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03. 견원지간(犬猿之間)
10월 31일, 일요일 밤.
홍대, 신촌 할 것 없이 모두가 할로윈을 즐기고 있을 때.
“흐어어엉! 내 주말!!”
센터 소속 현장 파견 부서의 0팀은 S급의 시나리오 게이트 공략을 위해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 모여 있는 상태였다.
유은영이 자신의 얼굴로 울상을 짓자 지화자가 질색하며 말했다.
“지화자 팀장님, 누가 보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겠습니다. 그만 울고 인원 확인하시죠?”
지화자는, 아니. 그녀의 몸에 들어가 있는 유은영은 두 눈을 부릅뜨며 제 얼굴을 노려보았다.
황금 같은 주말의 마지막 날이 게이트 공략으로 날아가게 생겼는데 왜 저렇게 태연하담?!
저를 노려보거나 말거나 지화자는 태연했다. 결국, 유은영은 지화자를 노려보는 것을 그만두고 할 일을 빠르게 해치우기로 했다.
“가하성 씨.”
그 부름에 가하성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스콜피언의 세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모였습니다.”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 모인 공략 인원은 0팀을 포함해 총 열아홉 명. 게이트 생성 예정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10여 분 남짓이었다.
유은영이 지화자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지화자 씨, 서이안 씨가 이대로 공략 쌩까면 어떡하죠?”
명단에서 이름을 뺀 것에 불만을 품고 길드원들을 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는 소리였다.
그에 지화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떡하기는. 이대로 우리끼리 공략하러 들어가야지.”
유은영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지화자 씨 말을 괜히 들은 것 같아요. 서이안 씨가 이렇게 옹졸한 사람인 줄 알았으면 그냥 명단에 넣어 놓을걸.”
그에 지화자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언니. 서이안이 보기와는 다르게 옹졸한 녀석이기는 하지만,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는 녀석이거든.”
그러니 아슬아슬하게라도 사람을 보낼 거라고 지화자는 말했다.
하지만.
“이거, 늦어서 미안합니다.”
게이트 생성 예정 시간까지 5분을 남기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에 지화자는 얼굴을 와락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서이안 씨?”
유은영이 멍하니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도 잠시, 유은영이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지화자를 흉내 냈다.
“서이안, 네가 왜 온 거야? 너는 명단에서 빠졌을 텐데?”
“아아, 그게 말이야. 공략에 참가하기로 한 우리 길드원 중 한 명이 웬 사탕을 주워 먹고는 그만 탈이 났지 뭐야?”
“뭐……?”
유은영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서이안은 유은영이 보이는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할로윈이잖아, 할로윈. 트릭 올 트릿(trick or treat). 애들 장난에 어울려 주다가 그렇게 됐어.”
뭐가 그렇게 됐다는 건지 모르겠다. 유은영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서이안을 쳐다봤다.
지화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두 명만 보내면 됐을 텐데요. 서이안 씨.”
서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분명, 저 폐급 힐러가 지화자한테 내 이름을 빼라고 종용한 게 분명해.’
순간 지화자가 남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거나 서이안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F급 힐러에게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말이야. 괜히 두 명만 보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 S급 게이트잖아, S급.”
유은영이 미간을 좁히며 지화자를 흉내 냈다.
“S급이라도 해도 시나리오 게이트야. 공략에 어려움은 겪겠지만 위험도는 낮을 텐데.”
그걸 모를 리가 없는 서이안이었다. 스콜피언의 독주가 비웃음을 흘렸다.
“내가 좀 안전 염려증이라.”
“지랄하네.”
유은영이 황급히 지화자의 입을 가로막았다. 서이안은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가 싶어 두 눈을 끔뻑였다.
“지금, 저게 뭐라고…….”
“우리 유은영 씨가 길드원을 생각하는 네가 너무 멋지대.”
지화자가 유은영을 향해 미쳤냐는 눈빛을 보냈다. 유은영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다행히도 타이밍 좋게 게이트가 생성됐다.
“팀장님, 서이안 길드장님! 두 분 다 그만하시고 게이트 공략하러 들어가시죠?”
가하성이 다급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유은영이 한숨을 내쉬며 지화자의 입을 놓아주었다.
지화자가 한껏 찌푸린 얼굴로 입가를 닦아 내고는 유은영에게 속닥거리며 물었다.
“언니, 내가 시나리오 게이트에 대해 가르쳐 준 거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네, 성가시기로는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했잖아요.”
“그래, 잘 기억하고 있네.”
지화자가 기특하다는 듯이 웃고는 말했다.
“어떤 필드(Field)가 펼쳐질지 몰라. 퀘스트가 어떤 형식으로 주어질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긴장하라는 소리였다.
유은영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뻣뻣하게 굳은 몸에 지화자가 비웃음을 흘렸다.
“긴장 풀어, 유은영 씨. 설마 죽기야 하겠어?”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몰라요?!”
“응, 몰라. 그러니까 어서 들어가기나 하세요. 지화자 팀장님.”
스물한 명의 공략 대원 중, 유은영과 지화자만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유은영이 크게 숨을 내쉬고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곧장 두 눈을 향해 밝은 빛이 쏟아졌다.
“윽……!”
유은영이 황급히 손을 들었다.
그녀는 지화자에게 시나리오 게이트란 게 원래 이런 식으로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드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님! 총사령관님!!”
지화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눈앞에 나타난 건, 웬 남자였다.
* * *
유은영이 당황하며 물었다.
“저요?”
“예, 총사령관님. 그간의 전투가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아, 하하.”
시나리오 게이트는 대개 ‘역할’이란 것을 받아 움직이게 된다더니.
[각성자, ‘지화자(유은영)’에게 ‘총사령관’의 역할이 배정되었습니다.]
들어와 있는 몸뚱이가 랭킹 1위, S급 각성자라서 그런 걸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지화자 씨는? 다른 분들은 어디 계시는 거지?’
암만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지가 않았다. 결국, 유은영은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물었다.
“다른 분들은 어디에 계시나요?”
“총사령관님께서 직책을 내려 주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직책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유은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이었다.
[각성자, ‘지화자(유은영)’는 ‘총사령관’으로서 역할을 배정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유은영의 앞에 시나리오 게이트 공략에 뛰어든 스물한 명의 이름이 나타났다. 또한, 그녀가 정해 줘야 할 ‘역할’ 역시 나타났다.
책사: 1명
장군: 4명
병사: 16명
유은영이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그러니까 책사랑 장군, 그리고 병사를 내가 직접 정해 줘야 한다는 거지?’
왜 하필 자신이란 말인가!
유은영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게이트 공략을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사람들에게 역할을 배정해 줘야 했다.
“머… 먼저 책사에 지화자 씨를, 아니. 유은영 씨를…….”
유은영이 횡설수설하며 지화자를 책사로 정했다. 그러자마자 하얀빛이 터지는가 싶더니 막사에 지화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화자 씨!”
“안녕, 유은영 씨. 유은영 씨가 역할을 배정해 주고 있었나 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유은영이 울상을 지었다. 지화자는 그녀와 다르게 웃는 낯이었다.
“나한테 제일 먼저 역할을 부여해 준 거야, 언니?”
“네, 그래야…….”
욕을 안 먹을 것 같아서요.
유은영이 목에서부터 치밀어 오른 말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잘했어, 언니.”
지화자가 유은영을 칭찬해 주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남은 인원 열둘이지? 열두 명한테 모두 역할을 배정해 줘야 해?”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유은영은 말했다. 열둘을 셋과 아홉으로 나누어 장군직과 병사직으로 나눠 줘야 한다고.
“퀘스트는? 퀘스트는 아직 안 받았어?”
“네, 아직이요. 아무래도 역할이 모두 배정된 후에 퀘스트가 나올 것 같아요.”
“흐음.”
지화자가 아래턱을 한 번 만지작거리고는 말했다.
“장군직에는 하태균과 아레아의 남이선, 그리고 스콜피언에 새로 들어왔다는 A급 각성자인 서도운을 앉혀.”
“가하성 씨는 병사로 보내요?”
“응, 가하성은 우두머리로 누구를 이끌 만한 녀석이 아니야. 차라리 병사로 둬서 혼자 움직이게 하는 게 나아.”
“서이안은요?”
“언니가 원하면 서도운 대신 서이안을 장군직에 앉혀.”
그에 유은영이 말했다.
“병사로 보내는 게 좋겠네요. 서이안 씨도 누구를 이끌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거든요.”
서이안.
대한민국에서 탑을 달리고 있는 길드의 주인이 들었다면 코웃음 칠 소리였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서이안은 없었다.
“어디 보자, 하태균 씨나 남이선 씨 밑으로 보내면 분명 지랄할 것 같으니까…….”
고민하는가 싶던 유은영이 곧 남은 사람들에게 역할을 내렸다.
장군: 하태균(센터, A)
병사: 분하평(도원결의, B), 서문진(JBJ, C), 김준현(라이프, B), 이은성(도원결의, B)
장군: 남이선(아레나, A)
병사: 안시후(아레나, C), 도이준(아레나, B), 이하나(스콜피언, A), 김하운(아레나, B)
장군: 서도운(스콜피언, A)
병사: 서이안(스콜피언, S), 가빛나(아레나, B), 가하성(센터, A)
장군: 도하준(청해, A)
김진하(청해 C), 이나라(JBJ B), 한소은(태극, A), 소연진(광명, B)
“이렇게 하면 되겠죠?”
“가하성을 서도운 밑으로 보냈네? 하태균 밑으로 보내는 게 더 좋지 않아?”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유은영이 우물쭈물 지화자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지화자 씨가 그러셨잖아요, 가하성 씨는 혼자 움직이게 하는 게 낫다고. 그래서 이렇게 했어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아서?”
“네, 사실 처음에는 서도운 씨 밑으로 이하나 씨를 보낼까 했는데 그럼 전력에 차이가 날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가하성 씨를 보내면 또…….”
“혼자서 움직일 수 없게 되겠지. 아레나의 길드원들은 힘쓰는 건 젬병이니까 말이야.”
그들을 지키느라 진이 빠질 게 분명했다.
유은영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었다.
“바꿀까요, 지화자 씨……?”
“바꾸기는 뭘 바꿔. 이대로 가자, 언니.”
지화자가 씨익 웃었다. 부족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적절하게 인원을 배치했다.
더군다나 지화자는 유은영이 공략 대원들이 가진 능력을 하나하나 고려해서 팀을 꾸린 것을 알아차렸다.
즉, 유은영은 공략 대원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는 말씀.
‘오, 제법 전략도 짤 줄 아네? 그냥 멍청한 줄 알았는데.’
지화자가 키득거렸다.
“왜 그렇게 재수 없게 웃어요?”
“시끄러워, 언니. 역할 배정은 모두 끝났어?”
“네.”
곧 곳곳에서 하얀 빛무리와 함께 공략 대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내가 병사라니! 장난해?!”
서이안의 발광이 시작됐다. 자신이 병사가 됐음을 알게 된 서이안이 자신의 장군인 서도운의 멱살을 잡았다.
“서도운! 당장 그 자리 나한테 넘겨!”
라는 소리를 내뱉자마자 서이안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이… 이게 무슨……?”
“병사는 장군에게 거역할 수 없는 모양입니다, 길드장님.”
서도운이 서이안을 내려다보며 친절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서이안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리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야! 지화자!!”
라고 소리 지르기 무섭게 이번에는 고개가 힘없이 조아려졌다. 그 위로 스콜피언의 루키, A급 각성자 서도운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또한, 총사령관님께도 거역할 수 없는 모양이고요.”
“이런 미친!”
서이안이 힘겹게 고개를 들며 빽빽 외쳐 댔다.
“지화자! 나를 병사로 만든 거 후회하게 될 거다!”
지화자는 서이안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몸에 들어가 있는 유은영도 마찬가지.
두 사람은 내려온 퀘스트를 확인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마왕 성을 함락시켜야 한다는군요. 마왕 성이 등장하는 걸 보니 마족과 전투를 치를 확률이 높을 것 같네요.”
“그러니까 이종족과 전투를 치러야 한다는 거죠?”
“네, 지화자 팀장님.”
지화자가 유은영을 향해 존댓말 좀 고치라는 눈빛을 보냈다. 유은영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누구, 마왕 성이 어디 있는지 아는 분?”
모두가 자신들이 그걸 알겠냐는 얼굴을 보였다.
그때, 유은영 앞에 처음 모습을 보였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마왕 성은 동북으로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총사령관님.”
“아, 그래요?”
유은영이 지화자와 함께 막사 밖으로 나왔다.
“우와!”
남자의 말대로 높게 치솟아 있는 커다란 성이 보였다.
“진짜 높다!”
유은영이 그렇게 감탄하는 사이 지화자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저걸 함락시켜야 한다고?’
현실로 따지면 족히 50층은 넘어 보이는 성이었다.
‘아래층을 무너뜨리면 자연스럽게 무너지겠지마는 말이지.’
문제는 마왕 성에 있을 자신의 적들이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두겠냐는 거다.
그때, 유은영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다른 병사는 없나 봐요?”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다른 병사들은 후방을 경계 중입니다.”
“그래요?”
유은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만 봐도 우리뿐인데?’
더군다나 누군가 있던 흔적 역시 보이지가 않았다.
마치, 이건…….
“만들어진 무대 같네.”
별생각 없이 중얼거린 유은영의 목소리에 남자가 날카롭게 두 눈을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