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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자영업자
85화
그 사실을 인지하자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속을 긁어내렸다. 나는 연우진의 품에서 벗어났다.
“……야, 안 되겠다. 나 너한테 받을 거라도 받아야지 기분이 풀릴 것 같아. 그래, 시혁아. 우리 좋았지…….”
한 걸음, 한 걸음. 함시혁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함시혁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그는 지금까지 뻔뻔하게 떠들던 입을 꾹 닫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함시혁의 얼굴은 당혹으로 얼룩져 있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을 목도한 듯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윽고 나와 함시혁 사이의 거리가 대략 두 걸음 정도 되었을 때, 나는 손바닥을 펼쳐 내보였다.
“나한테 빌린 돈 천오백만 원. 지금 당장 갚아.”
얘가 몇 년째 안 갚았더라. 얼추 이자까지 합하면 그 정도 되겠지.
그야말로 대부업자 관점에서의 논리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너한테 돈 빌려준 적 있잖아? 천오백만 원 그거 이제 갚아 줬으면 해.”
“무슨…… 그리고 나는 오백만 원밖에 안 빌렸어! 아니, 내가 갚는다고 했잖아. 지금 내 상황이 조금 안 좋아서 그래.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꼭 이런 이야기 해야 해?”
“이거 말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진심 어린 물음에 함시혁이 울상을 지었다.
“유정아…… 정말 너 나한테 왜 이래. 너 변했어. 우리 고작 돈 가지고 이럴 사이 아니잖아? 응?”
“논점 이탈하지 말고 돈이나 갚아. 아니면 천오백 대 맞던가.”
개인적으로 돈을 갚는 편을 추천한다. 천오백 대는 때리기도 힘들뿐더러, 하루에 끝내기 어려운 분량이라 며칠은 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이상 대화를 나눠 봤자 별다른 소득을 얻어 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기에 나는 함시혁의 말을 끊고 연우진에게 말을 걸었다.
“우진 씨, 혹시 도경 씨한테 연락 좀 해 줄 수 있어요?”
메시아와의 계약 중 가이드가 불합리한 일을 겪을 시 도움을 주는 조항이 있었는데, 그 조항에 대해 말을 꺼내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오백만 원을 빌렸다는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공이 더 붙는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싶었다.
벌써 몇 년은 안 갚은 데다, 당시 한세영이 말하길 돈이 없는 것치곤 다른 사람들에게 돈 쓰는 게 후한 편이라고 들었으니 어떻게 탈탈 털어 보면 돈이 나올 것도 같았다.
“우진 씨?”
상대방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드니 연우진이 웃고 있었다.
나는 조금 얼빠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처음도 아니고, 볼 때마다 감탄스러운 얼굴이긴 했지만,
이번에는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결이 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쾌함을 숨기지 않던 연우진은 화사하게 피어오른 낯을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극성 부모가 아이를 바라보듯 자랑스러움을 한껏 담은 시선에 나는 되레 떨떠름한 낯을 했다.
연우진이 물었다.
“천오백만 원, 수금하면 되는 거죠?”
혹시 메시아에서 사채업도 해……?
한 떨기 꽃 같은 청초한 미소를 띠고는 어울리지는 않는 말을 하는 것에 순간 뇌에 오류가 떴다.
굳이 말하자면 단어 선택이 틀린 건 아닌데 어쩐지 부적절한 느낌이었다.
끼익-.
때마침 메시아 쪽의 검은색 차량이 카페 앞에 멈춰 섰다. 그 안에서 길드원으로 추정되는 몇몇 이들이 내리자 연우진은 그들은 돌아보지 않은 채 답했다.
“저것도 데려가.”
그가 가볍게 턱짓으로 함시혁을 가리켰다.
“잠, 당신들 누구야! 놔!”
다른 이들이 함시혁을 붙잡기 직전,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함시혁을 향해 걸어갔다.
내가 다가가자 함시혁은 반색했다. 내가 자신을 도와줄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지금 상황을 겪어 놓고도 저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오늘 함시혁을 만나고 내가 했던 말 중 그에게 여지를 주거나, 듣기 좋은 말을 한 기억은 없었다.
내가 뭐라고 하든 함시혁은 내게 정을 호소했고, 제 욕망을 내비쳤다.
마치 과정이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는 내가 자신을 받아 주리라는 것을 안다는 듯. 용서가 당연한 사람의 반응이었다.
나는 그대로 손을 뻗어 함시혁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함시혁의 고개가 내 얼굴이 있는 곳까지 떨어지고, 놀란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 왜 불쾌했는지 알겠다.’
나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시혁아.”
막 원래의 세계로 돌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아멜리아를 그저 어리석다고만 생각했다.
자신을 몇 번이고 배신한 사람을 왜 그렇게 사람을 믿었지? 그러나 내게도 놓기 힘든 인연들이 생기고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아멜리아는, 김유정으로 살았던 이는 그저 외로웠던 거다.
원래의 자신보다 나은 상황의 몸에 빙의되었다고 하나, 그래 봤자 남의 몸.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걸 깨닫자 동질감 섞인 연민이 물씬 피어올랐다.
애정을 믿은 사람보단 간절한 믿음을 속인 사람이 나쁜 게 당연했다.
아멜리아가 정말로 함시혁을 사랑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또다시 내 앞에 그 얼굴 보이면 그땐 정말 가만 안 둬. 돈이나 내놓고 다신 내 앞에 얼굴 보이지 마.”
“유정-.”
“농담하는 거 아니야, 시혁아.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는 것을 왜 몰라.”
하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끊어졌다는 것.
그뿐이었다.
* * *
“전 애인인 것 같던데, 예쁜이 무섭네~. 아주 칼같이 끊어 내더라.”
도가빈이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더니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다시금 언급해 왔다. 나는 찻잔을 들다 말고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내렸다.
“그보다 이제 본론이나 들어가시죠? 뭐 때문에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게 나 지금 우진이 집에 와 있는 거지? 와, 예쁜이가 우진이랑 살고 있는지는 몰랐는데. 아, 얼마 안 된 건가?”
본론은커녕 딴소리만 해 대는 도가빈에 이마를 짚었다.
연우진은 타인의 입에서 제 이름이 오가는 와중에도 조용했다.
슬쩍 눈을 굴려 연우진 쪽을 쳐다봤지만, 정작 연우진은 시선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수금 이야기 꺼낼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이더니 어느 순간 음울한 낯을 하고 있더라.
“……일문일답으로 하죠. 가빈 씨도 저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니에요?”
“내가 이미 얻어 낼 만한 정보는 다 얻어 냈으면 어쩌려고?”
“아, 맞다. 정신계 에스퍼였죠? 그런데 이미 다 얻어 냈다면 제게 찾아올 이유가 없잖아요. 필요한 게 있으니까 왔겠죠.”
“글쎄. 그냥 너와 심심풀이로 대화하러 온 거라면?”
“정보를 주고받자면서요.”
연우진이 오기 전 도가빈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도 긴가민가하긴 했다.
정신계 에스퍼고 접촉이 필요하다는 것만 알지, 정작 그 능력으로 내 머릿속을 얼마나 읽었는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 인간은 왜 또 저렇게 삐딱하게 나오는 건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순간, 연우진이 내게 물었다.
“누나, 얻어 냈다는 것은 도가빈과 접촉한 거죠? 얼마나 접촉했어요?”
“길어 봐야 몇십 초……?”
“그런 거라면 괜찮을 거예요. 도가빈의 능력은 기억을 읽어 내는 것이지만,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단시간 내에 전부 읽어 내는 건 무리거든요.”
“그래요?”
“네, 예전이었다면 몰라도 이전 사건으로 인해 능력 부작용도 더 커졌을 거고요.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겠지만, 지금 누나가 가진 정보의 기억이 짧지는 않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연우진은 그러면 저쪽도 일부분밖에 모를 거라며 말을 덧붙였다.
눈앞에서 정보를 털린 도가빈이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안 본 사이에 입이 가벼워졌다, 우진아?”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라고.”
“그거 알아? 지금 네 모습 딱 네가 비웃던 형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은데…….”
“새삼스럽게?”
연우진의 대답에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은 도가빈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하자. 일문일답. 예쁜이 먼저 할래?”
“시작하기에 앞서 서로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하죠. 시간 낭비잖아요.”
“그건 그렇지. 수미 씨도 솔직하게 부탁해.”
도가빈이 고개를 까닥였다. 그의 시선이 짧게 연우진을 스쳤다.
도가빈과 둘만 있는 것은 위험하다며 자리에 참석한 연우진은 우리 둘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었다.
충분히 궁금할 법한데도 묻지도 않는 그가 의아하면서도 고마웠다. 솔직히 지금 나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상태라 다짜고짜 물어보면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한테 줬던 붉은 보석 어디에서 구했어요?”
“E구역 구덩이 아래에서. 분명 그때는 빛났던 것 같은데, 이젠 빛나지 않더라.”
E구역이라면 쿠아 열매 발생지였다. 8년 전 대격변이 일어났던 C구역 근처였고.
“이번엔 내 차례지? 어떻게 게이트에서 돌아올 수 있었어?”
“…….”
“역시 몸이 바뀌어서?”
도가빈이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마치 내 반응을 살피듯 한 시선 속에서 나는 입술만 달싹였다.
도가빈이 읽은 기억 중 7년간의 기억이 있는 게 확실한 것 같다. 하긴 그걸 모르는 이상 다짜고짜 내게 비비안의 물건을 건네주진 않았겠지.
이로써 꿈속 아멜리아의 말이 맞아떨어졌다.
아무래도 헤르만 제국은 이곳의 게이트 중 하나로 존재하는 듯했고, 몸이 바뀌었든 뭐든 나는 한 번 게이트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은 저도 그게 게이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에 했다는 것뿐이에요.”
“최근에? 무슨 계기가 있었기에 그랬을까-.”
말끝을 흐린 도가빈이 소파 팔걸이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의 손은 맨손이 아닌 검은색 가죽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