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 *
얼마 지나지 않아 E구역 레드 게이트가 완전히 열렸고, 출전하기로 한 에스퍼들이 게이트 너머로 사라진 뒤 E구역은 봉쇄되었다.
E구역 주변에는 나 말고도 다른 현장 가이드들을 비롯한 치료계 에스퍼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게이트에서 돌아온 각성자들을 보조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혹시 모를 위협을 대비해 그 밖의 에스퍼들 또한 게이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벌써 2시간이 지났어…….”
대기하던 가이드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한껏 굳어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기다리는 에스퍼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다른 각성자들 또한 점차 커지는 게이트를 두려움에 물든 낯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처음 이로운이 돔 형태의 결계를 칠 때만 해도 막사의 위치는 게이트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2시간이 지난 지금 게이트는 우리 막사 근처까지 올라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붉어지는 게이트의 색에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긴장과 공포가 어렸다.
“언니…….”
조예나가 내 옷소매를 꽉 붙잡았다. 조예나는 게이트 밖에 남는 에스퍼로 배치되었는데 아무래도 이 사태에 겁을 먹은 듯했다.
하긴 에스퍼라고 해도 이온 길드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고, 아직 어리니까 겁이 날 만도 하지.
나는 조예나를 달래 주고자 입을 열었다.
“예-.”
“그 멍청한 개자식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괜찮겠죠?”
……그게 누군데? 곧장 흘러나온 욕 세례에 나는 급히 입을 닫았다.
조예나는 불안해 보이긴 했으나 겁에 질려 있진 않았다. 그저 조금 전 봤던 다른 가이드처럼 누군가를 깊이 걱정하는 듯한 낯이었다.
“자고로 탈출은 지능 순이라고 했는데. 이 멍청이가 제 분수에 안 맞는 게이트에 자원은 왜 해 자원은! 걔 길드 마스터는 새파란 신입 가이드가 레드 게이트에 들어가겠다고 날뛰는 것을 왜 안 막았는데요?”
정정하겠다. 정확히는 걱정에 분노가 어려 있었다.
자원 형태라고 하나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에는 그쪽 최고 책임자가 막을 시 입장이 불가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조예나가 걱정하는 가이드의 길드 마스터는 막지 않고 가이드의 선택을 존중한 듯했다.
“저도 들어가려고 했는데 길마님이 저는 아직 어려서 안 된다고. 아니, 이게 말이 돼요? 자기는 나보다 더 어릴 때 레드 게이트에 들어갔다면서! 안 그래요, 언니? 연우진 에스퍼도 저보다 어릴 때 들어갔었잖아요.”
“그걸 왜 나한테…….”
너를 막은 건 내가 아닌데 왜 나한테 이래.
솔직히 나도 게이트 안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전담 에스퍼에게 거절당한 입장이었던 터라 억울하기만 했다.
시간이 지나도 닫히지 않는 게이트에 기다리던 사람들의 입에서는 초조함으로 물든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런데 왜 게이트가 안 닫히지? 지금 얼마나 지났어?”
“벌써 2시간 넘었어.”
“동조율은?”
“……방금 60% 넘었어.”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의 표정 역시 굳었다.
보통 게이트에서는 동조율이 70% 넘은 순간부터 오염도가 진척되고, 게이트 안의 마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때보다 더 큰 일이 벌어지는 거 아니야?”
누군가가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8년 전 대격변 때는 많은 숫자의 각성자들이 한꺼번에 투입되었다.
레드 게이트는 일정 인원이 들어가면 출입구가 닫혔다. 결과적으로 게이트 밖이 인력난에 시달리긴 했지만, 출입구가 비교적 일찍 닫힌 탓에 레드 게이트 안에서 빠져나오는 마물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게이트는 아직 출입구가 닫히지 않았다. 이대로 동조율이 일정 수치를 돌파해 레드 게이트 안의 마물들이 빠져나온다면 이곳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차라리 도망치는 건…….”
“어디로? 도망칠 곳 따윈 없어. 경비나 제대로 서.”
“X발, 누가 그걸 모르겠냐고!!”
긴장으로 팽팽해진 분위기에 사람들의 심기 또한 날카로워졌다.
나는 힐끗 이로운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결계를 치는 범위가 넓어서 그런지 이로운 또한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나는 이로운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가이딩을 불어 넣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접촉에 대한 거부감이 나아져서 나 말고도 소수의 몇몇 가이드들과는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나, 아무래도 효율은 내가 가장 빨랐으니 말이다.
“로운아, 혹시 막을 수 있겠어?”
내 물음에 이로운이 고개를 내저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이로운이 소란이 일어난 곳을 힐끗 쳐다보고는 내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동조율을 늦추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만, 마물이 나올 경우 완벽하게 막을 수 있을 거란 장담은 못 해.”
“그렇구나.”
“힘내 볼게.”
이로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무리하지 말라고 해 주고 싶었으나, 지금은 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각성자들이 있다고 하나, 대부분이 이로운의 결계만을 믿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구역으로 전력이 분산되기도 했고, 상위 각성자들이 이곳에 남아 있긴 하나 그보다는 가이드나 치료 쪽의 전투에 특화되지 않은 치료 계열 에스퍼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혼자 싸우는 거라면 모를까 지킬 게 있는 사람은 고려할 게 많은 법이었다.
“로운아, 예나야.”
“네?”
두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귀를 가리켰다.
“혹시, 무슨 소리 안 들려?”
“네? 아~ 언니 저쪽이 시끄럽긴 하죠? 이럴 때가 아닌데 어른들이 왜 저러는지…… 제가 정리하고 올까요?”
“조용히 시킬까?”
“아니, 둘 다 일단 진정하고. 내가 말한 소리는 저 소리가 아니라…….”
나는 말끝을 흐리며 주머니 속의 붉은 보석을 매만졌다. 도가빈에게 받았던 비비안의 정령석이었다.
받은 뒤로 온기 하나 띠지 않던 정령석에는 따뜻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광석처럼 지금껏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보석은 레드 게이트가 나타난 뒤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동조율이 높아질수록 더 강한 반응을 보였다. 주머니 속의 보석을 꺼내자 게이트처럼 붉은빛이 눈에 들어왔다.
“언니, 그건 뭐예요? 메시아 길마가 준 아이템? 빛이 게이트로 이어지는 것 같은데…… 뭐 전담 에스퍼 탐색 기능이라도 있는 건가?”
보석을 발견한 조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게 보석의 빛은 게이트가 있는 방향으로 희미하게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령석을 손안에 꽉 쥐며 입매를 비틀었다.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잖아.’
그뿐일까. 레드 게이트가 나타난 뒤로 이명이 들려왔다.
다른 소음들조차도 무시할 정도로 선명한 소리에 혹시 게이트 안에서 들리는 건가 싶어 다른 이들에게 물어보니 다른 이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삐이이익-.
귓속으로 파고드는 기괴한 기계음은 옛날 아멜리아가 되기 직전에 느꼈던 감각과 닮아 있었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조금 숨이 차는 것만 제하면 그때처럼 큰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눈앞에 일렁거리는 거대한 레드 게이트가 나를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환상에 홀리는 것처럼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음에도 그 순간에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누가 부르는 걸까? 꿈속에서 봤던 아멜리아? 이 정령석의 원래 주인인 비비안? 그것도 아니면…….
-「하던 대로 해. 나를 뭐라고 부르든 너라면 괜찮으니까.」
너인가. 레이몬드 마빌 헤르만.
문득 전쟁의 마지막, 막 김유정으로 돌아오기 직전 레이몬드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줄곧 이해가 안 되긴 했다.
레이몬드는 나를 제 아내, 그러니까 황후로 맞기를 원했다.
그게 나인지 아멜리아 캠벨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찌 되었든 레이몬드는 첫인상과는 달리 꽤 괜찮은 전우였고 나름대로 친해진 사람이었다.
그런 레이몬드가 도이현이라는 이곳의 에스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솔직히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당시에는 가볍게 넘겼던 과거의 기억들에서 점점 그럴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받았다.
타인의 파장을 볼 수 있는 에스퍼인 동생 김유하는 나와 아멜리아의 파장이 닮았다고 했다. 그리고 김유하가 도이현과 비슷한 눈을 가졌다는 것을 떠올리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도이현의 눈에는 제 가이드였던 차해연과 우리의 파장이 비슷해 보이는 게 아닐까 하고.
그렇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레이몬드가 내게 유독 친절하게 굴었던 것과 꿈속에서 아멜리아를 차해연이라고 불렀다는 것도.
그러나 나도 아멜리아도 차해연이 아니다. 우리 둘 다 차해연 가이드가 죽었다던 8년 전부터 다른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어찌 되었든 부르는 거라면 가 주는 게 예의겠지.’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가 들어간다고 레드 게이트의 출입구가 반드시 닫힐 거란 보장은 없다.
그러나 저 게이트가 나와 연관이 있는 이상, 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도 어쩌면 내 손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또한 부름을 무시하기보다 따르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고,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완벽하게 안전한 길은 없었다.
이대로 얌전히 동조율이 오르길 기다려봐야 저 흉흉한 레드 게이트에서 마물들밖에 더 나오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이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구역들 역시 동시다발적으로 피해를 입게 될 것이었다.
영웅 심리나 고결한 이념 때문에 나서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걸 가만히 지켜보기 싫었고, 정말 내가 이 일을 해결할 단서 중 하나라면 이런 상황에 뭐 하나 시도도 못 해 본 채 휩쓸리는 것보단 났다고 생각했을 뿐.
“저기-.”
이 사태를 관망만 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비단 나뿐만은 아니겠지.
의견이 비슷한 각성자들을 모아 함께 들어갈 생각으로 슬며시 손을 든 때였다.
나보다 먼저 레드 게이트를 입에 담는 이가 있었다.
“레드 게이트 안에 들어갈 추가 인원을 더 뽑는 게 어떨까요?”
검은 머리의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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