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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자영업자 70화 (70/119)

S급 자영업자

70화

“이건 무언가를 목적으로 나라를 멸망을 시키기로 작정했다고밖에 볼 수 없어.”

“하지만 레이몬드가 그럴 이유가…….”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놈이 갑자기 너를 ‘차해연’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 있지 않겠어? 넌 그곳에서 ‘김유정’이라는 이름의 인간이었다며.”

쉼 없이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기절했다고 생각했더니 대뜸 헤르만 제국 중 어딘가로 추정되는 숲속이 보이는 것도 황당한데, 더구나 이제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아멜리아에 비비안까지 있다.

더구나 두 사람은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서로만 아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나 유령이라도 된 건가?’

사후 세계를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만약 이런 게 사후 세계라면 참 개판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뭐든 통일성이 있어야지 저쪽 세계에서 죽었는데 왜 이쪽 세계 유령이 되는 건데.

더군다나 분위기도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레이몬드는 처음에는 로판 남주인 줄 알았다가, 갑자기 터진 전쟁에 로판이 아니라 서바이벌 판타지였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또 흑막 느낌으로 바뀌었다.

아멜리아로 살았을 적 그랬듯 창작물에 빗대어 한 걸음 떨어져 대화를 경청하던 나는 곧이어 아멜리아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에 두 눈을 크게 떴다.

“……게이트.”

“뭐?”

“게이트, 그래, 게이트예요.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작게 중얼거린 아멜리아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조심스러웠던 조금 전과 달리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비비안, 어쩌면 헤르만 제국은 그곳과 이어져 있는 게이트 중 하나일지도 몰라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나도 모르게 아멜리아를 향해 걸어갔다.

내 모습은 물론이며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데도 점점 그녀의 모습이 가까워지는 것으로 내가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게이트라니? 문을 말하는 거야?”

“그, 제가 있었던 세계에는 ‘게이트’라는 게 있었거든요. 일종의 통로예요. 그곳에서는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 나오고, 그런 괴물을 처리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마물 사냥꾼을 말하는 거야? 아니면 기사단?”

비비안이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아멜리아가 비슷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쏴아.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밤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이 머리를 헤집고 지나가자 아멜리아는 손을 들어 뺨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귓바퀴를 스쳐 이윽고 목 아래로 내려왔을 무렵, 아멜리아의 시선이 내 쪽으로 옮겨졌다.

“저는…… 어쩌면 이곳이 그곳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선이 맞닿은 찰나, 놀란 듯 커지는 짙은 녹색의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 순간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 * *

“헉-.”

나도 모르게 가슴께를 쥐며 눈을 떴다.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올라왔다.

조금 전 뭐였지? 단순한 꿈? 비비안이나 아멜리아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간혹 궁금하긴 했어도 꿈에 나올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나는 숨을 삼켰다. 단순한 꿈일 리가. 애초에 나는 그렇게까지 상상력이 좋지 않았다.

아직 생생하게 느껴지는 꿈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꿈속 어둠과 달리 환한 시야에 점점 정신이 깨어났다.

따가운 빛이 깜박이는 눈꺼풀 위에 드리워졌다.

“억-.”

전날 거하게 운동이라도 한 사람처럼 온몸이 무겁고 욱신거렸다. 나는 몸을 일으키는 것에 앞서 우선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높은 천장, 오른쪽에는 거대한 창이 나 있었으며 얇은 커튼 틈 사이로 밝은 햇살이 금빛 띠 형태를 띠며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턱을 중앙에 고정한 채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방이나 병원은 아닌 것 같다. 충분히 기겁해도 될 것 같았다.

“미친, 여긴 또 어디야……!”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상체를 세우자 온몸이 비명을 질러 댔지만, 고통보다도 당장의 상황 파악이 더 급했다.

그간의 경험으로 모르는 곳에서 눈을 뜨는 것에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이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양손에 무언가가 걸렸다. 오른쪽 손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왼쪽 손에 만져진 것은 누군가의 머리카락이었다.

깜짝 놀라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침대 이불 위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는 연우진이 보였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나는 차분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꿈도 꿈이고 쓰러지기 직전의 일이 난리였던 탓에 머릿속이 혼잡했다.

더럽게 아팠다는 것만큼은 또렷하게 기억나지만.

‘아, 맞다. 배에서 연우진을 만났지.’

그런데 어쩌다?

끊긴 비디오 필름처럼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짧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가면을 쓰고 있던 사람들, 붉은색, 옅은 화약 내음과 서늘한 바다 냄새.

그래, 연우진에게 도움을 받았고, 고통에 못 이겨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기억을 되짚어 보던 나는 마지막이 어땠는지 떠올리고는 자연스레 시선을 연우진이 엎드려 있는 쪽으로 돌렸다.

“아.”

내 손은 연우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생각하던 도중에 부드러운 게 손에 잡히니 무의식중에 만진 듯했다.

급히 손을 떼려는데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손이 벗어나려는 내 손을 붙잡아 다시금 머리 위로 안착시켰다.

“……?”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 손과 내 손 위에 올려진 커다란 손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시선을 자연스레 손의 주인에게로 옮겼다.

언제 잠에서 깼는지 연우진이 이불 위에 한쪽 뺨을 대고 누운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빠져나온 햇살이 제 얼굴 위로 스며들었는데도 연우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집요한 시선에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햇살 탓인지 평소보다 옅어진 그의 머리카락과 눈이 마치 명화를 보는 듯했다.

저 얼굴은 자다 일어나도 눈부시네……. 멍한 와중에 그런 생각도 잠시, 무언가 생각날 듯 말듯 기분이 묘했다.

그 순간 내 손 위로 올려진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플 정도로 강한 힘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를 붙잡기에 충분한 힘이었고, 자연스레 연상된 것은 배 위에서 팔을 붙잡혔을 때였다. 어쩐지 숨 쉬는 게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내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자 그런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연우진은 달라진 내 얼굴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나는 자유가 된 손을 엉덩이 옆에 내려놓고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내가 자세를 고침과 동시에 연우진 또한 자세를 바꾸었다. 그는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 했다.

의자에 앉은 채로 조용히 나를 응시하고 있던 연우진의 입이 열렸다.

살짝 고개가 들리며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눈에 빛이 스며들었다.

“누나가, 죽는 줄 알았어요.”

간신히 숨을 토해 내듯 힘겹게 나온 목소리에는 미약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어깨도, 손도, 떨리고 있었다.

그의 한쪽 눈에서 흘러나온 무언가가 창백한 뺨을 타고 가느다랗게 흘러내렸다.

툭. 그의 바지 위로 떨어진 액체가 원래의 색보다 짙은 얼룩을 만들며, 천 위로 스며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현실감 없게 느껴진 탓에 나는 일어난 상황을 조금 늦게 인지했다.

한 줄기에 불과했던 눈물이 그의 두 눈에서 비처럼 쏟아진 뒤에서야 말이다.

“……어, 어? 아니, 눈. 울어요??”

문장이 되지 못한 엉성한 단어들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눈가가 퀭했다. 환자가 내가 아니라 그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에서는 눈물만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그는 그런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나만을 응시했다. 마치 내가 조금이라도 눈을 깜빡이면 사라질 신기루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떨림은 여전히 멎지 않은 채였고, 숨도 점점 가빠졌다.

“아니, 진짜 잠깐. 잠깐만.”

나는 황급히 그를 감싸 안았다. 울고 있는 제 얼굴을 감추려는 듯 연우진이 내 어깨 위로 얼굴을 묻었다. 조금 더운 숨결과 함께 어깨가 서서히 젖어 들었다.

“늦게 와서 죄송해요. 몰라서 죄송해요. 다치게 해서,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하지도 않은 것을 연이어 비는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와 미약한 울음소리에 나는 고장 난 기계처럼 뻣뻣한 팔을 뻗어 그를 감싸 안은 채 넓은 등을 토닥였다.

“그, 착하지. 뚝. 그만 울어요. 예쁜 얼굴 다 상하겠네.”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내가 납치를 당한 게 어떻게 그의 잘못일 수 있겠는가.

아주 아주 만약에 그가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본인이 나를 납치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그러리라고 예측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저 멀쩡해요! 안 죽었고, 멀쩡히 살아 있어요. 지금도 근육통 좀 있는 것만 빼면 괜찮고요.”

“……의사 불러 드릴게요. 아프지 마세요.”

“네, 네. 노력해 볼게요.”

한참 토닥이던 내 머릿속에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나 저 사람이랑 다투지 않았나?’

그것을 떠올리니 몸이 저절로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토닥이던 손을 멈추고 중얼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

……차라리 지금이라도 모르는 척 다시 기절할까? 영화 보면 보통 기절했다 깨어나면 어떤 형태로든 일이 대부분 해결되어 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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