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급 힐러가 랭킹 1위가 되어 버렸다-100화 (100/200)

제100화

먼저 입을 연 건 ‘유은영’이었다.

“스콜피언의 길드장님께서는 할 일이 많이 없으신가 봐요? 아님, 친구 분들이 없거나.”

“너보다는 많아.”

“그런 분이 이런 곳에 혼자 계시다니.”

지화자가 싱긋 웃었다.

“궁상 맞아라.”

“뭐라고?!”

서이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러는 넌 뭐야?!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곳에 온 거야?!”

“제가 못 올 곳에라도 왔나요?”

“그럼, 당연하지!”

서이안이 빼액 소리 질렀다.

“이곳은 상위 1% 랭커들만 올 수 있는 곳이니까!”

여기가 그런 곳이었단 말이야?

유은영이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잠깐만.

‘그런 곳에 서이안 길드장님은 혼자 오신 건가?’

그것도 12월 31일, 마지막 날에 말이다.

‘친구가 없으신가 보다.’

아니면 여자랑 선약이 있었는데 차였거나.

유은영이 안쓰럽다는 듯 서이안을 쳐다봤다.

“뭐야, 지화자?!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불쾌하게!”

“불쾌하라고 쳐다보는 거 아닐까요?”

“폐급, 넌 안 닥쳐?!”

지화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태연한 태도에 서이안이 씩씩거렸다.

“여기 물관리를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이딴 폐급을 손님으로 받다니!”

“잘난 상사 분을 두고 있는 덕분이죠.”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서이안이 가슴을 두드렸다.

‘저렇게 싫으면 자리를 옮기면 될 텐데.’

왜 굳이 자신들의 앞에 앉아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금 서이안을 쫓아내지 않으면 이 자리에 계속 눌러붙어있을 거란 것을.

그렇기에 유은영은 한껏 지화자를 연기하며 날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봐, 서이안. 나 유은영 씨랑 긴밀하게 할 말 있으니까 이만 좀 가주지?”

부탁도 아닌 명령.

서이안은 순간 발끈할 뻔 했으나 참았다. 자리를 옮길생각따위 없었기 때문이다.

상위 1%의 랭커들에게만 허용되는 고급 선집에서 만나 랭킹 1위와 랭킹 2위.

당연히 술집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지화자’와 서이안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이 먼저 일어나면 저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내가 지화자, 저 빌어먹을 새끼의 기에 짓눌러서 일어난 거라고 생각하겠지!’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그렇게 수군거리는 건 절대로 참을 수 없는 서이안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입을 꾹 다물고는 유은영을 노려보기만 했다.

유은영은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지화자랑 화기애애하게 술잔이나 기울이면서 하루의 피로를 씻겨내리려고 했더니만!

그때 지화자가 말했다.

“팀장님, 일어나요. 저희가 다른 자리로 가는 게 낫겠네요.”

“아, 그럴까요?”

하지만 불가능했다.

“죄송하지만 지금 남는 자리가 없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종업원의 말에 지화자도 유은영도 표정을 굳혔다.

서이안은 픽 웃었다.

“그렇다고 하네?”

지화자가 이를 드러내며 서이안을 노려봤다. 물론, 폐급. 아니, D급 힐러의 시선 따위에 겁을 먹을 그가 아니었다.

서이안은 그저 불쾌하다는 듯이 말할 뿐이었다.

“뭘 봐?”

“어머, 서이안 씨 본 거 아닌데요? 자의식 과잉이시네요?”

“뭐?!”

서이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은영이 황급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 유은영 씨, 서이안 씨 그만 놀리세요! 그리고 서이안!”

유은영이 검지를 치켜들었다.

“너는 부끄러운 줄 알아! 도대체 뭐 하자는 짓이야?!”

날선 물음에 서이안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유은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랑 있으려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런 이유 따위 없거든?”

“없으면 제발 좀 가줄래? 유은영 씨랑 편하게 이야기 좀 나누게!”

“싫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유은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다.

“팀장님.”

“아, 네.”

“그냥 장소를 옮기죠? 아무래도 서이안 씨께서는 저희 부탁을 안 들어주실 것 같으니까요.”

그렇게 보였다.

결국 유은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러죠.”

그에 서이안이 콧방귀를 꼈다.

“지금 자리가 있는 술집이 있을 것 같아? 설사 있는다고 해도 지화자.”

서이안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유은영에게 물었다.

“네가 평범한 술집에서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유은영이 미간을 좁혔다.

서이안의 말에 틀린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

모든 술집이 시끌벅적 사람들로 붐비고 있을 터.

더욱이 그 사람들은 당연히 ‘지화자’를 알아볼게 분명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말이다.

유은영이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분하다는 듯이 주먹을 쥘 때였다.

“저기요.”

지화자가 종업원을 불렀다.

“제일 도수 높은 것으로 한 병 주세요. 안주는 이 가게에서 제일 비싼 거로 주시고요. 잔은 세 개 준비해주실래요?”

“네? 아, 넵! 알겠습니다!”

종업원이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곧 술을 준비해온 종업원이 세 사람의 앞에 잔을 놓았다.

“팀장님은 물 드세요. 술 잘 못 하시잖아요.”

지화자가 그렇게 말하며 유은영의 잔에 물을 따라줬다. 그녀가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말이다.

“얼씨구, 폐급이 수발도 들어주고 좋겠네?”

유은영이 서이안을 노려봤다.

서이안이 폐급폐급 거리는 건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자신은 더 이상 F급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저 입이 너무 얄미웠다.

그때 지화자가 종업원을 다시 한 번 더 불렀다.

“저기, 죄송한데 과일주도 하나 주실래요?”

“네, 손님.”

종업원이 재빠르게 과일주를 내왔다. 지화자는 가볍게 병을 따고는 서이안의 잔을 멋대로 제 앞에 놓았다.

“뭐하는 짓이야?”

“잠깐만요.”

지화자가 서이안이 보는 앞에서 그의 잔에 과일주와 도수 높은 술을 섞어버렸다.

“서이안 씨께서는 술을 이렇게 드신다고 해서요.”

서이안이 꿀꺽 침을 삼켰다.

사람들은 대개 S급 각성자는 주량도 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오해.

당장 지화자만 하더라도 술을 잘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서이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화자 만큼 주량이 약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강한 것도 아니었다.

특히나 그는 서로 다른 종류의 술을 섞은 것에 약했다.

“자, 여기요.”

지화자가 과실주와 정체 불명의 술을 섞은 잔을 서이안에게 내밀었다.

서이안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잔에 입술을 대면 그 순간 죽어버릴 것이라고. 신체적으로 죽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말이다.

섣불리 잔을 쥐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지화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무구하게 물었다.

“혹시 술을 잘 하지 못하시나요? 서이안 씨께서는 애주가라고 들으셨는데.”

도대체 누가 그래?!

서이안이 당장에라도 그렇게 따져 묻고 싶었지만.

“술 약하시면 말해주세요. 폐급인 제가 기꺼이 대신 마실게요.”

지화자의 말에 그는 결국 잔을 쥘 수밖에 없었다.

‘나이스.’

지화자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서이안이라면 저 잔에 들어있는 것을 한 모금만 마셔도 술에 취해 곯아떨어질 거다.

그리고 지화자의 예상대로.

“어, 음. 저기, 서이안?”

쿵!

잔에 입술을 살짝 가져다 대었던 서이안은 그대로 테이블 위에 쓰러져버렸다.

“아직 안주도 안 나왔는데 벌써 죽으셨네요.”

지화자가 잔에 과일주를 따르며 웃었다. 유은영은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럴 목적이었군요?”

“그럼, 제가 서이안 길드장님이랑 같이 시시덕거리려는 줄 알았어요?”

“설마요.”

유은영의 대답에 지화자가 픽 웃고는 종업원을 불렀다.

“맥주 한 병 추가할게요. 잔도 하나 새로 가져다주시고요.”

그 말에 유은영이 놀라 물었다.

“술을 더 시켜요? 지금도 충분한 것 같은데.”

“저건 서이안 길드장님 죽이려고 시킨 거예요. 저희끼리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걸 시켜야죠.”

“하긴.”

곧 맥주가 나왔다. 지화자가 새 잔에 맥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유은영 씨야 말로요.”

유은영이 헤실거렸다.

“저 때문에 같이 밤도 새시고,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요. 사실 팀장님께서 열심히 파일 복구하고 계실 때 잠깐 잤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지화자가 말했다.

“그보다 여기 어때요?”

“좋네요.”

유은영이 맥주를 홀짝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거든요. 너무 화려한 것 같기도 했고, 사람들 시선이 계속 느껴져서 불편하기도 했는데…….”

화려한 인테리어에는 금방 익숙해졌고 사람들의 시선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다 랭커 분들이니까요. 아님, 저처럼 랭커 옆에 붙어서 놀러 오는 사람들이거나요.”

그 말에 유은영이 픽 웃었다.

“자주 왔었나 봐요?”

그 질문은 ‘유은영’이 아닌, 지화자에게 묻는 말이었다.

지화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자주 왔었어요. 아주 가끔씩이요.”

서이안 같은 놈이 아니고서야 이 술집 안에서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잔뜩 취한 채로 휴대폰을 들이밀거나,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당연히 없었다.

지화자는 그게 마음에 들어 생각날 때마다 이곳을 찾아왔었다.

“그런데 누구랑 같이 오는 건 처음이네요.”

지화자가 유은영에게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건배라도 하자는 듯이 말이다.

유은영은 입술을 달싹이며 미소를 그렸다.

“둘이 오니까 재미나죠?”

지화자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에 유은영이 키득거리며 웃고는 말했다.

“자주 오도록 해요.”

서로의 몸을 완전히 되찾게 된다고 하더라도.

“내년에 여기 자주 오자고요, 같이.‘

유은영이 자신의 잔을 들어 지화자의 잔에 가볍게 부딪쳤다.

맑은 소리가 짠, 하고 울렸다.

유은영이 맥주를 깔끔하게 비우고는 말했다.

“그때는 서이안이 없었으면 하네요. 앞에서 저렇게 자고 있다니, 민폐도 저런 민폐가 없다니까요? 누구 친구인지.”

그 누구가 바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을 깨달은 지화자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 아니에요.”

“알아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유은영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목소리를 내었다.

“내년에도 잘 부탁할게요.”

지화자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작게 웃었다.

“내년이 아니라 올해에요.”

“네?”

데앵―!

바깥에서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해를 맞이한 거다.

지화자가 활짝 웃으며 유은영에게 말했다.

“올해도 잘 부탁할게요.”

그건, ’지화자‘가 아닌 유은영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유은영의 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 지화자가 저렇게 티 없이 맑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기도 했고.

“올해도 잘 부탁할게요.”

그 인사를 처음 들어봤기 때문이었다.

“네! 지, 아니.”

순간적으로 ’지화자‘의 이름을 내뱉을 뻔했던 유은영이 황급히 말을 고쳤다.

“유은영 씨.”

그렇게 스물다섯과 스물일곱이던 두 사람은 나이를 하나씩 더 먹게 됐다.

스물여섯과 스물여덟.

새롭게 한 해를 맞은 두 사람은 열심히 잔을 부딪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새롭게 바뀐 해의 12월 31일.

그 때에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니, 있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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