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서일후는 재빨리 비명이 들린 방향으로 달려갔다. 연우진 또한 그를 따라 걸었다. 애초에 그가 왔던 방향을 제하면 현재 길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흡!”
서일후는 바람을 칼처럼 만들어 마물의 목을 베어 냈다. 인간의 팔을 가졌던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에는 인간의 다리를 가진 마물이 보였다.
‘40세? 아니면 50세?’
서일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젊은 여자의 팔 같았던 조금 전과 달리 이번은 나이 든 남자의 다리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목을 자르는 것만으로는 안 됐는지 곧바로 마물이 기다란 팔을 뻗어 서일후의 목을 졸라 왔다.
철퍽. 만들다 만 진흙처럼 검붉은 무언가가 마물의 몸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커헉!”
시체에서 날 법한 역겨운 냄새가 그의 코끝을 찔렀다. 서일후는 마물의 입이 제게 닿기 직전, 큰 바람을 일으켜 마물의 몸을 잘게 쪼갰다.
질척한 덩어리가 사방에 휘날리며 순식간에 복도가 시체 조각들로 인해 난잡해졌다.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다리가 반대편 복도로 날아간 게 보였다. 서일후는 애써 그곳에서 시선을 돌리며 주저앉아 있는 여자를 향해 다가가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허리께까지 굽이치는 은발을 가진 여자였다. 여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겁을 먹은 건가. 달래고자 입을 열려 했으나, 그보다 빨리 연우진의 손이 그들 쪽을 향했다.
“죽일 거니까 비켜.”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 겁먹고 떨고 있는 사람한테!”
“그쪽은 눈이 없나 보지?”
연우진이 턱짓으로 여자를 가리켰다.
서일후는 다시금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는 짙은 색감의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흐트러진 탓에 로브 안이 드러났다.
옅은 하늘색의 레이스 드레스. 게이트 안에서 볼 수 있는 옷차림은 아니었다. 아니, 그전에 이런 옷을 입은 각성자가 게이트에 들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애초에 서일후는 지금껏 이렇게 배워 왔다. 게이트 너머에서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해치워야 하는 적인 마물뿐이라고.
그러니 자신과 같이 건너온 게 아니라면 이 여자는 원래부터 이 게이트 안에 존재해 왔던 이라고 봐야 했다.
서일후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던 그때, 위에서 다시금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지 않았어? 마주치는 마물마다 생김새도 다 다르고, 아직 덜 완성된 것처럼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잖아.”
연우진의 구두가 잘렸음에도 미미하게 바르작거리는 시체 조각을 짓밟았다.
“게이트 너머는 분명 다른 세계였지. 그러면 이렇게 보면 어떨까. 마물화가 덜된 인간의 말로라고.”
“잠깐, 그게 무슨, 인간이라니…… 인간이, 마물일 리가.”
서일후는 한 손을 들어 제 입을 틀어막았다. 마냥 부정하기엔 저 또한 무의식중에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안 비켜? 침잠한 목소리가 물어 왔다. 손끝은 여전히 여자를 향한 채였다.
“……에스퍼? 연우진?”
굳어 있던 서일후가 정신을 차린 것은 주저앉아 있던 여자가 그의 팔을 붙잡고 나서였다.
서일후는 반사적으로 흠칫 팔을 물리려다 이윽고 드러난 여자의 얼굴에 움직임을 멈췄다.
백옥처럼 고운 피부에 유순한 눈매, 길게 나붓거리는 속눈썹은 머리카락과 같은 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 아래 담긴 눈동자는 갓 돋아난 새싹처럼 옅은 녹색이었는데 아름다움에 무딘 편인 서일후 마저 한순간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었다.
누군가를 찾는 듯 여자의 눈동자가 서일후를 벗어나 바쁘게 굴러갔다. 이내 연우진을 발견한 여자가 서둘러 몸을 일으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잠깐, 그쪽은……!’
서일후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연우진의 미간이 좁혀지는 찰나. 여자가 소리쳤다.
“김유정!”
지금껏 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연우진의 눈매가 굳었다.
“뭐야, 너…… 누군데 그 이름을.”
“역시 김유정 씨 아시는 거죠?! 김유정 씨도 혹시 이쪽에 온 건가요? 오지 않았죠?!”
여자가 다급하게 물어 왔다. 여자의 물음에 답한 것은 붙잡힌 연우진이 아닌 서일후 쪽이었다.
“김유정이라니…… 혹시 김유정 가이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름만으로 사람을 특징짓기는 어려운 일이나, 서일후는 이전 비전조 게이트 사건 때 김유정에게 도움받은 전적이 있었다.
같은 센터 소속이었던 이로 인해 죽임을 당할 뻔했을 때 그의 폭주를 막아 준 가이드가 바로 김유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받아 왔던 가이딩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
서일후는 그날 이후로 김유정이 계속 신경 쓰여 동료인 양현우에게 그녀의 안부를 자주 물어보고, 어떻게든 다시 한번 만나고자 했으나 좀처럼 기회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메시아 길드 쪽으로 복무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김유정 가이드가 연우진 에스퍼와 친분이 있나?’
메시아 소속이라니까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어쩐지 조금 의외로 여겨졌다. 소문이나 잠시 본 그의 성미로 보아 세심하게 길드원을 챙길 성격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짧은 사이 연우진의 파악을 마친 서일후는 여자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떨어뜨렸다. 이대로 가다간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이드? 그래, 가이드로 발현해서 연우진 에스퍼와 아는 사이가…….”
“김유정 가이드라면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다.”
서일후의 대답에 여자는 안도인지 한탄인지 모를 한숨을 내뱉더니 이윽고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입술에서 피가 나올 때쯤 여자가 흐느끼며 빌었다.
“에스퍼라면, 부탁드립니다. 제발 이곳을 구해 주세요. 이곳 마물은, 마물들은 원래 사람이었어요. 이곳 성에 있었던 사람들이요!”
“맙소사, 정말…….”
서일후는 난잡하게 널린 조각들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다시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는 이제 울고 있었다.
“구하다뇨? 무엇을 해 달라는 말씀이시죠?”
“‘레이몬드 마빌 헤르만’…… 이 던전의 보스를 죽여 주세요. 분명, 맨 위층에 있을 거예요.”
이상하게도 여자는 잘 알고 있었다.
연우진이나 서일후나. 둘 중 누구 하나 서로의 이름을 입에 담은 적이 없는데도 에스퍼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연우진을 찾아 곧바로 당사자의 앞으로 향했다.
또한 그녀는 이곳이 게이트 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태연하게 던전의 보스가 누구인지를 입에 담았다.
게이트 너머에서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도 경악스러울 일이건만,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하지 않은 게 없었다.
이에 관해 묻기 위해 서일후가 입을 연 순간, 그보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이 있었다.
“-아멜리아 캠벨?”
낯선 이름을 입에 담으며 연우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 * *
“와,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는데요?”
하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에 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그 죽을 것 같은 게 댁이랑 전데?”
그 말대로 모퉁이 세 번을 돌았을 뿐이건만 마물만 벌써 두 번 만났다.
지금까지 만났던 마물들과는 달리 불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각각 형태와 공격 방식도 달랐는데, 첫 번째 만났던 마물은 독을 뿜었고, 두 번째로 만난 마물은 현재 진행형으로 날카로운 발톱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연우진이 주었던 아이템들이 없었으면 진작에 죽었을 거다.
이해수를 믿었건만, 이 인간도 공격 능력이라고 할 만한 능력은 아니라면서 나처럼 아이템을 쓰더라.
차라리 조예나나 민하성이라는 이름의 에스퍼랑 있었다면 좀 더 상황이 괜찮지 않았을까.
나는 그래도 A급 에스퍼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몇십 분 전의 나를 때리고 싶었다.
우리는 마물을 없애지 못하고 적당히 공격하다 틈을 봐 이리저리 도망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도망가는 합은 잘 맞아 다행이었다.
이 인간 다른 건 몰라도 아이템 사용의 능숙함은 나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래도 이상하긴 했다. 솔직히 아이템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마물 대용 아이템을 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에스퍼의 능력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갑자기 아이템에 깃들어 있던 능력이 사라지는 둥 불량품도 많았고, 그런 것치곤 가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마물 하나 잡자고 몇억 대는 가뿐히 넘는 아이템을 구매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탕.
나는 아이템 중 하나인 총을 고쳐 잡았다. 총알 대신 마물용 탄환이 나온다고 하는데 역시 레드 게이트라 그런지 작은 상처밖에 입히지 못했다. 아까는 빠르더니 이번엔 단단한 대신 느린 놈이 나왔다.
그 와중에 이해수가 쓰는 총은 내 것보다 파괴력이 높았다. 연우진이 준 거라 아이템 등급이 높은 것이 분명할 텐데도 나보다 위력이 높다니 대체 어디에서 얼마나 주고 샀기에 그런 걸까.
이 와중에도 아이템 등급보다 얼마인지가 궁금한 것을 보면 나는 이미 그른 모양이다.
“허억…… 헉…… 그런데, 원래 이렇게 마물들이 가지각색이에요? 저번에 봤던 건 안 그랬던 것 같아서요.”
솔직히 내가 근래 게이트에 자주 휘말리긴 했어도 나는 게이트를 닫아야 하는 에스퍼가 아닌 가이드였다. 게이트 안의 마물들의 생태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내 물음에 앞장서서 달리던 이해수가 말했다.
“아뇨! 보통 한 던전에서 나오는 마물들은 일관화되어 있어요. 유정 씨가 이전에 봤던 파충류 형태의 무리처럼요.”
“그런데 여긴 왜 이래요?!”
“글쎄요~ 레드 게이트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아니면 시공간이 불안정해서? 봐요. 꺼림칙하게 생기지 않았어요?”
나는 미간을 좁혔다. 마물 중 꺼림칙하지 않게 생긴 마물이 있긴 할까. 적어도 내가 본 마물들은 죄다 그랬다. 물론 유독 여기 마물 생김새가…… 아.
달리던 도중 다리가 잠시 멈췄다. 무의식의 행동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문득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해수한테 게이트 안에서 파충류 형태의 마물이 나왔다고 얘기했었던가?
나는 고개를 들어 이해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어쩐지 목덜미가 차가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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