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죽일까?’
라고 생각한 건, 유은영과 함께 윌던 기업 일가를 맞이하러 나온 유승민이었다.
옆에 있는 여자가 정말 ‘지화자’였다면 이런 생각따위 하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옳소!”를 외쳐되며 로렌치니 윌던의 말에 동의했겠지.
하지만 지금 ‘지화자’의 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인 유은영이었다.
유승민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지화자’를, 아니. 유은영을 흘긋거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인지 모를 표정.
로렌치니 윌던은 그런 그녀의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야, 벙어리야? 왜 말이 없어?”
“로렌치니!”
보다못한 엘리자베스 윌던이 나섰다. 그러나 로렌치니 윌던은 ‘지화자’를 도발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고모. 보세요, 싸가지 없게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걸요? 어떻게 환영 인사도 안 해? 한국의 랭킹 1위가 벙어리란 소리는 못 들었는데 말이에요.”
재잘재잘 잘도 나불된다.
유승민이 두 주먹을 꽉 쥐는 순간, 유은영이 ‘지화자’의 얼굴로 한껏 웃으며 조롱했다.
“로렌치니 윌던 씨의 환영 인사가 조금 거칠어서 말이 안 나왔네요. 이것 참 죄송합니다.”
“웟……!”
로렌치니 윌던이 부들부들 떨었지만 유은영은 그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말했다.
“어쨌든 환영합니다, 엘리자베스 윌던 씨.”
유은영이 로렌치니 윌던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지나쳐 가, 엘리자베스 윌던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 윌던이 작게 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손을 꼭 맞잡았다.
“내 조카의 무례를 너그럽게 용서해줘서 고맙다네.”
“별 말씀을요. 이쪽은 제 파트너, 유승민 씨입니다.”
유승민이 유은영의 소개에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한국에 방문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엘리자베스 윌던 씨. 그리고 로렌치니 윌던 씨와.”
“마리사에요.”
“네, 마리사 씨.”
로렌치이 윌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그의 파트너가 수줍게 인사했다.
유승민이 그녀를 향해 싱긋 웃고는 입을 열었다.
“우선, 점심부터 드시죠. 윌던 기업에서 예약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귀빈 맞이가 끝났다.
유은영이 유승민의 업무용 차에 올라타고는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런 그녀를 유승민은 칭찬했다.
“은영아, 잘 참았어.”
“지화자 씨였다고 해도 나처럼 참았을걸?”
“그래?”
“응.”
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화자 씨가 암만 싸가지 없고 성격이 파탄난 사람이라고 해도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더라고.”
유은영은 센터에서 열심히 업무를 보고 있을 지화자를 떠올리며 재잘거렸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 망할 자식의 가랑이 사이를 차버렸을걸?”
“그냥 차버리지 그랬어.”
“오빠!”
유은영이 빼액 소리 질렀다.
“윌던 기업이 사업차 한국에 온 거 몰라? 그런데 내가 로렌치니이니 뭔지하는 자식의 가랑이 사이를 차버렸어봐!”
암만, 콧대 높은 줄 모르고 오만하게 구는 조카 녀석이라고 해도 엘리자베스 윌던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할 터.
“오빠, 정말 청와대 소속인 거 맞아? 어떻게 하나를 알고 둘은 몰라?”
설마, 동생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유승민은 가슴은 부여잡고 싶은 심정을 애써 억눌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은영은 태연하게 물었다.
“그보다 점심은 어디서 먹어?”
“서울에서 가장 비싼 곳. 윌던 기업에서 가게를 통째로 빌렸다고 하더라고.”
“정말? 경호하기에는 쉽겠네.”
“경호는 점심 이후야.”
그 말에 유은영이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유승민에게 물었다.
“혹시, 그 말. 윌던 일가와 함께 점심을 먹어야한다거나 그런 거 아니겠지?”
“정답, 우리 은영이 똑똑하네.”
똑똑하고 자시고!
유은영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악! 싫어! 차라리 경호를 서고 말지! 아니, 그냥 이혜나 팀장님이랑 단 둘이서 밥을 먹고 말겠다!”
유은영을 사내 왕따시키는 데 한 몫 단단히 한 주범, 간호 관리 부서 팀장의 이름이 나오자 유승민이 밝게 말했다.
“그 사람, 우리 은영이 상사 맞지? 어때? 잘해줘?”
“잘해주기는 개뿔! 그보다 나는 이제 0팀의 전담 어시스트거든?!”
“아니, 나는 그 전에, 그러니까… 지화자 팀장님이랑 몸이 바뀌기 전에 잘 해줬냐고 물은 건데…….”
유승민이 우물쭈물하며 금붕어처럼 입술을 내밀었다.
어쨌거나 윌던 기업이 통째로 빌린 가게에 도착했다.
유은영은 유승민과 나란히 내려 엘리자베스 윌던 쪽으로 향했다.
유은영이 꿀꺽 침을 삼켰다.
엘리자베스 윌던에게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끼 때문이다.
‘이 가게, 윌던 기업이 고른 곳이라고 했지? 안목이 훌륭하다고 해야 하나?’
유은영이 그렇게 머리를 굴릴 때, 유승민이 나섰다.
“이곳, 한국에 방문하실 때마다들르는 곳이죠?”
“맞아죠. 제 입을 사로잡는 가게는 흔치 않은데, 이곳은 이탈리아에 돌아가서도 가끔 생각날 정도로 맛있는 곳이더군요.”
“그럴 수밖에요. 이곳의 셰프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거든요.”
“그랬나요? 그건 몰랐던 사실인데, 기회가 된다면 우리 집안의 요리사로 고용하고 싶네요.”
유승민이 화기애애하게 엘리자베스 윌던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유은영은 그런 그를 보며 속으로 나이스를 외쳤다.
그렇게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깔끔하게 차려입은 종업원이 다가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환영합니다, 룸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엘리자베스 윌던이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렌치니 윌던은 파트너로 데리고 온 마리사와 팔짱을 낀 채 껄렁거렸다.
“오, 가게 깔끔하네요? 우리 온다고 열심히 청소했나 본데?”
“이곳은 원래 청결을 제일 우선으로 한단다, 로렌치니.”
“그래요?”
로렌치니 윌던이 그러고는 퉤, 침을 뱉었다.
그런데 그렇게 뱉은 침이.
“아, 실수. 바닥에 뱉으려고 했는데 우리 한국의 자랑스러운 랭킹 1위님의 신발에 뱉고 말았네?”
‘지화자’의 구둣발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로렌치니!”
엘리자베스 윌던이 분노하여 조카를 불렀다. 로렌치니 윌던을 킬킬거리며 말했다.
“에이, 대한민국이 얼마나 청결에 신경쓰는지 궁금해서 그래 본 거예요.”
엘리자베스 윌던은 쯧, 혀를 차고는 지화자에게 직접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합니다, 지화자 팀장. 로렌치니의 성격이 보다시피 저 모양이라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연하죠, 엘리자베스 윌던 씨.”
유은영이 싱긋 웃고는 안전부절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있는 종업원에게 부탁했다.
“죄송한데, 닦을 것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네? 네!”
종업원이 황급히 닦을 것을 가져왔다.
유은영은 신고 있는 구두에 묻은 점액질을 무심하게 닦아냈다. 그 모습이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은 모습이라 유승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지화자 팀장님,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괜찮고 말고요.”
유은영이 활짝 웃었다. 그 웃음에서 유승민은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동생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 생각대로, 유은영은 인내심을 발휘해 화를 참는 중이었다.
‘부처님, 하나님, 알라여! 부디 제가 저 자식의 머리채를 잡지 않도록 해주소서!’
그랬다가는 지화자의 명성에 금이 가고 말거다. 윌던 일가도 자신을 가만두지 않겠지.
그렇기에 유은영은 보조 특성 중 하나인 ‘인내(忍耐)’를 맘껏 활용하며 로렌치니 윌던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들어선 룸.
한껏 차려진 상에 엘리자베스 윌던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들도록 할까?”
“엘리자베스 윌던 씨와 함께 점심이라니 영광이네요.”
유승민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영광인 줄 알아서 다행이네.”
로렌치니 윌던이 비아냥거렸다. 그에 엘리자베스 윌던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로렌치니, 너는 제발 그 입 좀 다물도록 하렴.”
“네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로렌치니 윌던이 김이 빠졌다는 듯 젓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먼 이국땅에서 고향 음식 좀 맛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맛없는 음식을 먹으라고 내놓다니.”
한 입 먹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말하는 건 무슨 심보람?
유은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로렌치니는 막무가내였다. 이탈리아에서 ‘콧대 높은 폭군’이라고 불린다니, 그럴만 했다.
“마리사, 나가자.”
“로렌치니! 어디를 간다는 거냐!”
“그냥 주변만 잠깐 돌아다닐 거예요. 보니까 정원도 있던데요? 그쪽에서 마리사랑 사랑 좀 나누고 있을게요.”
로렌치니 윌던이 능글맞게 울고는 ‘지화자’를 향해 말했다.
“우리 랭킹1위님도 못 먹을 음식일 것 같으면 그 옆의 님과 함께 사랑 나누러 오시던가?”
유은영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젓가락을 로렌치니 윌던의 얼굴을 향해 집어 던질뻔 했다.
지금, 누구와 사랑을 나누라니 뭐니 하는 거야?! 저 자식이 미쳤나? 정말 죽고 싶나?
유은영의 속이 부글부글 끓을 때였다.
“미안하네.”
엘리자베스 윌던이 진심을 담아 유은영에게 사과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유은영이 황급히 두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게 상처 받거나 기분 나쁘지 않으니 그런 인사는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엘리자베스 윌던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곧 목소리를 내뱉었다.
“지화자 팀장, 보다시피 우리 로렌치니는.”
“싸가지, 아니. 세상 무서울 게 없어 보이는 분 같더군요.”
유은영은 기지를 발휘해 말을 고쳤다.
하마터면 엘리자베스 윌던의 앞에서 당신 조카께서는 싸가지를 이탈리아에 두고 온 것이냐고 물어볼뻔 했다.
그 말에 엘리자베스 윌던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렌치니는 어릴적 부모를 잃고 내가 거둬 키웠다네. 오냐오냐 기른 적 없건만, 성언을 부여 받고 나서는 망나니가 되어버린지라.”
“대부분의 각성자가 그러죠.”
그렇게 말한 사람은 유승민이었다. 그는 젓가락을 들어 나물 반찬을 집어 들며 엘리자베스 윌던에게 물었다.
“로렌치니 윌던 씨의 이탈리아 내 랭킹은 지금 7위죠?”
“그렇다네.”
엘리자베스 윌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없이 걱정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상위 랭커를 향해 계속해서 도발을 걸고 있어서 귀국 후 곧장 결투가 여러 번 치러질 예정이라네.”
엘리자베스 윌던이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말했다.
“나는 그걸 막고 싶어, 자네를 찾아왔다네.”
“저와 결투해서 조카님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주셨으면 해서요?”
“그래, 정확히는 정신 좀 차리게 해줬으면 해서 말이네.”
이탈리아로 돌아가자마자 치러질 결투가 모두 물거품이 되도록 말이다.
“이런 부탁하게 돼서 정말 미안하게 됐네, 지화자 팀장.”
“아닙니다, 엘리자베스 윌던 씨.”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안 그래도 그간 게이트만 공략하고 다니느라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거든요. 아시다시피, 제가 한국 내 평판이 별로잖아요?”
그 말에 엘리자베스 윌던이 울지 못해 웃는 낯을 보였다. 유은영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결투를 걸어오는 상대가 없어서 심심했는데, 잘 됐네요.”
그러고는 일저을 확인 후 입을 열었다.
“로렌치니 윌던 씨와의 결투는 내일 저녁, 센터에서 치러질 예정입니다. 우종문 부장님으로부터 미리 들으셨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군.”
엘리자베스 윌던의 얼굴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그런 그녀를 향해 유은영이 능글맞게 물었다.
“엘리자베스 윌던 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설마 로렌치니 윌던 씨를 죽이기라도 할까봐요?”
“지화자 팀장!”
엘리자베스 윌던이 희게 질린 얼굴로 소리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