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최근 E구역에서 일어났다던 파장 변화, 지금 일어난 사태 또한 그때와 비슷하다고 우진 씨에게 들었어요. 자세한 말씀은 지금 드리기 어려우나, 그때 게이트에서 실종되었다던 도이현 에스퍼가 살아 있을 확률 또한 높아요.]
확률이 높다고 말하는 것치곤 거의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다.
특정 한 구역에 다량의 비전조 게이트 발생. 너무나도 낮은 동조율. 몇 달간 계속해서 늘어났던 게이트 발생 수.
그래, 그녀도 그 생각을 하긴 했다. 8년 전 레드 게이트 때와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고.
김유정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권시현의 머릿속에서는 그간 일어났던 일들이 오래전 과거와 겹쳐졌다.
권시현이 오랫동안 현역으로 지내며 깨달은 것 중 하나가 그거였다.
때로는 감이 더 잘 맞을 때가 있다는 것. 일이 벌어진 뒤에는 늦고, 확실한 증거는 대부분 모든 일이 끝난 뒤에나 나타났다.
[만약 정말로 그때와 같다면 E구역은 온전하게 남아 있을 수 없을 거예요.]
“…….”
[실제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욕은 먹겠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다행인 셈이 되는 거고. 벌어진다면 많은 이의 목숨을 구하게 되는 거잖아요?]
어느 쪽 선택이 더 나은지는 불 보듯 뻔하다는 말이었다.
권시현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 순간 비서가 긴급 보고를 받은 듯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길드장님, 지금 E구역 중앙 광장 바닥에 게이트가 생겼다고 합니다. 광장 게이트 측정 결과 동조율이 급속도로 상승하고 있는 이례적인 게이트라고…….”
권시현의 입매가 비틀렸다. 이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당장 E구역에 긴급 대피 공고 내려. 이동, 탐색계 에스퍼들 전부 동원해서 가능한 한 모든 민간인들을 구역 밖으로 이동시켜.”
“네? E구역 전체를요? 하지만 반발이 클 텐데요. 그리고 다른 구역에도 게이트는-.”
“다 함께 뒤지는 것보단 나음. 다른 구역이 게이트로 인해 마물이 나오는 거라면 이쪽은 구역 자체가 게이트가 될지도 모르니까.”
8년 전 역시 그랬다.
C구역에 다량의 게이트 발생. 그럼에도 동조율은 하나같이 낮았다.
그리고 그러한 게이트들의 중앙에 앞서 다른 게이트들과는 달리 동조율이 급속도로 상승하는 게이트가 나타났다.
그건 처음에는 작은 게이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게이트를 도이현 에스퍼가 비집고 열어 버렸고 점점 커진 그 게이트는 끝내 레드 게이트가 되어 도시 하나를 삼켜 버렸다.
C구역에 나타난 레드 게이트는 빠르게 제 영역을 늘리며, 존재 자체만으로 다른 구역의 게이트 발생 또한 촉진시켰다.
파장 오염으로 인해 게이트가 사라진 뒤에도 C구역은 싱크홀처럼 지반이 내려앉아 버리고, 생명이 자랄 수 없는 죽은 땅이 되었다.
이제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높았던 빌딩 몇 개의 끄트머리나 누군가가 버린 자잘한 쓰레기들이 전부였다.
얼마 전 C구역에 나타났다던 검은 새싹을 제한다면 말이다.
권시현은 미간을 구겼다.
“김유정 가이드. 지금 옆에 연우진 있지? 당장 회의 열 거니까 그 자식도 오라고 전해.”
* * *
김유정의 추측대로 E구역 중앙 광장에 열린 게이트는 급속도로 높은 동조율을 보여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파장은 불규칙해졌고, 게이트의 색은 붉어졌다.
게이트는 마치 E구역에 앞서 발생된 다른 게이트를 먹고 몸집을 불리듯 차근히 영역을 넓혀 갔다.
그러나 다른 게이트들과는 달리, 광장에 열린 게이트의 입구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8년 전과 유사한 행보였다.
평화에 잠겨 8년 전의 지옥을 잊고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레드 게이트 경보에 혼비백산했다.
가능한 한 건물 밖으로 나오지 말 것을 공지했으며, 급하게 구역별로 각성자들을 배치했다.
8년 전의 레드 게이트와 같다면 게이트가 완전히 열릴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주어졌다.
급히 모임을 열어 대처를 어떻게 할지 논의할 무렵,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중앙 게이트가 이 이상 더 커질 시 어느 정도 기준을 충족하는 상위 에스퍼들과 가이드 몇만 출전시키는 것으로 하지…… 라던데.”
여럿 각성자들이 모인 가운데, 헤베의 길드 마스터 유주강이 상부에서 내린 지시를 다른 이들에게 전했다.
제 몸 사리는 양반들이었으니 상위 길드 마스터 중 비교적 성격이 온화한 유주강에게 지시 전달을 요청한 것 같았다.
‘그래도 이로운 에스퍼에 다른 센터 상위 각성자들까지 보낸 걸 보면 저쪽도 두렵긴 한가 보네.’
유주강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상부 또한 8년 전의 레드 게이트와 같은 사태가 또 일어날까 두려워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까, 고기 방패로 쓰겠다?”
권시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후. 낮은 숨결과 함께 그녀의 담뱃대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넓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 새끼들은 아직도 우리가 자기들 따까리인 줄 아나 봄?”
“야야, 그냥 무시해.”
기세가 사나워진 권시현을 막은 것은 메시아의 부길마인 하도경이었다. 그러나 하도경 또한 심기가 안 좋아 보이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당연했다. 그들은 8년 전 대격변의 중심인물로서, 한창 센터 측의 권력이 막강할 때 그 아래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산증인들이었으니.
유주강 또한 상위 길드인 헤베의 길드 마스터를 맡고 있긴 하지만 그의 등급은 B로, 다른 상위 길드 마스터들과 견주어 보았을 때 그리 높은 등급이 아니었다.
더구나 유주강이 에스퍼로 발현한 것은 대격변 이후의 일. 권시현이나 하도경과는 달리 그 시기를 에스퍼의 관점에서 겪지 못했다.
‘상부의 행동이 얄밉긴 하지.’
그런 유주강에게조차 상부의 전언이 얄밉게 들리긴 했다.
자신들은 안전한 곳에서 몸을 숨길 테니, 다른 인력은 이곳을 지키게 두고 가고 너희들이 알아서 해결해 봐라. 이런 말 아닌가.
그러나 사감을 제하면 상부의 전언이 마냥 헛소리는 아니었다.
8년 전 대격변 때는 한꺼번에 많은 각성자들이 현장에 투입되었다. 빠른 종결이 최선이라는 판단을 내린 국가의 명령이었다.
게이트 안에 많은 이들을 밀어 넣은 탓인지 레드 게이트의 출입구는 비교적 빠르게 닫혔다.
그로 인해 레드 게이트 안에서 상급 이상의 마물이 나올 위험은 없게 되었지만, 문제는 다른 게이트들이었다.
그때 나타난 것은 레드 게이트뿐만이 아니었다. 전국 곳곳에서 게이트가 발생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게이트를 닫을 수 있는 에스퍼들이 빠져 버린 것이다.
C구역의 레드 게이트 외에 다른 게이트에서 나온 마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고, 남아 있는 각성자들이 막아 보려 했으나 전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유주강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선명했다.
근무 도중 건물이 무너졌다. 동료들이 눈앞에서 마물에게 잡아먹혔고, 거리는 온통 불바다였다.
매캐하고 검은 세상에서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왔고, 그는 대피소를 찾아 쉼 없이 달렸다. 하루하루가 수십 년 같았다.
유주강이 헤베라는 이름의 길드를 만든 것은 그때처럼 그런 일을 겪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어찌 되었든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결정은 내려야만 한다. 그는 이곳에 남아서 다른 민간인들을 지키겠다고 조심스럽게 서두를 열려고 했다.
어느 정도 이름을 들어 본 길드들의 주요 인물들이 모였다. 센터를 비롯해, 소속이 없으나 등급이 높은 유명 각성자들 또한 함께한 자리였다.
그러지 않아도 하나같이 한 성격 하는 이들의 집합체인데 이런 위기 상황에서 분위기가 과열되어 봤자 좋을 건 없었다.
유주강이 그렇게 결론을 내린 참이었다. 누군가가 분위기에 불을 질렀다.
“쫄았으면 됐고. 일단 나는 갈 거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정하든가 해.”
아이고, 윤호야.
유주강은 제 길드원의 팀 킬에 곧장 이마를 짚었다.
권시현이 시선이 서윤호를 향했다.
“지금 뭐라고 했음?”
“귀 안 들려? 뭐든 레드 게이트 들어갈 놈이나 뽑자고. 더 떠들어 봤자 뭐 할 건데. 레드 게이트를 닫는 게 우선 아니야? 그럼 들어가서 쳐부수면 되지.”
“그 레드 게이트에 들어는 가 봤고? 같잖게 입만 잘 텀.”
“허, 그러니까 들어가겠다고. 그리고 당시 레드 게이트에 들어갔던 놈들 대부분 뒈지지 않았던가? 그쪽은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그의 말대로 8년 전 레드 게이트에 들어간 각성자들 중 살아남은 이들은 극소수였고, 그중 아직 현역으로 남은 이들은 더더욱 드문 판이었다.
권시현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던 찰나, 유주강은 재빨리 서윤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형, 뭐 맞는 말이잖-.”
“그래, 윤호야. 처맞을 말이니까 제발 입 다물자.”
우리 애가 성정이 나쁜 건 아닌데 생각이 없어서 미안합니다.
유주강이 사과를 건네자, 권시현은 눈가를 한 번 찡그릴 뿐 그 이상 일을 키우지 않았다.
결국 게이트 안에 들어갈 이들은 몇몇 토론과 참여 의사를 밝히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게이트 안에 들어가지 않은 이들은 밖에 남아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로 했다.
게이트 참여 의사를 밝힌 이들을 살펴보던 권시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허……?”
그녀는 입꼬리를 비죽 올린 채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시선 끝의 이가 인사하듯 눈꼬리를 가늘게 휘었다.
에러의 길드 마스터 이해수.
그의 선택은 권시현의 예상과는 다르게 게이트 외부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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