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자영업자 83화 (83/119)

S급 자영업자

83화

단순히 비슷하다며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히 헤르만 제국에 있을 비비안의 것이었고,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최근까지 꾸었던 꿈과 처음 꿈에서 들었던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위협이고 뭐고 당장 도가빈과 대화를 나눠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나는 손을 들어 귓불을 매만졌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싸우기 싫거든. 줄곧 예쁜이와 대화하고 싶었는데 메시아 쪽 눈치 보느라 이쪽 눈치 보느라 고생했다고?”

“…….”

“예쁜이도 이 이야기를 제삼자 앞에서 하고 싶은 마음은 없을 거 아니야. 확실히 그런 거 보통은 믿기 힘들지. 나도 예쁜이의 기억을 읽었을 때 엄청나게 놀랐으니까.”

“…….”

그건 그렇지. 지금까지 헤르만 제국에서 있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한 적은 없으니까.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대화를 나눠 볼 필요성이 느껴졌던 데다, 상대측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혀 왔기에 더욱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그, 도가빈 씨.”

“응?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데.”

“네, 가빈 씨. 일단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봐요.”

나는 별말 없이 그의 말을 따라 주었다. 도가빈이 의외라는 듯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마 그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저번만 해도 이름을 부르긴커녕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 주지 않았던 내가, 멀쩡한 상태의 그에게 대뜸 진정하라는 소리 따위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내 심정은 폭탄을 앞둔 기분이었다. 정확히는 내 눈앞에 도화선이 두 개 놓여 있는데, 둘 다 잘못되어서 곧 터진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저한테 메시아에서 받은 호출기가 있는데요.”

나는 손가락으로 귀를 가리켰다. 귀걸이 형태의 호출기였다.

“그 호출기를 그쪽 보자마자 바로 눌러 버렸거든요. 자고로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일단 위험 상황에 닥치면 신고부터 하고 보는 게 절차상 맞잖아요? 어, 음, 그러니까……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

도가빈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가게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의 입가에 자리했던 미소가 살짝 뒤틀렸다.

부드러운 크림과 고소한 버터 냄새가 가게 안을 따끈하게 감싼 와중, 우리 사이에는 차가운 정적과 함께 부글부글, 스튜 끓는 소리만이 났다.

메시아만 말했을 뿐인데, 짐작 가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짧은 사이, 앞으로 벌어질 일을 떠올린 듯 그가 입술 사이로 작게 탄성을 흘려보냈다.

“와…… 예쁜아, 너 오래 살겠다. 신고 정신이 투철하네.”

“감사합니다…… 그, 올 때까지 차라도 한잔하실래요?”

그러나 우리에게 차 마실 시간은 없었다.

곧장 호출기가 빛나며, 밖이 소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 * *

앞서 말하자면 나는 연우진과 도가빈이 아는 사이일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둘 다 에스퍼이니 서로 아는 사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지 모르나, 지금 상황으로 유추해 봤을 때 저 둘은 그냥 아는 사이라기엔 좀 더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았다.

“우진 씨, 일단 진정하고 그래도 가빈 씨 나빠 보이지는 않더라고요. 저를 구해 주기도 했고…….”

“가빈? 누나, 혹시 저 새끼랑 친해요? 왜 이름을 불러 줘요?”

“지금 중요한 게 아니라, 아, 가빈 씨. 우진 씨랑 아는 사이였나 봐요? 빨리 오해 풀고 상황 수습 좀 해 봐요. 아까 가빈 씨가 한 말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요.”

“오랜만이다, 우진아. 이렇게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는 건 네가 내 형을 죽인 뒤로 처음인가?”

“…….”

상황을 수습하랬더니 완전히 박살을 내 놓았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된 내가 할 말을 잃은 순간, 연우진이 곱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그날 이후로 정신 멀쩡했어? 능력 부작용으로 미쳐서 한동안 갇혀 살았다고 들었는데.”

“덕분에 건강했지.”

“아, 그래? 다행이네. 이제 반쪽짜리 능력이 되어서 꽤 고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예쁜아 듣고만 있기 지루하지? 우리 따로 얘기하러 갈까? 우진이가 들으면 곤란한 이야기잖아.”

그냥 안 말릴 테니 둘이 떠들고 나는 좀 빼 줬으면 좋겠건만, 도가빈이 기어코 나를 끼워 넣었다.

“……누나?”

도가빈의 말에 연우진이 버림받은 아이처럼 불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듯한 표정에 나는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우진 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저 사람이랑 안 친해요.”

이번이 두 번째인데 뭘.

앞서 상황을 말하자면, 연우진은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도가빈을 발견하고는 곧장 공격할 기색을 내보였다.

그리고 그건 도가빈 역시 마찬가지였고, 살벌한 분위기에 나는 본능적으로 누구든 내 카페 건드리면 가만 안 둔다고 소리쳤다.

그간 겪은 경험에서 이대로는 난장판이 될 거라는 게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안 친하다니 너무하네. 친하게 지내자고 선물도 줬는데.”

“누나, 그게 뭐든 제가 다시 사 드릴게요. 병균이 옮았을지도 모르니 버려요. 네?”

그 결과 둘 다 얌전히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걸 얌전하다고 표현해도 될지는 의문이지만.

“우진 씨.”

“네.”

“가빈 씨가 선물한 건 제 친구 물건이에요. 그러니까 버리지 못해요.”

“모조품을 준 게 아닐까요?”

“…….”

연우진은 도가빈에 대한 신뢰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단호한 대답에 도가빈을 돌아보자, 그는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보다 가빈 씨, 혹시 가빈 씨의 형이라는 사람 이름이 ‘도이현’이에요?”

“아, 들었나 봐?”

마침 도이현에 대해서 들은 참에 그와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 있기에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퍼즐이 하나씩 맞춰져 가기 시작했다.

차해연의 죽음으로 폭주한 도이현은 레드 게이트를 여는 데 일조했으며, 그 열린 레드 게이트를 닫고 도이현을 죽인 것은 연우진이다.

그리고 그 차해연이라는 이름은 불과 1년 전만 해도 내가 빙의했던 아멜리아, 정확히는 꿈속 아멜리아의 입에서 나왔다.

심지어 레이몬드가 아멜리아를 그렇게 불렀다는 이유로.

나는 도가빈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그와 레이몬드가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자세히 살펴보면 닮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푸른색인 레이몬드의 눈동자와 달리 도가빈은 검은색이었고, 얼굴도 자세히 뜯어 보면 달랐다.

그러나 분위기는…….

“가빈 씨, 혹시 여자 많이 좋아해요?”

내 물음에 도가빈의 눈을 크게 떴고, 연우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연우진은 내가 도가빈에게 관심을 두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전담 가이드가 다른 에스퍼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달가울 리가.

힐끗 본 그의 눈이 짙게 가라앉아 있어서 나는 손을 뻗어 연우진의 손을 움켜쥐었다. 전담 가이드로서 에스퍼를 챙기는 것은 당연했으니 말이다.

연우진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놀란 토끼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맞잡은 손을 번갈아 쳐다보는 연우진의 모습에 작게 웃자, 그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예상은 했지만…… 진짜 놀랍네.”

그것을 앞에서 지켜본 도가빈이 중얼거렸다. 이런 연우진을 본 다른 사람이 보였던 경악 어린 반응보다는 허탈, 그리고 묘하게 원망 어린 시선이었다.

연우진을 나와 맞잡은 손을 응시하고 있었기에 그런 도가빈을 본 것은 나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내가 뭐라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감정 수습을 끝낸 도가빈이 쓸쓸한 낯을 꾸미며 대놓고 읊조렸다.

“외롭네……. 예쁜아, 나도 신경 써 주지 않을래?”

“누나, 외롭다는데 함께 있을 수 있게 묻고 올까요?”

“…….”

평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두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생각에 빠졌다.

도가빈은 레이몬드를 닮았다.

7년이란 긴 시간 동안 알고 지냈으니 그만큼 레이몬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많았다. 정확히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꿈속에서 오간 이야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꿈속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아니, 이쯤 되면 사실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레이몬드 마빌 헤르만’.

그는 헤르만 제국의 황태자이며, 아멜리아 캠밸의 약혼자였다. 장검이든 단검이든 검을 쓰는 것에 능숙했으며, 능글맞은 성격이었다.

또한 전쟁 전까지는 여성 편력이 화려했고, 마음에 들면 멋대로 애칭을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묘하게 도가빈과 닮지 않았나?

나는 도가빈에게 맨손을 보여 달라고 했다. 뜬금없는 내 요구에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내 기억을 봤다더니 자세한 건 못 봤나?

다시 부탁하려는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도가빈의 상체가 탁자 위로 처박히더니 그의 팔이 뒤로 꺾였다. 과격한 제압이었다.

“무슨, 잠, 연우진!!”

“장갑을 벗기면 되는 거죠? 제가 할게요.”

연우진은 괜히 손 더럽히지 말라며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할 말을 잃은 사이, 도가빈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좋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 순간 누군가가 뇌를 쥐고 흔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참기 힘든 어지러움에 나는 머리를 감쌌고, 그건 연우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나보다 도가빈과 접촉한 연우진 상태가 더 안 좋을 것 같았다.

본인이 말하길 접촉 시 능력 조절이 수월하다고 했는데, 이 정도로 강하게 방출했다는 건 연우진을 노리고 한 거였다. 운 나쁜 내게 그 여파가 미치는 것이고.

-쾅!

그 탓에 힘 조절이 어긋난 듯 도가빈 상체에 깔려 있던 탁자가 박살이 났다.

자유의 몸이 된 도가빈은 대수롭지 않게 몸을 일으키곤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 했다.

연우진은 불쾌감이 역력한 얼굴로 제 이마에 얹었던 손을 떼었고, 그리고 나는 처참하게 부서진 탁자를 바라보았다.

“내 탁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