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급 자영업자
117화
구속구를 채웠음에도 여전히 스파크가 날뛰며 그의 몸을 감쌌다. 폭주한 에스퍼에겐 두 가지 처우밖에 없다.
첫 번째는 처분당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가이드의 가이딩으로 힘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여러 이유로 전자의 결과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능력이 제한된 동안, 에스퍼들 사이에서는 연우진을 처리할지 아니면 가이드 혹은 약물로 통제할지를 논했다. 어느 쪽이든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다들 가이드로 인한 가이딩은 고려하지 않는 눈치였다. 연우진이 극악의 매칭률을 가졌기도 하고, 무려 최상급 에스퍼였으니까.
S급 에스퍼의 폭주에 휘말릴 수도 있는, 그런 위험천만한 가이딩에 자진할 가이드가 있을 리가 없다고 판단을 내린 거였다.
나는 나를 말리는 손을 놓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연우진 에스퍼의 전담 가이드 김유정입니다. 제가 가이딩 할게요.”
구속구가 머지않아 부서질 것처럼 덜그럭거렸다.
그렇게 연우진은 여러 상위 에스퍼들의 연계하에 최상급 가이딩 룸에 가둬졌다.
상위 에스퍼의 힘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진 가이딩 룸은 웬만한 방공호의 수십 배는 더 견고했다.
철인지 뭔지 모를 단단한 물질로 벽과 천장, 바닥을 이루고 있는 방 안에는 고작 침대 하나밖에 없었다.
말이 가이딩 룸이지 거의 감옥이나 다름없는 황량한 풍경을 앞에 두고, 나는 연우진을 향해 다가갔다.
“우진 씨.”
힘이 통제되지 않는 이상 그에게 남은 것은 처분뿐이었다. 지금도 내가 해결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건물 외부에 상위 에스퍼들이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해결하지 못할 경우, 그 뒤에 이어질 위험 역시 염두에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작 정 따위가 아니니까 이런 거겠지.’
나는 앞서 나를 말리며 도가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연우진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그가 살기를 바랐다.
내가 설령 그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도, 세상을 구했는데 이런 식으로 처분당할지도 모른다니 그건 너무나도 불공평하지 않나.
“우진 씨.”
나는 다시금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가 제대로 듣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손부터 목까지. 보는 사람이 더 답답해 보일 만큼 견고하게 채워진 구속구가 거의 부서져 있었다.
덜그렁, 너덜너덜해진 손목의 구속구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연우진은 겨우 참고 있는 듯했다. 나를 보자 그는 혈관이 솟은 얼굴로 힘을 최대한 억눌렀다. 침대 위 이불을 움켜쥔 손등 위로 힘줄이 솟아올랐다.
견디기 힘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은 똑바로 나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내게 자신을 죽일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폭주 상태의 에스퍼를 안정화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컸다. 내가 감당할 수 없게 될까 봐 걱정한 것이다.
“전 우진 씨 죽게 안 놔 둬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잖아요.”
내 안전을 위해 저를 죽일 것을 종용하는 이를 앞에 두고, 나는 미소 지었다. 살짝 굳은 입꼬리가 비틀린 미소를 그려 내었다.
“내가 당신 가이드라며. 그럼 에스퍼인 당신을 구하는 것도 가이드인 내 몫이지.”
연우진의 몸에서 사납게 튀는 스파크를 무시하며 그의 뺨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억지로 밀어 넣은 혀끝이 더운 입 안을 헤집었다.
죽게 할 수 없다. 어떻게든 살릴 거다.
그런 생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양의 가이딩을 쏟아부었다.
한꺼번에 많은 가이딩이 빠져나간 탓에 순간 눈앞이 일렁거렸으나, 멈추지 않고 가이딩을 그에게 쏟아부었다.
나도 모르게 다리의 힘이 풀려 비틀거린 순간, 연우진이 내 허리를 붙잡았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고, 그의 입술 사이에서 느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살짝 풀린 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쏟아붓는 가이딩만으로는 모자란 듯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내 허리를 덮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는 다시 내 입술에 빈틈없이 입을 맞물려 왔다.
“흣-.”
혀뿌리까지 닿을 정도로 깊게 파고든 혀 탓에 숨이 막혔다.
나도 모르게 손톱을 세워 그의 등을 긁어내렸다. 아플 만도 한데 그는 상관없다는 듯 오히려 더 몸을 밀착시켰다.
가이딩이 쉴 새 없이 빠져나갔다. 가이딩으로 흥분한 탓에 그는 제 쪽에서 가이딩을 가져가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잠, 깐…… 읏.”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공간에 물을 채워 넣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몰아닥치는 쾌감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어쩐지 머리가 저릿한 느낌이었다.
어느새 나는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내 다리 사이에는 그의 허벅지가 끼워져 있었고, 커다란 몸은 마치 나를 뒤덮듯 내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더 달라는 듯 그가 내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목을 핥아 왔다. 더운 숨이 오가고, 두꺼운 혀가 튀어나온 쇄골 쪽으로 내려갔다.
긴 손가락이 재 보듯 내 척추를 천천히 훑어내렸다. 그의 허벅지가 다리 사이로 좀 더 파고들었다. 누르듯 일정하게 이어지는 압박에 나는 입술을 짓이겼다.
장난치듯 내 목을 잘근거리던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누나-.”
목에 댄 채로 입술을 움직인 탓에 숨결이 그대로 닿아 간지러웠다. 나도 모르게 나올 뻔한 신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짓이겼다.
“하고 싶은데…… 해도 돼요?”
마치 재촉하듯 그의 입술이 내 쇄골 위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살짝 고개를 든 채 나를 향하는 시선이 열기에 어려 있었다.
“너무, 너무 좋아요. 누나가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요.”
퍼부어지듯 속삭여지는 애정 어린 목소리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가이딩으로 흥분한 탓인지 그의 눈가가 붉었다. 그와 닿은 모든 부위가 뜨거웠다.
확실히 아직 부족했다. 여전히 그의 몸에서는 스파크가 튀어 올랐고, 나는 가이딩 단계를 높이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아니, 그 전에…….’
나는 손가락을 움츠렸다.
긴 입맞춤으로 인해 입술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가능한 한 또렷하게 대답하고자 턱에 힘을 주었다.
“그, 저도 사랑해요.”
나는 레드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입에 담았다.
열기 탓인지 아니면 방금 한 말 때문인지 얼굴에 순식간에 열이 몰렸다.
단단한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연우진은 들었던 고개를 숙여 내 가슴에 제 머리를 묻었다.
드러난 목에 결 좋은 연갈색 머리카락이 닿아 살랑거렸다. 마치 무언가를 들이키듯 혹은 참아 내듯 나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프지 않게 할게요.”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내 허리를 타고 골반 끝에 닿았다.
* * *
8년 전과 달리 이번 사태는 각 구역에 각성자들이 알맞게 배치된 탓에 사망자도 적었을뿐더러, 어쩌면 일어날 수도 있었던 큰 피해를 미리 막을 수 있었다.
건물 피해는 이전부터 게이트로 인해 겪어 왔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대부분 구역의 보수 대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E구역이었다. 그래도 미리 피난한 덕에 목숨은 건졌고, 센터에서 지원금도 나오긴 했다.
그러나 레드 게이트의 출현 및 이후의 일로 인해 E구역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에 당장 거주가 불가한 상태였다.
대뜸 집이 사라지는 서러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그런 말을 흘린 다음 날, 길드 메시아로부터 추가 지원금이 들어왔다. 센터의 지원 금액보다 몇 배는 더 많은 금액이었다.
나는 메시아 재정이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하도경을 쳐다보았고, 하도경은 이미 포기한 듯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덧붙여 말하자면 레드 게이트를 닫은 탓에 아멜리아와 키센, 비비안은 우리 쪽 세계의 입구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3일 전,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갔다.
정확히 말하면 레드 게이트의 클리어와 연우진의 상태가 안정화되고 반나절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여기에서 살면 어떻게 도와줄지 고민하고 있을 무렵, 키센이 됐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키센은 연우진을 가리키며 저쪽만 좀 도와준다면 가능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헤르만에 마력으로 좌표를 남기고 왔으니 레드 게이트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이라면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 말대로 연우진이 멀쩡해진 뒤, 세 사람은 연우진의 능력과 키센의 마법을 통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갔다.
솔직히 나는 아멜리아라면 이곳에 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그 세계는 마냥 좋은 기억이 아닐 테니까.
그러나 아멜리아는 돌아갈 것을 택했다.
그 이유를 묻는 내게 아멜리아는 이렇게 답했다.
「유정 씨를 만나서 다행이에요.」
「나요?」
「네. 유정 씨 덕분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았어요. 그리고 하고 싶은 것도요. 이번에는 제 손으로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멜리아의 자아실현 촉진에 도움을 준 기억은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아멜리아와 잘 아는 사이가 아니다. 서로의 몸을 빌려 썼을 뿐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사이였다.
뭔진 몰라도 좋은 쪽으로 해결되었나 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잠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야. 이미 할 줄 알잖아. 한세영도 네가 만든 친구니까.」
내 대답에 아멜리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이내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에 나는 슬쩍 눈가를 가렸다. 오랜만에 봐도 확연히 눈부신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시간만 괜찮았다면 한세영이나 김유하 등 아멜리아가 아는 사람을 만나고 갈 수 있길 바랐는데, 안타깝게도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키센은 헤르만으로 이어지는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돌아가야만 한다고 했다.
「그럼 잘 살아.」
「아멜, 너니까 말 안 해도 알아서 건강하게 잘 살겠지.」
「유정 씨! 너무, 너무 보고 싶을 거예요……!」
연우진의 능력을 빌린 키센이 마법진을 그려 헤르만으로 이어지는 공간을 연 직후였다.
정작 오랫동안 얼굴을 보고 지내 온 비비안, 키센과는 깔끔하게 인사한 것에 반해 아멜리아와는 눈물의 이별을 했다.
어쨌든 그게 3일 전의 일이었다.
끝까지 비비안과 다르게 내 본명을 부르지 않는 키센과, 무슨 초상이라도 치르는 사람처럼 울먹이는 아멜리아를 떠올리고는 헛웃음을 짓는데, 불현듯 어깨에 무게가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