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속이 들끓었다.
당장에라도 나화진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F급, 아니. D급 힐러 ‘유은영’이다.
눈 앞의 남자를 죽일 힘따위 없는 약한 각성자.
그게 바로 지금의 자신이었다.
말이 없는 그녀에게 나화진이 입을 열었다.
“많이 놀랐나 보군.”
지화자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봤다. 나화진은 그녀를 지나쳐가며 어깨를 두드렸다.
“고민할 시간을 주겠네. 아,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어깨를 두드리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화가 살아있다는 것을 지화자 팀장에게 말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네.”
지화자 팀장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나지막하게 덧붙이는 목소리에 지화자가 싱긋 웃었다.
“아무렴요.”
그러면서 그녀는 말했다.
“저는 제 주제를 잘 알거든요.”
“그렇다니 다행이지만.”
나화진이 ‘유은영’의 어깨를 세게 끌어쥐었다. 그의 손이 닿는 곳을 중심으로 타들어가는 고통이 느껴졌다.
지화자가 이를 악물었다.
‘이 빌어먹을 노친네가.’
암만 자신을 못 믿겠다고 해도 그렇지.
힘을 사용할 게 뭐란 말인가!
나화진이 싱긋 웃었다.
“혹시 모르니 말이네. 내 힘은 잘 알고 있겠지?”
나화진의 힘은 각성자들 사이에서 ‘노예 계약’이라 불렸다.
일방적으로 걸 수 있는 제약.
한 사람에게 하나의 제약만 걸 수 있다고 하지만, 거부할 수도 지울 수도 없다는 점에서 괴장히 성가신 힘이었다.
나화진은 지금 ‘유은영’에게 그 힘을 사용한 거였다.
그녀가 ‘지화자’에게 지유화의 생존을 알리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럼, 나는 이만가보지.”
나화진이 ‘유은영’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가 병실을 나가자마자 지화자가 손을 들어 어깨를 어루만졌다.
화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아마 나화진의 표식이 새겨져 있으리라.
“젠장. 언니가 보면 난리나겠네.”
분명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했다면서 잔소리를 할 터.
지화자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엎지러진 물.
지화자는 유은영이 아닌 자신이 나화진과 이야기를 나눠서 다행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유은영이었다면 전전긍긍해하며 어쩔 줄 몰라했을 테니까.
그보다.
“유화가 자네를 보고 싶어한다네.”
지유화가 왜 ‘유은영’을 보고 싶어하는 걸까?
그녀에게 있어 ‘유은영’은 하찮은 D급 힐러일 뿐일텐데.
“이 몸을 차지하려고 그러나?”
그것도 아님.
‘유은영’을 이용해서 ‘지화자’를 공격하려고?
뭐가 됐든 우스웠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하더니, 죽기 전과 똑같이 행동하는 꼴이라니.
지화자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는 우종문을 눈에 담았다.
“부장님.”
우종문은 지유화의 실체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야, ‘더 완즈 인 더 서울’의 실상을 밝힌 것이 바로 그였으니 말이다.
“부장님께서는 도대체 왜 저딴 인간한테 국장 자리를 넘겼던 거예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인간 힘에 당하기라도 했던 거예요? 국장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제약이라도 걸었대요?”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 *
“지화자 씨, 일어나세요.”
어깨를 흔드는 손에 지화자가 미간을 좁히며 눈을 떴다.
어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한국 종합 병원을 나온 후, 센터로 돌아와 업무를 처리했다.
그후 전남지부와 게이트 공략 건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을 유은영에게 알려줬던 것 같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기절하다시피 잠든 것 같은데.’
지화자가 벅벅 머리를 긁었다.
“언니, 지금 몇 시야?”
“오전 8시요.”
“뭐?!”
지화자가 벌떡 일어났다.
출근 준비하기 빠듯한 시간에 지화자가 버럭 소리 질렀다.
“왜 안 깨웠어?!”
“그야, 지화자 씨 어제 하루종일 피곤해하셨잖아요. 그리고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신 것 같아서요.”
“내가?”
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몽이라도 꾸시는지 계속 앓으시던데요? 리아 씨랑 라이 씨가 엄청 걱정했어요.”
“내가 그랬단 말이야?”
“네.”
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컨디션 안 좋은 것 같으면 오늘 오전 반차내고 쉬세요. 오후에 오빠랑 같이 데리러 올게요.”
“아니야, 됐어.”
지화자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아랑 라이는?”
“아침먹고 있어요. 사실 저도 살짝 늦잠을 자서요.”
유은영이 헤실거렸다.
“어쨌든 일어나실 거면 어서 일어나세요. 아침 드셔야죠.”
“됐어. 입맛 없어.”
지화자가 목언저리를 꾹꾹 누르고는 말했다.
“출근 준비할 테니까 나가 있어. 금방 나갈게.”
“네에.”
유은영이 지화자의 방을 나왔다.
그녀가 나오기 무섭게 리아와 라이가 물었다.
“지화자야, 유은영은?”
“일어났어요.”
“은영 누님 괜찮으셔요?”
“네, 괜찮아요.”
유은영이 리아와 라이의 질문에 차례대로 대답해주고는 말했다.
“아침 다 드셨어요?”
“응!”
“네!”
리아와 라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유은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터폰을 확인했다.
“헉!”
유은영이 경악하며 입술을 오므렸다.
“지화자야, 왜 그래?”
“왜 그래요, 누님?”
“어, 음.”
유은영이 두 눈을 데굴 굴렸다.
아침부터 누가 찾아왔나 했더니, 오랑우탄이었다.
그러니까 유승민 말이다.
‘저 인간이 여기는 왜!’
왜 아침부터 할 일 없이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센터로 출근이나 하지!
띵동―!
유은영이 당황하는 사이 다시 벨이 울렸다. 결국 그녀는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현관문을 열었다.
아주 살짝 말이다.
“역시 안에 계셨군요?”
유승민이 반갑게 인사했다. 유은영은 그러지 못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요?”
날선 목소리가 절로 튀어나갔다.
“급한 일이 아니면 센터에서 이야기 나누죠.”
“급한 일이니까 찾아왔죠.”
그러니까 문 좀 열어 달라는 듯 유승민의 두 눈을 빛냈다.
당연히 어림도 없었다.
유은영이 유승민을 노려보며 입을 열려던 그때.
“지화자 팀장님? 뭐하세요?”
지화자가 출근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아, 그게.”
유은영이 삐질거리는데 유승민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은영아, 좋은 아침이야.”
지화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오빠?”
라는 소리에 유승민 역시 얼굴을 구겼지만 그는 곧바로 표정을 풀었다.
“응, 나야. 혹시 센터로 이미 출근한 거면 어쩌나 걱정했어.”
유은영은 생각했다.
‘지화자 씨, 일찍 깨울걸.’
간밤에 잠을 계속 설친 것 같아 최대한 자게 했는데, 그 결과가 유승민의 방문이라니.
유승민의 반응에 당황한 건 유은영과 지화자뿐만이 아니었다.
“지화자야, 유은영아. 같이 살고 있다는 거 저 오빠한테 들켜도 돼?”
“맞아요. 괜찮아요?”
아차!
그러고보니 리아와 라이에게 자신이 ‘유은영’과 함께 사는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었다.
유은영이 황급히 말했다.
“유승민 씨는 괜찮아요. 유은영 씨 오빠니까요.”
지화자가 그 말을 거들었다.
“맞아. 내가 진작 말했어. 지화자 팀장님이랑 같이 살고 있다고.”
“아아.”
다행히도 리아와 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보다 오빠,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야?”
“그렇게 이른 시간은 아닌데.”
“괜히 말꼬리 잡지 말고.”
지화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
그 말은 마치, ‘급한 일로 자신을 찾아온 거야 할 거다’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들렸다.
유승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남지부에서 연락이 왔어. 지금 당장 내려와달라고.”
“뭐?”
“게이트 출연 시간에 변동이 생겼나봐.”
“그러기도 해요?”
유은영이 놀라 물었다. 그에 대답해준 건 지화자였다.
“네, 가끔 바뀌기도 해요. 흔한 일은 아닌데.”
지화자가 머리를 긁적이고는 유승민에게 물었다.
“그래서 언제로 바뀌었는데?”
“오늘 오후 1시.”
유은영이 멍하니 입을 벙긋했다.
오후 1시라니?
그것도 오늘 오후 1시라니!
순천으로 내려가자마자 게이트 공략에 들어가야할 판이었다.
“그쪽에서도 꽤 당황한 모양이더라고요. 그런데 지화자 팀장님도 은영이 너도 전화를 안 받으니 얼마나 속이 탔겠어?”
유은영이 황급히 휴대폰을 확인했다. 유승민의 말대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와있었다.
지화자 역시 마찬가지.
유승민이 ‘지화자’를 보며 활짝 웃었다.
“마침, 제가 출근했을 때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와서 다행이지 뭐에요?”
안 그러면 전남 지부 속이 많이 타들어갔을 거라면서 유승민이 입을 열었다.
“가죠? 차 끌고 왔어요.”
유은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유롭게 움직이겠다 싶었더니 완전 엉망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