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부장님께 어떻게 보고를 올리려나 궁금해서. 주말에 내가 가르쳐 주기는 했지만, 영 아니었거든.”
지화자가 눈웃음을 짓고는 유은영에게 말했다.
“나를 부장이라 생각하고 어디 한 번 보고를 올려 봐, 언니.”
“네? 여기서요?”
“응, 여기서. 남들 눈에는 우리가 서로 보고서 검토하고 있는 줄 알걸? 그러니까 어서 해 봐.”
유은영이 우물쭈물하다가 혹시나 해서 챙겨 왔던 보고서를 꺼내 들었다.
곧장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에 지화자가 그 말을 끊었다.
“유은영 씨.”
“네?”
“내가 말했잖아? 나는 보고 올릴 때, 보고서 보면서 일일이 말하지 않는다고.”
“그치만……!”
지화자가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그치만이 아니야, 언니. 나뿐만이 아니라 현장 파견 부서의 모든 팀장은 보고 올릴 내용은 기본으로 외워. 그러게, 미리 좀 외우지 그랬어?”
외울 시간은 주고 그런 말을 하던가!
주말 내내 서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틈만 나면 센터의 단련실을 찾아가 훈련했다.
유은영이 울상을 지었다.
“언니, 내 얼굴로 그딴 표정 짓지 말라니까? 그리고 아직 점심시간 끝나려면 시간 남았잖아? 핵심만 빨리 외워 봐.”
“말이 쉽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은영은 지화자가 짚어 주는 내용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침, 지나가는 길에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있었으니.
“형님, 저기.”
“응? 어, 팀장님이시네. 옆에 계신 분은 토요일 날에 봤던 분이시잖아? 도대체 누구지?”
가하성과 하태균이었다.
가하성이 A-Index 내의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찾은 정보에 가하성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간호 관리 부서의 ‘유은영’이라는 것 같은데요. 금요일에 일어났던 게이트에 팀장님이랑 같이 휘말리신 분이라나 봐요.”
“아, 그래?”
가하성이 후식으로 나온 사과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단독 공략하셨다더니, 같이 휘말린 분이 계셨었구나?”
“단독 공략은 맞는 것 같아요.”
가하성이 눈앞에 떠올랐던 A-Index의 시스템 창을 끄고는 말했다.
“저분, F급이라고 하네요?”
“오……?”
하태균이 입술을 오므렸다.
“거참, 신기하네.”
“그러게요.”
국내 랭킹 1위의 S급 각성자와 F급 각성자의 조합이라니.
“두 분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는 걸까?”
가하성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같이 휘말렸던 게이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겠죠. 아는 척하지 말고 가요.”
“그래, 하성아.”
하태균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거두고는 걸음을 옮겼다.
팀원들이 자신을 보고 갔음을 알 리가 없는 유은영은 머리를 감싸 쥔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A-Index의 정보에 따르면, 제게 상처입혔던 새로운 충종의 몬스터는 고대의 바퀴벌레…….”
“가 아니라 고대의 포식자. 언니, 왜 그렇게 머리가 나빠? 아니면 바퀴벌레랑 친구 먹었어? 계속 바퀴벌레라고 하네.”
지화자의 비아냥거림에 유은영은 테이블 위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이지, 너무 암담했다.
그래도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 유은영은 아슬아슬하게 보고서의 내용을 외우는 데 성공했다.
“굿. 잘했어, 유은영 씨.”
지화자가 만족스레 웃으며 유은영을 칭찬했다. 유은영은 앓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얼굴을 묻었다.
“그럼, 우종문 부장한테 보고 잘 올려 봐. 전담 어시스트 건도 어디 한번 잘 올려 보고. 과연 그 인간이 받아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 한번 잘한다 싶었다.
유은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지화자 팀장?”
“부, 부장님!”
유은영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화자도 함께 일어나며 현장 파견 부서의 부장인 우종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우종문 부장님.”
“그래, 안녕하신가.”
우종문이 싱긋 웃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일어난 게이트를 함께 공략하고 나온 전우라서 그런가, 그사이에 친해진 모양이군.”
“하하…….”
유은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지화자의 매서운 눈초리에 곧장 손을 내렸지마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지화자 팀장, 오후에 보고 올리러 온다고 했었지?”
“네? 네, 그렇습니다.”
“그냥 지금 같이 올라가서 보고를 듣도록 하지. 어떤가?”
유은영이 두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지화자 씨, 어떻게 해요?’
제게 닿는 시선에 지화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언니가 알아서 하라는 의미였다.
진짜 대책 없는 사람!
유은영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부장님.”
유은영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으로 우종문과 함께 올라갔다.
머릿속으로는 지화자와 함께 외웠던 보고서의 내용을 수십 번 떠올려 보았다. 잊으면 큰일이니까.
그렇게 도착한 부장실.
유은영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우종문에게 보고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상, 금요일에 A-Index의 오류로 예상치 못하게 발생했던 A급 게이트에 관한 보고를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지화자 팀장. 토요일에 발생한 C급 게이트에 관한 보고는 천천히 해도 되니 이만 나가 보게.”
어? 이렇게 나가면 안 되는데?
유은영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부장님, 유은영 씨 관련으로 부탁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음? 지화자 팀장이 내게 부탁이라니.”
우종문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디 한번 들어 보도록 하지.”
휴우, 다행이다. 간호 관리 부서의 민머리 부장이었다면 축객령을 내렸을 텐데!
유은영이 융통성 있는 우종문에게 속으로 엄지를 한 번 치켜들어 주고는 입을 열었다.
“유은영 씨를 제 팀의 전담 힐러로 두고 싶습니다.”
“전담 어시스트 요청인가?”
“네, 그렇습니다.”
우종문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언제는 힐러 따윈 필요 없다고 하더니?”
그래서 0팀에 전담 힐러가 없었구나! 금요일에 일어났던 게이트에 왜 이혜나 팀장이 굳이 왔나 싶었더니!
유은영이 이 자리에 없는 지화자를 속으로 열심히 욕해 주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흐음.”
우종문이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유은영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 F급 힐러를 원하는 건가?”
유은영이 뒷짐 지고 있던 손을 꼭 잡고는 말했다.
“재능을 봤기 때문입니다.”
“재능?”
“네, 부장님.”
유은영이 뻔뻔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유은영 씨께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S급 힐러 못지않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재능이요.”
“호오…….”
우종문이 입꼬리를 올렸다.
“S급 힐러 못지않은 힘이라면, 프랑스의 성녀 아델레이트와 맞먹을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거군?”
아, 그 정도는 아닌데.
하지만 유은영은 이왕 뻔뻔하게 나가기로 한 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우종문은 다시 한번 더 “흐음”하고 고민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 후, 우종문의 입에서 허락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래, 곁에 둬서 잘 키워 보도록 하게. 지화자 팀장, 자네의 눈은 틀린 적이 없으니 말이야.”
앗싸! 성공했다!!
“안 그래도 0팀에만 전담 어시스트가 없어서 조수현 팀장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잘됐군.”
우종문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조수현 팀장이 소식을 들으면 무척이나 기뻐할 거라네.”
“네?”
여기서 1팀의 조수현 팀장의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유은영이 두 눈을 끔벅였다. 우종문은 장난기 어린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어쨌든 보고 잘 들었네, 지화자 팀장. 전담 어시스트 관련해서는 간호 관리 부서 쪽에 이야기해 놓을 테니 기다리고 있게.”
“네, 부장님. 감사합니다.”
유은영이 고개를 꾸벅거리고는 부장실을 나왔다. 그러기 무섭게 마주친 사람이 있었으니.
“어머, 지 팀장?”
2팀의 나혜선이었다.
나혜선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지화자를 쳐다봤다. 그 순간, 나혜선의 두 순에 빛이 감돌았다.
“뭐야, 전담 어시스트 신청했어? 그것도 F급 힐러로?”
유은영은 뒤늦게 나혜선이 부여받은 성언을 떠올렸다. 유은영이 지화자의 얼굴로 눈가를 찡그렸다.
“멋대로 내 머릿속 들여다보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지 팀장이 답지 않게 훤히 드러내고 있었잖아?”
아차!
유은영이 낭패 어린 얼굴을 보였다. 지화자는 유은영에게 나혜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알려 주며 그 힘을 피할 방법을 일러 줬었다.
“그 불여우 만나면, 되도록 시선 마주치지 않도록 해. 그리고 머릿속을 비워.”
“비워요?”
“그래. 그게 쉽지 않으면, 그 불여우 머릿속으로 열심히 욕해. 그럼 알아서 물러날 거야.”
그런데 시선을 피하기는커녕, 두 눈을 똑바로 보며 우종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으니!
‘지화자 씨가 알면 또 한 소리 하겠네.’
절로 눈앞이 까매졌다.
유은영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나혜선은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F급 힐러를 전담 어시스트로 신청했다니. 영웅호걸이 들으면 배를 잡고 뒤집어지겠네.”
영웅호걸.
3팀과 4팀을 이끌고 있는 쌍둥이 팀장으로, 본명은 신영웅과 신호걸이었다.
그들 역시 지화자가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유은영은 불쾌하다는 듯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할 말 없으면 이만 가지.”
“그래. 잘 가, 지 팀장. 폐급 힐러님 오시면 소개 좀 시켜 주고!”
그 폐급 힐러, 당신 앞에 있거든요?! 지화자 씨도 그렇고, 왜 계속 폐급이래!
유은영이 폐급 소리에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였지만, 그녀는 이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0팀의 사무실로 향했다.
나혜선과 대화하면서 지화자를 완벽하게 흉내 낸 것 같아 뿌듯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지화자 씨한테 자랑해야지! 나혜선 팀장님께서 아무런 의심도 안 하셨다고!’
그렇게 유은영이 기분 좋게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다.
“팀장님, F급 힐러 분을 전담 어시스트로 신청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저희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그러시면 어떻게 해요?”
“어……?”
소식 한번 빠르다 싶었다.
유은영이 멋쩍게 목 언저리를 긁적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미, 미안?”
유은영의 사과에 가하성이 얼굴을 찌푸렸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
그야, 그럴 것이 지화자는 ‘사과’라는 개념을 머릿속에서 삭제한 듯한 사람이었다.
유은영은 조심스럽게 가하성의 눈치를 살폈다. 그럴수록 가하성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지는 것도 모르고.
가하성은 할 말이 있는 듯, 유은영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 후로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그렇게 오후 6시.
“먼저 퇴근합니다.”
가하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를 보고 있던 하태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흠, 흠. 저도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팀장님.”
“아니, 잠깐……!”
하태균은 유은영이 붙잡기도 전에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유은영은 어안이 벙벙해져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항상 이혜나 팀장이 퇴근하고 난 후에야 퇴근을 했던 유은영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 하하…….”
유은영이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홀로 남은 부서실에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도 퇴근해야지.”
참으로 길고 길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