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망했다.
‘지화자 씨께 호엄장담하고 나왔는데.’
아주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조수현과 함께 게이트 공략에 나서게 생겼다.
‘이게 다 부장님 때문이야!’
왜 하필 그때 카페에 나타나서는 자신들에게 말을 걸었단 말인가!
어쨌거나 우종문의 앞에서 자신은 대답했었다.
“네, 물론이죠. 안 그래도 조수현 팀장님과 공략 계획을 짜려고 할 생각이었습니다.”
덕분에 유은영은 지금 조수현과 게이트 공략을 어떻게 나서면 좋을지 한창 이야기 중이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인원을 나누면 좋을 것 같은데, 지화자 팀장님? 듣고 있습니까?”
유은영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지화자 팀장님?
“네? 아아, 죄송합니다. 죄송하지만 한 번 더 말해줄 수 있을까요? 인원을 어떻게 나누자고요?”
유은영은 우종문이 떠난 후, 조수현과의 대화에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유은영의 머릿속은 지금 지화자에게 온갖 잔소리를 듣는 시뮬레이션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어쨌거나 조수현의 이야기를 놓친 지 벌써 몇 번째.
화를 낼만도 한데도 조수현은 친절하게 유은영에게 알려줬다.
“지화자 팀장님께서 이끌고 계시는 0팀은 힘의 균형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가?
유은영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조수현이 말했다.
“유은영 씨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인원이 공격에 특화되어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듣고보니 그랬다.
자신을 비롯해서 가하성과 하태균, 라이와 리아 모두 공격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나마 하태균 씨께서 가진 힘이 방어에도 꽤 유용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새삼스레 유은영은 0팀의 밸런스가 다른 팀에 비해 월등하게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저희 1팀에서 방어 및 버프에 특화되어 있는 인원을 추려서 보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아아, 그랬죠? 저와 조수현 팀장님께서 크게 두 조로 나누어서 움직이자고 하셨던가요?”
“네, 그렇습니다.”
타임 브레이커 유형의 경우, 제한 시간 내에 게이트의 핵을 부서뜨려야만 공략이 됐다.
문제는 게이트의 핵을 지키고 있는 몬스터들.
이번 게이트는 특히나 그 개체수가 많다는 정보가 들어왔단다.
“간호 관리 부서에 힐러 분들을 파견해달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닙니다.”
1팀은 0팀의 ‘유은영’과 마찬가지로 전담 어시스트 힐러가 있는 곳이었다.
문제는 인원에 비해 힐러의 수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다는 것.
“하지만 간호 관리 부서에서 인력을 배치해줄까요?”
자신이 아는 민머리 부장의 성격상, 그는 절대로 인력을 배치해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조수현도 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요청은 해볼 생각입니다. 정 안 될 것 같으면 우종문 부장님께 부탁드리죠.”
“아니요, 저희끼리 해결하죠.”
유은영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간호 관리 부서의 부장은 꼰대의 기질이 넘쳐나는 상사였지만,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강한 사람에게 한없이 약하다는 거였다.
여기서 말하는 ‘강함’이란 힘 그 자체를 말하기도 했고 성격을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
힘도 성격도 그 누구에게도 지지않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 있었다.
“제가 간호 관리 부서에 찾아가서 담판을 짓고 오도록 하죠.”
더욱이 이렇게 된 거, 유은영은 간호 관리 부서에 있을 적 자신을 가장 괴롭혔던 인간들을 게이트 공략에 데리고 가기로 했다.
유은영의 말에 조수현이 놀라 물었다.
“지, 지화자 팀장님께서요?”
“싫으면 말고요.”
“아니요! 싫다는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단지……!”
조수현이 숨을 고르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지화자 팀장님께서 게이트 공략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걸 처음 봐서 말입니다.”
“그런가요?”
유은영이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그간, 자신이 봐온 지화자는 그 누구보다 게이트 공략에 있어서 진심이었다.
귀찮다는 듯, 성가셔 죽겠다는 듯 구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떻게든 게이트는 공략시켰다.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됐습니다. 사과할 시간에 게이트 정보나 더 파악해주세요. 놓친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는 그렇게 조수현과 헤어진 후 곧장 간호 관리 부서로 향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지화자 팀장님.”
조수현이 유은영을 붙잡았다.
유은영이 습관적으로 ‘네’라고 대답할뻔하다가 지화자가 할 법한 반응을 꾸며냈다.
“또 뭡니까?”
짜증 섞인 물음에 조수현이 우물쭈물하다 입을 열었다.
“잊은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
잊은 말? 뭐지? 조수현 팀장님, 나랑 나이가 비슷한 걸로 아는데 벌써 건망증이?
유은영이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고맙습니다.”
“네?”
“사실, 거절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럴 생각이었다.
어쩌다 보니 상황이 조수현과 함께 공략을 진행하는 것으로 흘러가게 됐을 뿐.
“지화자 팀장님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네에.”
유은영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럼, 하실 말씀 끝났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좋은 결과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유은영이 고개를 끄덕인 후 간호 관리 부서로 향했다. 이번에 조수현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유은영은 그에 안도하는 한편 절망했다.
‘어쩌지? 진짜 어쩌면 좋지?’
조수현과 게이트 공략에 나서기로 한 것을 이제 와서 물릴 수는 없는 노릇.
더욱이 간호 관리 부서에 직접 찾아가 결판을 짓고 오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어쩌자고 그런 거야!’
아마, 이 자리에 지화자가 있었다면 자신을 몇 번이고 죽이려고 들었을 거다.
‘지화자 씨가 지금 사무실에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다.’
하지만 0팀의 사무실로 돌아간 후에는?
‘사실대로 말해야겠지.’
여러 이유로 1팀과 게이트 공략에 나서게 됐다고 말이다.
‘아아, 몰라.’
일단 눈 앞의 상황에 집중하자면서 유은영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간호 관리 부서실의 앞.
유은영은 가볍게 노크를 한 후, 곧장 문을 열었다.
“누구… 어? 지, 지 팀장님?”
“지 팀장? 설마 지화자 팀장?”
“지화자 팀장님이 찾아왔다고?”
간호 관리 부서에서 한껏 여유를 즐기고 있던 힐러들이 놀란 눈을 보였다.
유은영은 익숙한 얼굴들에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모두들? 오랜만이네요.”
그녀와는 다르게 간호 관리 부서의 힐러들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화자’가 누구인가!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A급 힐러를 길에 굴러다니는 돌처럼 취급하는 각성자이지 않는가!
그런 그녀가 친절함을 한껏 무장한 채 간호 관리 부서에 찾아왔다.
“팀장님 말씀 맞았네. 지화자 팀장님이 존댓말이라니.”
“팀장님이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그보다 지화자 팀장님께서는 여기까지 무슨 일이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사람을 앞에 두고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지만 유은영은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태연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대로 얌전히 있으면 안 되겠지.’
지화자는 절대로 남들에게 호구를 잡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유은영은 입매를 살짝 비틀며 물었다.
“사람을 언제까지 앞에 세워둘 생각인가요?”
“아…! 죄, 죄송합니다……!”
유은영보다 한 기수 위였던 그녀의 선배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빨리도 물어본다.
유은영이 비웃음을 입가에 걸치고는 입을 열었다.
“이번에 A-Index에서 뜬 게이트 정보 다들 확인하셨죠?”
“네? 네에, 확인은 했는데…….”
그게 자신들을 찾아온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간호 관리 부서에 협조를 요청하고 싶어서요. 힐러의 수가 부족할 것 같아서 말이죠.”
“그, 그런!”
간호 관리 부서의 힐러들은 현장 파견 부서의 일에 동원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예를 들면 게이트 공략에 차출되는 것이랄까?
그리고 지금 현장 파견 부서에서, 아니. 센터 내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인 ‘지화자’가 직접 인원을 차출하겠답시고 간호 관리 부서에 찾아왔다.
“저, 지화자 팀장님. 죄송하지만 지금 저희 중 게이트 공략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맞아요! 더욱이 지화자 팀장님의 팀에는 이미 전담 어시스트 힐러가 있지 않나요?”
“더군다나 이번 게이트는 조수현 팀장님 관할 구역이잖아요!”
유은영은 힐러들의 아우성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이번 게이트가 조수현 팀장님의 관할 구역에서 열리는 게 맞기는 하죠. 하지만 그 게이트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이 너무 크다고 하더군요.”
“어, 어떤 위험이기에.”
“글쎄요. 듣기로는 A-Index에 기록되지 않은 몬스터가 다수 출현 예정이라고 들었어요.”
“그런……!”
힐러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유은영은 속으로 한껏 웃고있는 중이었다.
A-Index에 기록되지 않은 몬스터라니, 그런 정보 따위 들은 적 없었다.
그러니까 유은영은 지금 간호 관리 부서의 힐러들을 마음껏 놀리고 있는 중이란 말씀.
‘내가 당한 게 얼마나 많은데!’
마음 같아서는 ‘지화자’의 힘을 맘껏 사용하고픈 유은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성인으로 이성을 붙잡았다.
“어쨌든, 그래서 이번 게이트는 저희 0팀이 조수현 팀장님의 1팀과 함께 공략하기로 했죠.”
그래서 공략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간호 관리 부서를 찾아오게 됐다면서 유은영이 말했다.
“간호 관리 부서의 힐러분들 중 게이트 공략 경험이 가장 많은 분이 누구시죠?”
“그, 그건.”
힐러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두 눈을 데굴 굴릴 때였다.
“어머, 왜 이렇게 어수선해?”
“이 팀장 말대로 분위기가 왜 이렇게 어수선해?”
잠깐 자리를 비웠던 간호 관리 부서의 사람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바로.
“구순철 부장님과 이혜나 팀장님이세요!”
유은영이 간호 관리 부서를 향해 다리를 움직일 때부터 마음 속에 점찍어뒀던 사람들이었다.
“응? 갑자기 나랑 부장님은 왜? 그보다…….”
이혜나가 ‘지화자’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외쳤다.
“지, 지화자 팀장님?!”
“뭐?! 지 팀장이라고?!!”
구순철도 덩달아 놀라 펄쩍 뛰었다.
유은영은 두 사람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두 분 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하하, 네, 그, 그렇네요.”
이혜나가 구순철에게 슬그머니 시선을 보냈다.
‘내가 왜 찾아왔는지 물어보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구순철 역시 모르는 눈치였다.
‘당연하겠지.’
구순철이 현장 파견 부서 2팀의 팀장인 나혜선과 같이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몰라도 말이다.
어쨌거나 유은영은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것같은 자신의 상사들을 향해 한껏 입꼬리를 올렸다.
“두 분,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시간 되시죠?”
설명은 나중에.
유은영이 언제 친했다는 듯, 간호 관리 부서의 부장과 팀장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