 알바생은 먹이를 받아먹는 물고기처럼 입을 빠끔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의문에 가득 찬 강렬한 시선을 느끼며 나는 내일이 쉬는 날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 네……. 그때가 카페 마감 시간이니까요.”

“그러면 기다릴게요. 저 오늘 차 가져-.”

“미친.”

서둘러 그의 입을 틀어막고 반응을 살폈다.

‘……들었나?’

여자 알바생의 얼굴은 부력을 발견한 아르키메데스처럼 유레카를 외치고 있었다.

‘들었군.’

나는 조용히 한탄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여자 알바생은 어차피 자신이 정리하고 가기로 했으니 먼저 퇴근해도 된다며 나를 떠밀었다.

주연우는 자연스럽게 그런 나를 데려다 자신의 차에 태웠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저 데리러 오신 건 아니죠?”

“마침 시간이 맞아서요. 목적지가 같잖아요.”

“그렇긴 한데…….”

말끝을 흐린 채 미간을 짚었다.

그는 단순히 목적지가 같아서 같이 가자고 한 것뿐일지 몰라도, 그 덕분에 나는 며칠간 시달리게 생겼다.

“다음부터는 그냥 먼저 가셔도 돼요.”

차라리 걸어가는 게 낫지. 나는 굳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집안의 물건을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고 나자, 나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조금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집주인에게 자유를 허락받은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영화 관람이었다. 어찌나 텔레비전이 크고 좋은지 처음 봤을 때부터 써 보고 싶었다.

영화는 ‘그리고 혼자가 되었다’라는 이름의 스릴러 공포 영화였다. 양해를 구한 뒤 거실 전등을 대부분 끄고 소파에 앉았다.

멀찍이서 화면을 응시하던 주연우도 영화에 관심이 생긴 듯 나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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