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날이 밝은 날, 유은영은 센터가 아닌 스콜피언을 찾았다. 물론, 그곳의 주인인 서이안은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그야, 유은영은 지금 ‘지화자’였으니까.
“뭐야?”
날 선 목소리에 유은영이 이제는 퍽 익숙해진 모양새로 지화자를 흉내냈다.
“어제 말해줬던 의뢰, 그것 좀 확인하러 왔어.”
“네가 직접?”
“그래.”
그 대답에 서이안이 픽 웃었다.
“네 똘마니 중 하나를 보낼 줄 알았더니.”
“안 그래도 유은영 씨를 보낼까 했는데 그랬다가는 우리 서이안 길드장님의 혈압이 걱정돼서 내가 직접 왔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서이안이 이를 으득 갈았다. 하지만 눈앞의 빌어먹을 ‘지화자’는 그런다고 겁에 질릴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서이안은 제 옆에 있던 보좌관에게 말했다.
“나하진이란 이름으로 들어오는 의뢰 있지? 그것 좀 가지고 와.”
“네, 길드장님.”
보좌관이 후다닥 서류를 가지러 자리를 떠났다. 곧, 그가 한아름의 서류 뭉치를 가지고 돌아왔다.
“자, 확인해 봐.”
유은영이 서류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서이안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재잘거렸다.
“어제 말해줬던 그대로야. 암만 사람 죽이는 의뢰는 안 받는다고 해도 꾸준하게 너희 팀원을 죽여 달라는 의뢰를 보내서 아주 처치 곤란이라고.”
“제한을 걸면 될 것을.”
“이미 진작 걸었지!”
서이안이 빼액 소리 질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겠는데,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 쪽에 의뢰를 넣고 있다고. 이건, 뭐 제한을 건 의미가 없을 정도야.”
골치 아프다는 듯 말하는 목소리에 유은영이 말했다.
“여자야.”
“뭐?”
“나하진, 여성분이라고.”
유은영이 서류 뭉치를 챙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고맙다. 이건 내가 좀 가지고 가도 되지?”
“되기는 뭐가 돼?”
서이안이 어림도 없다는 듯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유은영은 가볍게 그의 손길을 뿌리친 뒤 입을 열었다.
“우종문 부장님으로부터 선지자들에 대해 들었다며? 참고 자료로 들고 갈 테니 그렇게 알도록 해.”
서이안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쨌거나 ‘선지자’는 자신들에게도 골치 아픈 녀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유은영이 스콜피언 측에서 넘겨준 자료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야, 지화자.”
서이안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너…….”
할 말이 있는 듯, 그녀를 불렀던 서이안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실없기는.”
유은영이 픽 웃고는 몸을 돌린 그 순간.
“잠깐만.”
“또, 뭐?”
“그냥, 이렇게 만난 거 그냥 좀 물어보게.”
“어제 물어봤으면 됐을 것을?”
“제발 일일이 태클 좀 걸지 말지? 그리고 어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날이잖냐!”
“나는 아니었는데?”
“어쨌든!!”
서이안이 빼액 소리 질렀다. 유은영은 지화자의 얼굴로 그를 한껏 비웃었다.
‘서이안 씨, 놀리기 참 좋은 사람이라니까?’
유은영이 그렇게 생각하며 키득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유은영이란 폐급 힐러.”
서이안의 입에서 언급된 자신의 이름 때문이었다. 서이안이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지화자’를 향해 물었다.
“그 녀석, 도대체 뭐냐?”
유은영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재잘거렸다.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는 걸까? 너 설마 우리 유은영 씨께 관심이 생겼다거나 그런 거야?”
“그럴 리가 있겠냐?!”
서이안이 미쳤냐는 듯이 굴었다.
“그냥 네 숨겨진 언니라도 될까 물어봤다, 왜!”
내가 지화자 씨의 숨겨진 언니일까봐 물어봤다고?
유은영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보였다.
“서이안 길드장님, 아니. 서이안 씨, 미안하지만 센터에서 힐러 한 번 더 불러줄까?”
“뭐?”
“아무래도 백도진한테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거든. 그러지 않고서야 나한테 숨겨진 언니가 있다느니 뭐니 그런 소리를 할 리가 없지.”
“나도 그냥 해본 소리거든?!”
서이안이 빼액 소리 지르고는 손을 휘휘 저었다.
“아오, 그만 나가! 꺼져!”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
경쾌한 인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서이안은 금붕어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소리 질렀다.
“진짜 싫어, 지화자!”
그 소리를 들었는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유은영의 입가에는 미소가 만발해있었다.
***
유은영은 스콜피언에서 받아온 서류를 팀원들과 공유했다.
의뢰의 대상인 하태균을 비롯해 그와 친한 가하성, 그리고 그들을 잘 따르게 된 라이와 리아 등 0팀의 팀원들의 낯빛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단, 한 명.
“스콜피언 길드에게 의뢰를 맡으라고 하죠.”
‘유은영’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녀의 말에 가하성이 잘못 들었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스콜피언 측에서 맡으라고 하세요, 이 의뢰.”
“유은영 씨!”
가하성이 버럭 소리 질렀다.
“제정신이에요?”
“네, 제정신으로 하는 말입니다.”
유은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에게 내려온 선지자들의 정보 가운데 그나마 신원이 확실한 사람이 나하진 씨뿐이잖아요?”
그 신원도 이름과 성별만 확실할 뿐, 어디에 살고 있는지 연락처는 또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화자 팀장님, 하태균 씨와 함께 잘 생각해보도록 하세요. 저는 이만 가하성 씨와 함께 3팀과 4팀의 합동 훈련에 참가해봐야 할 것 같으니까요.”
가하성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지화자는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죠, 가하성 씨.”
“지금 가자는 소리가 나와요?”
“네.”
가하성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눈앞의 폐급 힐러를 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살벌해진 분위기에 유은영이 앓는 목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가하성 씨, 가보도록 하세요. 3팀과 4팀의 합동 훈련에 늦으면 안 되잖아요? 그리고, 저. 유은영 씨의 말대로 움직이지는 않을 생각이거든요.”
왜인지 안심이 되는 말이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가하성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유은영’은 기다리지도 않고 말이다.
지화자는 닫힌 문을 물끄러미 보다 0팀의 팀원들에게 말했다.
“저도 이만 다녀올게요.”
그러고는 사무실을 나가버리는 지화자였다. 유은영은 그녀가 나가자마자 하태균에게 말했다.
“하태균 씨, 유은영 씨의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아닙니다.”
하태균이 단호하게 말했다.
“유은영 씨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유은영이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아와 라이도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안 돼! 그럼 위험하잖아!”
“맞아요! 태균 형님, 그러다 스콜피언인지 뭔지가 형님을 정말로 죽이면 어떻게 해요?!”
“애들 말이 맞아요. 더욱이 스콜피언 길드는.”
“사람을 죽이는 의뢰 따위 받지 않는 곳인 거 압니다. 그러니까 부탁하자는 겁니다.”
하태균이 결의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하진 씨도 알고 있을 겁니다. 스콜피언 길드가 사람을 죽이는 의뢰 따위 받지 않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팀장님.”
하태균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나하진 씨께서 정말 스콜피언 측에만 그런 의뢰를 보내고 있는 거라고 생각 합니까?”
유은영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있다 입을 열었다.
“라이, 리아.”
“네!”
사이 좋은 남매가 동시에 대답했다. 유은영은 둘에게 물었다.
“이제 업무는 대충 이해했죠?”
“네! 이제 컴퓨터도 잘 다룰 줄 알아요!”
“맞아! 나 액셀 잘해! 서치도 잘해! 하성이 오빠한테 A-Index 해킹하는 법도 가르쳐달라고 했어!”
그건 배우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유은영이 픽 웃고는 두 사람에게 부탁했다.
“그럼, 각 길드에게 공문을 하나 보내주겠어요?”
“어떻게요?”
라이의 물음에 유은영이 친절하게 알려줬다.
“지화자 팀장의 아래에 있는 팀원, 하태균을 죽여 달라는 의뢰를 받은 길드는 좋은 말로 할 때 손을 들어주기를 바란다고.”
말이에요.
덧붙여 말한 목소리에 라이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나도 알겠어!”
리아가 그 뒤를 이어 말했다. 곧 두 사람은 새롭게 마련된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와 리아가 재잘거렸다.
“누님, 그런 의뢰를 받았다는 길드가 열 곳이 넘는데요?”
“나도! 공문 보낸 길드에서 그런 의뢰 받은 적 있다면서 숨길 생각은 없었으니 와서 깽판은 치지 말아 달라는 답이 왔어!”
도대체 세간에, 특히 각성자들 사이에서 ‘지화자’는 어떤 사람으로 퍼져 있는 걸까?
어쨌거나 유은영은 하태균에게 물었다.
“하태균 씨, 그간 누군가로부터 위협받은 적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그 말에 유은영의 두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수십 곳에서 들어간 ‘하태균을 죽여 달라’는 의뢰.
그러나 그 의뢰는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바로, ‘지화자’라는 든든한 보호막 때문에.
‘이분들께 있어서는 지화자 씨가 가장 강력한 보호막이었구나?’
유은영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유은영 씨의 말대로 하죠.”
“네?”
“스콜피언에게 나하진 씨께서 보내는 의뢰를 받아 달라고 부탁하자는 거예요. 하지만, 연극을 벌이는 것뿐입니다.”
“연극… 말입니까……?”
“네.”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하태균 씨, 나하진 씨께서는 어떤 분이셨나요?”
“나하진 씨께서는 조용하신 분이셨습니다. 호탕했던 지하 녀석과는 참 다른 분이었죠.”
말하는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그렇다면 좋아요. 우리, 완벽한 연극을 벌이도록 해봐요.”
“연극이 뭔데요?”
“맞아, 연극이 뭔데?”
라이와 리아의 물음에 유은영은 ‘연극’에 대해 알려주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라이 씨, 리아 씨.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거미줄에는 독성이 묻어 있죠?”
“네, 그래서 친구들이 많이 아파했어요.”
“맞아, 그런데 그건 왜?”
리아의 물음에 유은영이 다시금 물었다.
“그 독성,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나요?”
라이와 리아가 서로를 쳐다보고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응!”
“좋아요. 자, 그럼.”
유은영이 두 눈을 휘게 접었다.
“스콜피언의 서이안 길드장님을 한 번 불러볼까요?”
그를 백도진으로부터 구해준 은혜, 그 빚을 아무래도 지금 얻어내야 할 것 같았다.
***
다행히도 서이안은 연락하기 무섭게 센터에 찾아왔다.
“야! 지화자! 장난해?! 내가 무슨 네 개야?”
0팀의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서이안이 짜증을 부렸다. 그에 유은영이 웃었다.
“네가 내 개라니.”
사과라도 하는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개한테 사과해.”
“너어……!”
서이안이 주먹을 꽉 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곧, 그는 인내심을 발휘해 화를 참고는 물었다.
“그래서 뭐야? 왜 불렀어?”
“의뢰 좀 하려고.”
그 말에 서이안의 입꼬리가 비딱하게 올라갔다.
“잘나신 랭킹 1위께서 의뢰라니? 이거 황송해서 못 받겠는데?”
“받아야 할걸?”
유은영이 씨익 웃었다.
“나보다 더 전국민의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는 랭킹 2위, 서이안 씨께서 나한테 도움을 받았잖아. 아니야?”
“으윽……!”
“그 빚을 안 갚으려고?”
유은영이 능글맞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결국, 서이안이 빼액 소리 지르며 물었다.
“내가 그래도 네가 시키는대로 할 것 같아?! 그래서 우리한테 무슨 의뢰를 맡길 건데?”
결국, 유은영의 의뢰를 받는다는 소리였다.
유은영이 입가에 걸쳤던 웃음을 지우고는 말했다.
“하태균을 죽여 달라고 들어오는 그 의뢰, 받도록 해.”
“뭐?”
서이안이 당황하여 물었다. 유은영은 당혹감이 가득한 얼굴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너희는 하태균을 죽이는 시늉만 하는 거야. 한 마디로 잘 짜여진 각본대로 연극을 펼치자는 거지.”
“그러는 이유는?”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선지자를 잡기 위해서지.”
유은영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는 이 의뢰를 계속 보낸 나하진 씨께 연락해.”
“연락이 됐으면 진작 했지! 의뢰와 함께 오는 주소고 전화번호고 뭐고 맞는 게 하나도 없는 녀석한테 어떻게 연락해?”
“그냥 해.”
유은영은 정말 ‘지화자’에 빙의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지금까지 의뢰와 함께 온 주소와 전화번호에 모두 연락을 넣으라고. 그 중 하나는 얻어 걸리지 않겠어?”
남의 일이라고 아주 막 말하는 것 같다.
서이안은 기가 차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은영은 말했다.
“자, 그럼. 우리 어디 한번 어떤 식으로 연극을 펼쳐볼지 이야기 좀 나눠볼까?”
유은영이 ‘지화자’의 얼굴로 싱긋 웃었다. 서이안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정말이지, 지화자가 봤다면 자신을 아주 완벽하게 흉내를 냈다며 잔뜩 칭찬해줬을 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