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유승민.
동네에서 총명하기로 소문났던 유은영의 오빠.
소문난 시스콤이기도 한 그는 유은영과 지화자가 어떻게 해야 서로의 몸을 되찾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위험한 생각까지 품기도 했는데 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그 생각을 실행으로 옮길 가능성은 적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물론, 유은영이 걱정하는 건 지화자가 아니었다.
유은영이 걱정하는 사람은 괜히 그녀에게 달려들었다가 본전도 못 찾을 유승민이었다.
암만 오랑우탄이라고 불러대지만 자신의 하나뿐인 오빠였다.
유승민이 그런 동생의 생각을 알았다면 크게 감동을 먹었을 거다.
어쨌든, 그는 라이와 리아의 거미줄에서 벗어났고.
“은영아, 내 동생!”
기어코 유은영을 끌어안는 데 성공했다.
유은영이 기겁하며 유승민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지금의 몸으로는 무리였다.
‘물론, S급이 된다고 해도 무리겠지.’
그렇게 된다고 해도 힐러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은영아, 안 아파? 안 무서웠어? 괜찮아?”
“안 아프고 안 무서웠고 괜찮아! 내가 게이트 한두 번 공략해본 줄 알아?!”
유은영이 유승민의 얼굴을 밀어내며 말했다.
“리아 씨랑 라이 씨가 보고 있는데 좀 떨어져!”
“애들이 보고 있어서 부끄러워? 그럼 이렇게 하면 안 부끄럽겠지?”
유승민이 라이와 리아도 끌어안았다.
얼떨결에 유은영과 함께 그의 품에 갇히게 된 라이와 리아가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유은영아! 네 오빠 이상해! 변태같아!”
“누님! 저 이 형님 싫어요!”
저도 싫어요.
유은영이 치밀어 오르는 말을 꿀꺽 삼키며 외쳤다.
“라이 씨랑 리아 씨한테 무슨 짓이야? 당장 놓아줘!”
“은영이는 안 놓아줘도 되지?”
이 망할 오랑우탄이 보자보자하니까!
유은영이 다리를 들어 유승민의 가랑이 사이를 발로 차버렸다.
이상한 놈이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할 때며 성별에 상관없이 가랑이 사이를 차버려라.
유승민의 지대한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
유승민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오우.”
유승민한테서 벗어난 라이가 기겁하며 그의 골반 부근을 두드려 주었다.
유승민은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힘겹게 목소리를 내었다.
“은영아… 조카보고 싶지 않나보구나……?”
“응, 오빠는 양심적으로 새언니를 들이면 안 돼.”
유승민이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좋아서 웃어?”
“그냥.”
유승민이 싱긋 웃었다.
“은영이한테 이렇게 맞는 게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너무 좋네.”
그 말에 리아가 심각한 얼굴로 유은영에게 물었다.
“유은영아, 네 오빠는 혹시 마조히스트야?”
마조히스트라니!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요?”
“인터넷에서.”
오 마이 갓.
“리아 씨, 일단 저희 오빠는 마조히스트가 아니에요.”
“그럼?”
“그냥 미친 오랑우탄일 뿐이죠.”
“너무해라.”
미친 오랑우탄, 유승민이 헤실거렸다.
“그만 좀 웃어. 진짜 미친 것처럼 보이니까.”
“좋은 걸 어떻게 해? 그보다 여기 선물.”
유승민이 유은영에게 예쁘게 포장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유은영이 곧장 선물을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집에 가서 풀어봐.”
유승민이 그녀를 막았다.
“그래도 돼?”
“응.”
“별일이네.”
유은영이 픽 웃었다.
“언제는 오빠가 보는 앞에서 선물 좀 확인해 달라면서?”
“이번 선물은 조금 독특하거든.”
불안한데.
“어쨌든 알겠어. 선물 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
“짐꾼 안 필요해?”
유승민이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지만.
“짐꾼은 우리가 있어!”
“맞아요! 그러니까 형님은 필요 없어요!”
리아와 라이가 어림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당장, 아이들의 손에는 쇼핑백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모두 유은영의 옷이었다.
유은영은 이렇게 많은 옷은 필요 없다고 했지만, 라이와 리아는 막무가내였다.
남의 돈이니 막 써도 된다는 아이들의 지조 때문이었다.
어찌 됐든 라이와 리아의 말에 유은영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말했다.
“들었지? 그러니까 이만 가 봐.”
유승민이 시무룩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지만, 유은영은 단호했다.
“오빠의 동생으로 잘 가라는 인사 할 때 그만 가지?”
지화자와 언제 다시 몸이 바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말에 유승민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내일 엄마한테서 전화올 텐데 그거 꼭 받고.”
“네네, 알겠으니까 빨리 돌아가기나 해!”
유은영은 그렇게 겨우 유승민한테서 벗어나게 됐다.
“유은영아, 네 오빠 엄청 특이한 것 같아.”
“그렇죠? 못 볼 꼴을 보였네요.”
유은영이 속으로 열심히 유승민을 욕하면서 말했다.
“마저 쇼핑이나 할까요? 제 옷은 다 샀으니까 리아 씨랑 라이 씨 옷 좀 봐요.”
“괜찮아!”
“맞아, 괜찮아요!”
리아와 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나랑 오빠 옷은 넘쳐나니까!”
“지화자 누님이 시간 날 때마다 많이 사주셨거든요!”
라이가 말하는 ‘지화자’가 바로 유은영이었는데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내 것만 너무 많이 산 것 같은데.’
같은데가 아니라 그랬다.
유은영은 괜히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정말로 라이와 리아를 짐꾼으로 고용한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돌발 게이트로 백화점 내 사람들이 많이 없어진 게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
그때, 유은영이 기가 막힌 생각을 떠올렸다.
“저는 사준 적 없잖아요! 이번 기회에 사드릴게요! 어때요?”
라이와 리아가 두 눈을 데굴 굴리고는 맑게 대답했다.
“좋아!”
“네, 누님!”
유은영은 그대로 아이들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
유은영은 저녁 8시가 훌쩍 넘는 시간에 라이와 리아와 함께 귀가했다.
“까미야 나왔어!”
“까망아, 나도 왔어!”
리아와 라이가 한달음에 자신들의 방으로 달려갔다.
지화자는 여전히 센터인 모양인 듯 했다. 당연히 두 사람의 몸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그때는 금방 바뀌지 않았었나?’
유은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의 몸을 되찾는 방법은 알겠지만, 다시 몸이 바뀌는 원리는 모르겠네.’
어쨌거나 다행인가?
‘지화자 씨와 다시 몸이 바뀌면 지금쯤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어야 할 테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리아가 다급하게 그녀를 부른 건 그때였다.
“유은영아, 유은영아!”
“네, 리아 씨.”
까미한테 인사하고 나온 리아가 유은영에게 졸랐다.
“어서 옷 입어봐! 나도 유은영이 사준 옷 입어볼게!”
“맞아요, 누님! 지화자 누님 올 때까지 패션쇼 해요!”
마찬가지로 까망이에게 인사하고 나온 라이가 리아의 말을 거들었다. 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유은영이 좋대!”
“어서 옷 갈아입고 나오자!”
“응!”
라이와 리아가 우다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유은영은 종이 가방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유은영’의 방으로 말이다.
“장수야, 안녕.”
유은영이 자신이 지화자에게 선물해준 거북이에게 인사한 후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
유은영은 한동안 아이들의 장단에 맞춰줬다.
입었던 옷을 또 갈아입고, 또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라이 씨, 리아 씨. 우리 이제 그만할까요?”
끝나지 않는 패션쇼에 유은영은 그만 지쳐 버렸다.
‘지화자’의 몸이었다면 몰라도 이 몸은 너무 연약했다. F급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나와보니 라이와 리아가 잠들어 있었다.
허무하다면 허무했으나 유은영은 피식 웃으며 넘겨버렸다.
“하긴, 피곤하시겠지.”
게이트에 휘말리기 전, 안 그래도 아이스링크장에서 열심히 놀고 있었던 라이와 리아였다.
그런데 게이트에 휘말려 난데없이 공략을 뛰게 됐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암만 몬스터의 유전자를 통해 태어난 아이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유은영은 라이와 리아에게 이불을 꺼내 덮어준 뒤 방으로 향했다.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
지화자는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물론, 여전히 몸은 바뀌지 않은 채였고.
‘혹시, 더이상 몸이 바뀌지 않는 건 아닐까?’
유은영이 그러기를 바라면서 또한 생각했다.
‘자고 일어나면 알 수 있겠지.’
그런 그녀의 눈에 유승민이 쥐어 준 선물이 들어왔다.
“도대체 무슨 선물을 준 거람.”
유은영이 포장지를 뜯고는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손바닥만 한 검이었다.
날이 시퍼런 무기에 유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이런걸?’
유승민이 호신용 아이템을 많이 선물해주기는 했다. 그러니까 무기가 아닌, 방어 목적의 아이템 말이다.
무기는 유은영한테 너무 위험해서 안 된다며 절대로 선물해 준 적이 없는 유승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더욱이 자신은 지화자와 시시때때로 몸이 바뀌는데 말이다.
하지만 곧 유은영은 유승민이 왜 이런 무기를 선물해줬는지 알아차렸다.
“이 망할 오랑우탄이!”
유승민은 자신이 돌발 게이트에 휘말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게이트에서 입은 상처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간 것은 몰랐을 터.
그러니까 원래 이 무기는 ‘지화자’의 손으로 받았을 거란 뜻.
그게 뭘 말하겠는가?
‘원래의 몸을 되찾고 싶으면 이 검으로 지화자 씨의 몸을 찌르란 거겠지!’
그러니까 빙의하고 있는 ‘지화자’의 몸을 말이다.
유은영이 사납게 얼굴을 찌푸리고는 검을 다시 상자에 넣어 그대로 버려버렸다.
“진짜 미쳤나봐!”
어느 오빠가 동생에게 살인을 종용한단 말인가!
유은영은 유승민을 만나면 물리적으로 거세시켜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때까지도 지화자는 소식이 없었고.
F급, 아니.
E급 힐러가 된 유은영은 졸음에 꾸벅거리다가 그대로 자버렸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난 건 어슴푸레 빛이 들고 있는 아침.
“생일 축하해, 언니.”
가장 먼저 본 얼굴은 ‘유은영’. 즉, 자신의 얼굴이었다.
유은영이 졸린 눈을 비비며 웅얼거렸다.
“결국 몸이 바뀌었나 보네요. 이제 안 바뀌는 건 아닐까 내심 기대했는데요.”
“그러게나 말이야.”
지화자가 짧게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센터에 있을 때 안 바뀐 게 어디야?”
“그건 맞는 말이에요.”
지화자가 센터에 있을 때 몸이 바뀌었다면 꽤 곤란했을 거다.
자고 일어나서 보는 풍경이 0팀의 사무실이라니!
아마 꿈인줄 알고 다시 잤겠지.
“언제 돌아오셨어요?”
“얼마 안 됐어. 1시간 정도 지났나? 잠깐 눈 좀 붙이고 일어나니까 몸이 바뀌었더라고. 그보다 여기 선물.”
“선물은 지화자 씨가 받아야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지화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선물은 이미 받았으니까 필요 없어.”
그러니까 어서 받으라며 지화자가 유은영의 손에 억지로 선물을 쥐어줬다.
“열어봐도 돼요?”
“물론이지.”
유은영이 선물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검이었다. 유승민이 준 것과 똑같은 크기의 검.
“지화자 씨!”
“거절해도 소용없어.”
유은영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의 손에 목숨이 위험해질 바에야 언니 손으로 목숨을 해치는 게 좋잖아? 그럼 내가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어쨌든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한다니.
유은영이 얼굴을 찌푸렸다.
생일을 맞은 이래로 최악이라고 할만한 선물을 받아버렸다.
그것도 두 개 씩이나.
여러모로 잊지 못할 생일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