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급 힐러가 랭킹 1위가 되어 버렸다-74화 (74/200)

제74화

“다가오지마!”

리아가 우종문과 엘리자베스 윌던을 보자마자 빼액 소리 질렀다.

“리아.”

하태균이 아이를 달래려고 했지만 리아는 더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화를 냈다.

“할아버지 못됐어! 할아버지 때문에 지화자가 이렇게 다쳤잖아!”

리아의 눈에는 기절해있는 로렌치니 윌던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할아버지 미워할 거야!”

“이런.”

우종문이 난처하다는 듯이 웃고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리아, 미안하단다. 하지만 지 팀장이 결투에서 승리할 줄 알았기에 그런 거란다.”

“정말?”

“그럼.”

우종문이 싱긋 웃고는 지화자에게 말했다.

“수고했네. 간호 관리 부서 쪽에 연락해 놓을테니 올라가서 쉬게.”

“네, 감사합니다.”

지화자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엘리자베스 윌던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하나뿐인 조카께 너무 심하게 군 것 같군요.”

엘리자베스 윌던이 두 손을 꽉 주먹 쥐고는 말했다.

“괜찮다네.”

애초에 우종문에게 고삐풀린 망아지 같은 제 조카의 교육을 부탁한 게 잘못이었다.

‘지화자 팀장이 조카 녀석보다 더한 망나니인 건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 윌던 기업의 하나뿐인 후계자를 몰아붙일 줄 몰랐다.

‘그것도 같은 S급 각성자일 텐데!’

엘리자베스 윌던이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자신의 조카는 외관만 보면 무척 멀쩡해보였다. 그와는 달리 지화자는 아주 엉망이었다.

그러니까 꼴사납게 기절한 채로 누워있어야 할 사람은 제 조카가 아닌 지화자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두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있는 사람은 로렌치니 윌던이었다.

‘분명, 로렌치니가 지화자 팀장을 몰아붙이는 것 같았건만!’

하지만 결과는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였다.

엘리자베스 윌던, 그녀의 바람대로 조카는 이번 기회로 개과천선할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엘리자베스 윌던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로렌치니 윌던의 치료였다.

“마리사, 뭐하고 있는 게냐? 네 파트너를 치료하지 않고.”

“아……!”

눈앞에서 벌어진 처참한 광경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던 마리사가 후다닥 달려왔다.

그 모습에 곧장 자리를 떠나려고 했던 지화자가 비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로렌치니 윌던 씨께서 데리고 온 파트너 분께서 힐러셨군요.”

“혹시 몰라서 말이지.”

엘리자베스 윌던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리사가 많이 유약한 것처럼 보여도 B급 힐러라네. 원한다면 자네의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할 수 있네만?”

“괜찮습니다. 저희 팀의 전담 어시스트 힐러님 덕분에 멀쩡해졌거든요.”

“그래도 입은 내상이 꽤 심각할 텐데 말이야.”

“그거야 센터의 힐러 분들께 부탁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먼저 올라가보겠습니다. 내일 뵙죠.”

마음 같아서는 지화자의 인사를 무시하고 싶었다. 아니,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윌던은 그간 윌던 기업을 이끌어온 노련미로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

싱긋 미소를 그리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래, 내일 보지.”

어차피 방한 일정은 오늘로 끝.

내일은 지화자의 경호 아래에 귀국하면 되는 일이었다.

지화자는 엘리자베스 윌던과 우종문에게 가볍게 목례한 후 자신의 팀원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우종문이 물끄러미 멀어져가고 있는 지화자의 뒷모습을 보고있던 유승민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도 이만 가봐도 좋네. 엘리자베스 윌던 씨의 방한 일정에 따라 이곳저곳 지 팀장과 함께 움직이느라 고생많았네.”

말했듯, 엘리자베스 윌던의 방한 일정은 오늘로 끝이었다.

유승민이 지화자의 파트너로 그녀를 따라 움직일 일도 이제 끝이 났다는 말.

유승민은 우종문의 말에 애매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지화자 팀장님과 귀중한 시간을 가지게 돼서 영광이었습니다.”

“하긴, 지 팀장이 싸우는 모습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지.”

우종문이 싱긋 웃었다.

“그보다 내 부탁할 게 있네만.”

“네, 우종문 부장님.”

뭐든 말하라며 유승민이 평온한 얼굴로 미소를 그렸다. 그에 우종문이 웃는 낯으로 그에게 다가와서는 속삭였다.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게. 자네는 청와대 소속의 각성자가 아닌, 지 팀장의 파트너로 센터에 온 것이니.”

그러니까 센터 바깥으로 이 결투가 새어나가지 않게 입단속 잘 하라는 소리였다.

“아, 엘리자베스 윌던 씨께서 한국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보고해도 된다네.”

선심쓰듯 말하는 목소리에 유승민이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지화자의 몸에 있던 제 동생이 고통에 몸부림쳤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을 불문에 부치라니!

그러나 유승민은 우종문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 역시 위에서 까라면 까는 게 인생인 직장인이었으니 말이다.

한편, 팀원들과 함께 0팀의 사무실로 올라온 지화자는 곧장 소파에 널브러졌다.

“아, 죽겠다.”

결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해가 환한 오후였는데 어느새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지화자가 시계를 흘끗거렸다.

오후 6시를 넘긴 시간.

‘망할.’

퇴근 시간을 넘겨버렸다.

‘빌어먹을 로렌치니 윌던!’

결투만 아니었다면 엘리자베스 윌던의 공식적인 일정이 끝나자마자 퇴근했을 텐데!

지화자가 까드득 이를 갈 때, 리아가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서는 울먹였다.

“지화자야! 죽으면 안 돼!”

“안 죽는다니까?”

“조금 전에 죽겠다며!”

“그러니까 그건……!”

지화자가 말을 하다말고 짧게 혀를 찼다.

애 앞에서는 냉수도 함부로 못 마신다고 하더니, 지화자가 지금 딱 그 꼴이었다.

지화자가 벅벅 머리를 긁었다.

“어쨌든 안 죽어. 나 괜찮아.”

“정말?”

“응, 정말. 그러니까 울지마.”

지화자가 다정하게 리아의 두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고는 입을 열었다.

“그보다 다들 잠깐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을까요?”

0팀의 모두가 서로 눈치를 봤다. 그에 지화자가 유은영이라도 된 것처럼 곤란하다는 듯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상처가 벌어진 것 같아서 그래요. 아무래도 상의를 벗어야 할 것 같은데…….”

“나가 있겠습니다.”

하태균이 그렇게 말하고는 팀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물론, 나가지 않으려고 하는 팀원이 두 명 있었다.

“나는 여기 있을래! 같은 여자니까 상관없잖아!”

“저도 팀장님 곁에 있을래요! 저는 팀장님이 여자로 안 보이니까 괜찮아요!”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가하성이 라이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리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지화자에게 달려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시발!’

순간 지화자의 입 밖으로 험한 말이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그녀는 고통을 꾹 참고 아이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가하성 씨, 리아도 데리고 나가주시겠어요?”

“왜에!”

리아가 칭얼거렸다. 지화자가 쏟아져 나오려는 욕설을 집어삼키고는 미소를 그렸다.

“네가 보기에는 교육상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그 말에 하태균이 움직였다.

“리아, 나가 있자.”

“싫어!”

리아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태균이 도움을 바라는 눈빛으로 지화자를 쳐다봤다.

제 힘으로 리아를 그녀한테서 억지로 떼어내려 했다가는 분명 아이가 다칠 테니 그랬다.

‘어휴, 한심한 놈.’

허리에도 못 미칠 애한테 절절 매는 꼴이라니!

하지만 지화자 역시 하태균과 똑같이 아이에게 절절 매는 모습으로 리아를 달랬다.

“리아, 밖에서 라이랑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상처 다 치료하고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맛있는 거? 고기? 치킨?”

리아가 두 눈을 반짝였다.

속물적이기 그지없는 아이의 얼굴에 지화자는 또 한 번 욕설을 삼키고는 방긋 웃었다.

“둘 다 사줄게.”

그 말에 리아가 활짝 웃으며 하태균의 손을 잡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렇게 문이 닫히자마자.

“후우, 정신 사나워라.”

지화자는 비로소 마음 편하게 목소리를 내뱉을 수 있었다.

리아를 비롯한 팀원들 모두에게 상냥하게 구느라 잔뜩 진땀을 뺀 지화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거나 유은영과 단둘만 남게 됐다. 지화자가 편하게 그녀와 이야기하려고 할 때.

“지화자 씨, 괜찮으세요?”

유은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질문에 지화자가 기다렸다는 듯 곧장 대답했다.

“아니, 안 괜찮아.”

지화자가 까드득 이를 갈았다.

“시발, 그 빌어먹을 새끼. 그냥 죽여버리는건데.”

“지화자 씨!”

유은영이 희게 질린 얼굴로 빼액 소리 질렀다.

“장난이야. 언니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법을 준수하는 대한민국의 선량한 국민이라고?”

퍽이나 그러겠다.

유은영은 지화자가 자신의 몸을 차지하고 있을 때, 면허가 없는 몸으로 잘도 운전한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상처나 보여주세요.”

“괜찮아.”

“안 괜찮다면서요! 객기 부리지 말고 어서 상처 좀 보여주세요.”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제대로 힐도 못 하면서?”

“지화자 씨께서 제 힘을 운용할 때 느꼈던 감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어서 벗으라면서 유은영이 재촉했다.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이다.

결국 지화자는 백기를 들고 상의를 벗었다.

“자, 됐어?”

묻는 말에 유은영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으로 보기에 지화자의 상태를 그렇게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깊은 상처는 오른쪽 어깨에 찔린 상처뿐이었고, 나머지는 자잘한 상처뿐이었다.

하지만 유은영은 알 수 있었다.

“…죄송해요.”

지화자가 입은 내상이 엘리자베스 윌던의 말대로 꽤 심각하다는 것을.

그리고 유은영은 또한 알았다.

자신이 암만 힐(Heal)을 다루게 되었다고 하지만 지화자가 입은 내상은 제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수준이란 것을.

‘한심해.’

꾹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지만 유은영은 더욱 세게 제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지화자를 완벽하게 흉내낼 수 있다고 자만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로렌치니 윌던에게 그런 식으로 처참하게 짓밟힌 것이리라.

지화자와 몸이 다시 바뀌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죽었을 수도 있었을 거다.

로렌치니 윌던은 정말로 ‘지화자’를 죽일 듯이 굴었으니까.

결국, 자신은 ‘지화자’의 흉내 따위 내지 못하는 폐급 힐러였다.

‘껍데기가 암만 바뀌어봤자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거겠지.’

유은영이 그렇게 자책할 때였다.

“언니.”

지화자가 유은영의 입가를 툭 치고는 씨익 웃었다.

“힐러라고 자신의 몸을 너무 막 대하는 거 아니야?”

“…아니거든요.”

유은영이 불퉁하게 입술을 씰룩거리며 지화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치료한다고 해봤자,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유은영은 지화자가 제 힘을 운용했을 때 느꼈던 그 감각을 최대한 살려 지화자에게 힐을 시전했다.

“지화자 씨, 혹시 제 몸에 있을 때 무슨 일 있었나요?”

“딱히? 그건 갑자기 왜?”

“제가 F급 힐러인 거 알잖아요. 보조 특성으로 힐(Heal)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힘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기가 막힌 안마뿐인 유은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슨 일 있었죠?”

지화자의 치료를 끝낸 유은영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별일 없었다니까?”

지화자가 그렇게 말하고는 유은영의 관심을 돌리고자 투덜댔다.

“그보다 이혜나 팀장은 왜 이렇게 안 와?”

다행히도 지화자가 언급한 이름에 유은영의 관심이 돌려졌다.

“이혜나 팀장님이라면 이제 막 다시 센터로 돌아오고 계실걸요? 우리 팀장님, 퇴근 시간은 정말 칼같이 지키거든요.”

“아참, 그랬지?”

지화자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언니, 내가 원래대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었는지 알아?”

“뭘 하고 싶었는데요?”

“뒤집어엎기.”

“뒤집어엎어요? 어디를요?”

“어디겠어?”

지화자가 사악하기 그지 없는 웃음을 입가에 걸쳤다.

“간호 관리 부서지.”

하지만 지화자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지화자 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일이 있어 오늘 일찍 퇴근을 했었거든요! 우종문 부장님께 듣기로는 상처가 꽤 심각하다고 하던데……!”

헐레벌떡 0팀의 사무실에 들어오며 변명을 쏟아내고 있던 이혜나가 눈앞의 광경에 말을 멈췄다.

“지, 지화자 팀장님?”

대한민국의 랭킹 1위가 소파에서 희게 질린 낯으로 끙끙 앓고 있었다. 어떤 상처에도 신음 소리 한 번 안 내던 그녀가 말이다.

“괜찮으세요?!”

“안 괜찮을 거예요.”

“은영 씨!”

이혜나가 그걸 알면서도 저렇게 두고 있느냐면서 ‘유은영’을 질책하려고 했지만.

“괘, 괜찮아?”

그녀의 상태 역시 눈앞의 ‘지화자’만큼이나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저요?”

하지만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네, 괜찮아요.”

그렇게 대답하는 것과는 다르게 ‘유은영’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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