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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자영업자 15화 (15/119)

S급 자영업자

15화

그저께 모임에 참여하기로 약속해 놓고 안 온 건도 있고, 이전에 던전 잘만 공략하던 신입 힐러를 비싼 아이템까지 써서 강제 소집했던 건도 따질 겸. 겸사겸사.

솔직히 말하자면 집까지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었다. 하겠다고 뱉은 말 하나는 쓸데없이 잘 지키는 놈이 진짜 연락을 안 받았기 때문이다.

최근 케이크를 사 오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연우진의 음식 취향이 바뀐 모양이라고 판단한 하도경은 저번에 샀던 메모리아의 케이크를 구매하기까지 했다.

이거 처먹고 조금이라도 덜 지랄하라는 일종의 공양이었다.

만들어 둔 카드 키가 있긴 하지만 말도 없이 이걸 쓰면 돌아올 결말이 훤했다.

가능한 한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크를 했건만, 몇 분이 지나도 응답 하나 없었다. 연락을 수십 통 걸어 봐도 차단했는지 받을 기미가 안 보인다.

“X발.”

쾅.

분노로 이성을 잃은 하도경은 문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고, 결국 카드 키로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다.

‘대충 식탁에 두면 되겠지.’

케이크 상자를 내려놓으려던 하도경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틀었다.

분노로 무턱대고 욕부터 지껄였건만, 정작 뒤에 선 이는 연우진이 아니었다.

“아, 안녕하세요?”

여자였다. 웬 여자가 묵직한 철제 스탠드를 야구 방망이처럼 쥐고 휘두르려다 말고 등 뒤로 감췄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창백하리만큼 흰 피부를 가진 다소 서늘한 외양이었다.

무뚝뚝한 인상과는 대조적으로 여자의 얼굴에는 당황스럽다는 감정이 눈에 띄게 드러나 있었다.

“……누구세요?”

아니, 그런데 저 여자는 왜 내 뒤에서 그런 자세로 있었던 거야? 스탠드는 또 뭐고.

순식간에 분노가 식고 의문만이 남았다. 하도경은 급히 집 상태를 확인했다.

없던 가구들이 생기긴 했어도, 이 삭막한 집안 꼴은 연우진의 집이 분명했다.

연우진의 집이 맞다는 것을 깨닫자 더 큰 충격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여자다. 염색체 XX다.

그러니까 그녀가 S급 에스퍼 집에 침입하는 불쌍하고 정신 나간 도둑이 아닌 이상 지금 연우진 그놈의 집에 여자가 있는 거였다.

그와 동시에 최근 있었던 연우진의 기행이 머릿속에서 속속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 영역에 낯선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는 놈이 얼굴도 잘 모를 신입 힐러를 집으로 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나.

단것 먹는 꼴을 여태껏 살면서 보지 못했건만 대뜸 유명한 케이크 가게가 어디냐고 묻질 않나.

성격 파탄자 길마와 학창 시절을 함께한 덕분에 눈치로 탑을 쌓은 하도경은 생각했다.

이 여자가 원인이라고.

“허어…… 와, 씨. 내가 살다 살다 별걸 다 보네. 그놈 집에 여자가 있는 걸 다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자 머리가 터질 듯 아파 왔다.

하도경은 제 머리를 거칠게 헝클이며 여자에게 연우진의 현재 위치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여자가 답했다.

“아, 연우 씨요? 죄송하지만 저도 방금 일어나서 잘 모르겠어요.”

“……네? 연우?”

연우가 누군데. 연우진의 연우를 딴 건가? 왜 그렇게 부르는 건데? 설마, 애칭?

당황스러움에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며 그건 연우진을 말하는 거냐고 물어보려는 때였다.

돌연 쿵, 하고 강한 충격이 그의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익숙하다 못해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압박감이었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이어서 들린 것은 당황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맞다. 연우 씨! 지금 당장 구급차 불러요. 저 사람 하필 넘어져도 머리부터 넘어져서 뇌진탕 왔을지도 몰라요!”

“괜찮아요.”

“아니, 연우 씨는 괜찮을지 몰라도 저 사람은 안 괜찮다니까요?”

여자에게 말하는 어조가 묘하게 부드러웠다. 하도경은 정신적 충격을 받아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미친…… 연우진이 존댓말을 쓴다고?’

연우진이 존댓말을 쓰는 상대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저렇게 다정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살면서 처음 듣는다.

억눌린 몸보다도 머리가 더 괴로웠다.

이건 자신이 미쳤거나 연우진이 미쳤거나 둘 중 하나인 게 분명한데, 제가 미쳤을 리는 없으니 연우진이 미쳤다는 말이 된다.

“이 정신 나간 연또놈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몸을 짓누르는 무게가 더해졌다.

마치 무언가를 보여 주기 싫은 어린애처럼 유독 제 머리로 향하는 압박감에 하도경은 인상을 구겼다.

결국에는 능력까지 쓰며 몸을 일으켰다. 끝에 가서 연우진이 능력을 해제했기에 겨우 그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화는 또 왜 안 받-.”

본론부터 내뱉으려는 찰나에 연우진이 그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댔다.

흠칫, 본능적으로 뒤로 물리려던 발을 멈춰 세운 것은 그 이후에 나온 생뚱맞은 단어 탓이었다.

“주연우.”

“뭐?”

“주연우라고.”

여자의 입에서도 나왔던 이름이었다.

당황도 잠시, 하도경은 지금 연우진이 가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실소를 흘렸다.

어찌 되었든 대략적인 상황이 파악되자 침착히 자기소개부터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납득이 덜 갔다.

저 여자는 누구고, 연우진이 타인을 제 영역 안에 들일 정도라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며, 아까부터 저 자식은 왜 자꾸 노려보는 것인가.

“하도경입니다. 방금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네, 저는 김유정이에요. 그보다 머리 괜찮으세요? 소리가 장난 아니던데 병원에 가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뇨. 에스퍼라 이 정도는 괜찮아요.”

“아, 그렇구나. 에스퍼셨구나…….”

여자의 표정이 떫은 감이라도 먹은 듯 구겨졌다.

이에 가져온 케이크를 먹겠냐고 권유하자 다시 스르륵 인상이 펴졌다. 역시 저번 케이크는 그녀의 몫이었던 모양이다.

“헉, 이거 좋아해요. 감사합니다.”

“뭘요. 상황 보니까 제가 아침부터 깨운 것 같은데. 전 진짜 얘 집에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거든요. 그런데…… 김유정 씨는 어쩌다 이런 곳에……?”

하도경은 진심을 담아 물었다. 웬만한 범죄자보다 위험한 게 저놈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 길드 길마였다.

혹시라도 안 좋게 얽힌 거면 배상이라도 두둑이 해서 어떻게든 원활하게 풀어 볼 생각이었다.

“하하.”

여자가 기계적인 웃음소리를 냈다. 긴장감 없는 태도를 보니 협박당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케이크 상자에 시선을 빼앗긴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우진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누나, 잠시만요.”

하도경은 기겁했다. 방금 자신의 귀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되었다.

여자가 건넨 케이크를 받아 든 연우진은 그대로 케이크를 상자째로 없앴다.

처참히 구겨진 케이크에 여자가 눈에 띄게 동요를 드러냈다.

“아니, 갑자기 멀쩡한 케이크는 왜 없애요?”

여자가 따지자 연우진은 답했다.

“독 들었으면 어떡해요.”

“……?”

“저 새끼가 독 넣어서 누나 해치려고 한 거면 위험하잖아요.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거 먹는 거 아니에요.”

“……예?”

그렇게 말한 연우진이 하도경을 바라보았다.

비스듬히 고개를 튼 채로, 맹수의 눈처럼 언뜻 금색으로도 비치는 눈동자에는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어려 있었다.

“허…….”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자신이 독을 넣었을 리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연우진이 가장 잘 알 테니까.

그러니 저것은 접근하지 말라는 위협이었다.

하도경은 저것과 비슷한 시선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가이드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독점욕. 그것은 에스퍼의 본능적인 특징 중 하나였다.

‘……아니,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그 누구도 아닌 연우진이 그런다고?’

하도경은 조용히 입가를 가렸다. 그의 두 눈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충격이 어려 있었다.

연우진은 가이드에 이지를 잃은 짐승처럼 구는 에스퍼들을 경멸했다.

그 모습들을 지켜보며 혹여라도 저렇게 되긴 싫다며 안 그래도 매칭률이 극악이면서 어느 날부턴 매칭까지 거부하기 시작했던 녀석이다.

이대로 가다간 본인의 뒤질 판인데도 말이다.

그가 봐 온 연우진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할 성정은 아니었다.

‘……진짜, 가이드일까?’

그동안 길드 유일의 S급 에스퍼를 위해 온갖 가이드를 찾아봤지만, 연우진과 매칭되는 가이드는 좀처럼 없었다.

정말 그녀가 가이드이며, 연우진과 매칭되는 희귀한 가이드라면? 그렇다면 이렇게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김유정 씨,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늘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 네.”

“아침부터 찾아와 죄송했습니다.”

“뭘요. 여기가 제집도 아니고, 찾아오는 건 하도경 씨 자유죠.”

하도경은 악수를 청했다.

자연스럽게 내민 손에 연우진의 눈가가 찌푸려졌지만, 이번만큼은 그 역시 양보할 수 없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죠.”

“…….”

김유정은 하도경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잠시 시선이 맞닿았다.

다소 날카로운 검은 눈이 그를 바라보자, 속내를 들킨 건가 싶었던 하도경은 살짝 입꼬리를 내렸다.

이윽고 김유정이 손을 뻗어 하도경의 손을 잡았다.

“기회가 된다면요.”

맞잡은 손이 짧게 흔들렸다 떨어졌다.

하도경은 조용히 놓은 손을 쥐었다 폈다.

“-네.”

미미한 파장조차 없이 고요하기만 한 감각.

그녀는 가이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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