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헉헉, 가쁘게 숨을 몰아내쉬며 유은영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왜 하필 그때 꿈을?’
10년만에 깨어나고 나서 단 한 번도 꾼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지화자야, 일어났어? 나 들어간다? 유은영이 깨우라고 해서 깨우는 거야! 화내면 안 돼!”
어쨌거나 아침이 밝았다.
유은영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의 생애에 있어 가장 끔찍했던 날의 꿈을 꿔버렸다.
악몽도 이런 악몽을 꾸다니.
“후우.”
유은영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땅 꺼지겠어요, 팀장님.”
지화자가 무슨 일 있냐는 듯 그녀를 걱정했다.
걱정이 아닌 타박처럼 들린다는 게 문제였다.
“죄송해요.”
유은영이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은영아, 밥상 앞에서 그렇게 한숨 내쉬는 거 아니라고 했어.”
“맞아요! 그러면 복 날아간다고 했어요!”
“그런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은 거예요?”
“할아버지!”
유은영이 더욱 크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주 땅을 꺼뜨려버리겠다는 듯이 말이다.
지화자가 짧게 혀를 차고는 그녀에게 냉수를 따라줬다.
“한숨 그만 쉬세요.”
“네에.”
유은영이 흐느적거리며 대답했다. 그녀는 출근길에도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결국 보다못한 지화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악몽이라도 꿨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지화자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죽을 상을 하고 있는데 모를 줄 알았어요? 몬스터들이 꿈에서 괴롭히기라도 했나 보네요?”
“그랬다면 차라리 다행이죠.”
유은영이 우울하게 말했다.
“유은영아, 지화자 괴롭히지마. 오늘 많이 이상ㅎ나 것 같아.”
“리아 말이 맞아요. 지화자 누님 오늘 많이 이상해요.”
그 말에 지화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뭘 잘못 먹지는 않았을 텐데, 애가 많이 이상하다.
‘도대체 무슨 꿈 꾼거야?’
어찌됐든 센터에 도착했다.
“저는 카페 좀 들릴게요.”
“같이 갈래요?”
“아니요, 혼자 갈게요.”
유은영이 지화자의 동행을 거절하고는 로비로 걸음을 옮겼다.
카페테리아 근처에 웬 좀비 무리가 서있는 게 보였다.
어제의 소란으로 밤을 꼬박 새버린 기술 관리 부서와 시스템 통제 부서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지화자’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 양갈래로 비켜서줬다.
유은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맙다는 듯 고개를 꾸벅거렸다.
“히이익!”
“지, 지화자 팀장님이 우리한테 고개를 꾸벅거리셨어!”
“처신 똑바로 잘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소리 아닐까?”
“그런 것 같은데.”
저기요, 다 들리거든요?
도대체 저 사람들에게 있어 ‘지화자’는 어떤 존재일까?
매번 궁금해하는 질문이었지만 답은 언제나 같았다.
‘개차반.’
얽혀서 좋을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
유은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오, 지화자 팀장.”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그래도 최악인 컨디션이 더더욱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은영은 웃는 낯으로 자신을 부른 사람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우종문 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에는 잘 들어가셨나요?”
“물론이지.”
우종문이 싱긋 웃었다.
“자네야말로 잘 들어갔는가?”
“네, 부장님.”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안색이 영 아니군.”
“그렇게 보이나요?”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때마침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자네 커피를 마실 줄 알았던가?”
“네, 최근 들어 마시게 됐습니다.”
유은영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고는 우종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먼저 올라가보겠습니다.”
“잠깐.”
우종문이 유은영을 멈춰세웠다.
“같이 올라가지.”
싫은데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유은영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네, 부장님.”
슬프다, 을의 인생.
암만 랭킹 1위라고 해도 상사 눈치 보면서 살아야한다니.
얼마 지나지 않아 우종문 몫의 음료가 나왔다.
“가지.”
“네.”
유은영이 우종문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그렇게 우종문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유은영이 사무실에 도착하기만을 바라고 있을 때였다.
“국장님의 말씀은 너무 신경쓰지 말게.”
“네?”
“유화 이야기를 자네 앞에서 함부로 꺼내지 않았나?”
“아…….”
유은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국장님께서 한 두 번 그런 것도 아니고.”
지화자와 이야기를 한 바, 나화진은 그녀를 만날 때마다 지유화의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았다.
그 말에 우종문이 말했다.
“별 신경쓰지 않는다는 소리처럼 들리는군.”
“그렇죠.”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고작 지유화의 이름 석 자 꺼낸다고 제가 상처받을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 말에 우종문의 입매가 묘하게 비틀어졌다.
“부장님?”
“아무것도 아닐세.”
우종문이 키득거렸다.
“많이 단단해졌구나.”
“네?”
“그냐 혼잣말이었다네.”
띵! 엘리베이터가 멈춰섰다.
“그럼 이만 내리겠습니다. 오늘 중으로 보고서 작성해서 올릴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기다리도록 하지.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나.”
“네, 부장님.”
스르륵,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면서 유은영의 모습이 사라졌다.
우종문은 표정을 굳혔다.
“고작 지유화의 이름 석 자 꺼낸다고 제가 상처받을 사람은 아니거든요.”
까드득, 그가 이를 갈았다.
아니, 그녀가 이를 갈았다.
“우리 동생…….”
가녀린 목소리가 우종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내가 없는 사이에 주제 파악을 잘 못하게 됐구나?”
행복해하는 것도 꼴보기 싫은데, 그런 얼굴이라니.
마음에 안 들어.
띠잉! 엘리베이터가 또 한 번 멈춰섰다.
“아, 부장님.”
지유화가 제 앞에 서있는 남자를 보고는 활짝 웃었다.
***
“아, 피곤해.”
아침부터 부장님이랑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게 뭐람?
“불편해 죽는 줄 알았네.”
유은영이 구시렁거리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뒤늦게 팀원들의 음료도 사올 걸 그랬나, 그런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
“저 왔어요.”
유은영은 언제 컨디션 난조를 보였냐는 듯 사무실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가.
쾅!
닫아버렸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유은영의 두 눈이 떨렸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리아가 얼굴을 빼곰 내밀었다.
“지화자야, 뭐해? 문은 왜 갑자기 닫은 거야?”
“네? 아, 그게 잘못 본 것 같아서요.”
“뭘 봤기에?”
“유은영 씨가 가하성 씨의 이마에 다정하게 붕대를 감아주고 있는 모습을 봐서요.”
리아가 두 눈을 데굴 굴리고는 말했다.
“정확하게 봤는데?”
“네?”
“정확하게 봤다고.”
리아가 그렇게 말하고는 유은영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유은영아! 지화자 잡아 왔어!”
“잘했어.”
유은영이 입을 쩍 벌렸다.
지화자가 가하성의 이마에 손수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잘못 본 게 아니었다는 소리.
유은영이 멍하니 두 눈을 끄벅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렷다.
“두 사람, 뭐예요?! 아니 그보다 가하성 씨! 다치셨어요?”
“그렇게 심하게 다친 건 아니에요. 붕대 감을 필요 없는데 유은영 씨께서…….”
“잘못두면 덧날 테고 그럼 제가 고생할 테니까요.”
“어차피 폐급이면서, 아아악!”
가하성이 이마에 가해지는 악력에 비명을 지렀다.
“다 됐어요.”
지화자가 붕대에 매듭을 꼭꼭 지어주고는 싱긋 웃었다. 그녀가 보이는 웃음에 가하성이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핑크빛 기류따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유은영은 그에 안도하면서 가하성에게 물었다.
“가하성 씨, 어쩌다 다친 거예요? 어제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잖아요?”
“고아원 애들이 화가 많이 났더라고요.”
“네?”
“애들이 던진 장난감에 맞았어요.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면서 아주 난리도 아니었던지라.”
가하성이 목언저리를 긁고는 심들어하게 말했다.
“신경쓰지마세요.”
“네에.”
유은영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팀장님, 어제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아니요, 뭘요.”
유은영이 활짝 웃었다.
“저야말로 가하성 씨 덕분에 살았는걸요? 가하성 씨 아니었으면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하하호호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지화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출근 때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는 얼굴이더니, 아주 살아났다. 살아났어.
‘설마…….’
지화자가 가하성과 유은영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안 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간에 어제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맑은 하루가 시작됐다.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맑은 날은 아니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