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유은영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지화자는 그것이 감격스러운 한편 더없이 쓸쓸했다.
하지만 그녀는 말했다.
“동감이야.”
지화자 역시 유승민을 저렇게 만든 건 지유화라고 생각하는 상태였다.
애초에 그녀가 아니라면 유승민이 저렇게 당할 리가 없었다.
“지유화는 분명 일부러 유승민을 살려둔 걸 거야. 경고의 의미로 말이지.”
자신과 손을 잡지 않는다면 제 주변 사람이 무사하지 못할 거란 경고로 말이다.
“내가 언니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걸 알았다면 이런 일은 벌이지 않았을 거야.”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유승민을 그냥 죽여버렸을 거다.
그러는 편이 더 효과적이란 걸 알았을 테니.
‘이런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
말했다가는 유은영의 분노만 더 불러일으킬 거다.
“사람을 붙여야겠어요.”
“누구한테? 나화진 국장한테 사람을 붙이는 건 소용 없을 거야.”
그의 곁에는 지유화가 있었다.
“나화진 국장님 말고, 오빠랑 엄마한테요.”
“아아.”
지화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언니한테 소중한 사람이라고 해봤자 유승민 씨랑 어머니밖에 없을 테니까.”
“오빠랑 엄마 말고도 더 있거든요? 연락이 끊겨서 그렇지!”
“그런 걸 없다고 하는 거야.”
“어쨌든요!”
유은영이 빽 소리 질렀다, 그에 지화자가 피식 웃었다.
“기분 좀 풀렸나 보네?”
유은영이 입술을 씰룩였다.
“지유화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예요.”
“그 마음은 변하지 마.”
부디 그래줬으면 했다.
지유화를 죽이는 데 있어 유은영이 주저하게 된다면 큰일이니까.
유은영은 불퉁하게 물었다.
“센터 쪽 사람들을 활용하는 건 어렵겠죠?”
유승민과 자신의 어머니에게 센터의 사람을 붙여도 되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지화자는 대꾸했다.
“센터는 지유화의 안방이나 마찬가지야.”
언제 어디에서 그녀에게 빙의된 사람이 나타날지 모른다.
지화자는 그런 이유를 들어 센터의 사람을 활용하는 데 반대했다.
“그렇다면…….”
유은영이 고민하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 * *
“의뢰? 누가? 네가?”
“네, 서이안 길드장님.”
유은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을 뒤이어 지화자가 목소리를 내뱉었다.
“값은 충분히 지불하겠습니다. 대신, 제 오빠와 어머니를 지켜주기를 바랍니다.”
“허어.”
서이안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지화자’에게 물었다.
“폐급 힐러야, 뭐. 저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겠는데, 지화자 너는 왜 그렇게까지 나서?”
“소중한 팀원의 일이니까요.”
“보통 팀원의 일에 이렇게까지 나서나?”
그것도.
“너랑 나랑은 앙숙인데 말이야.”
서이안이 비아냥거리며 ‘지화자’를 조롱했다.
“설마, 저 폐급 힐러의 오빠가 네 남자 친구라도 돼? 그 찌라시가 사실이었던 거야? 응?”
“닥쳐.”
지화자가 차갑게 일갈했다.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자자, 그만!”
유은영이 빠르게 화제를 전환 시켰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서이안과 지화자가 한바탕 크게 다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이안 길드장님. 제 의뢰, 받아주실 거예요? 안 받아주실 거예요?”
“받겠습니다.”
“야! 서도운!”
서이안이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뭔데 받겠다고 지랄이야?”
“스콜피언의 돌격 1팀의 팀장으로서 받겠다고 한 겁니다.”
서도운이 무덤덤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길드장님께서도 지화자 팀장님의 의뢰를 받으실 생각이었잖습니까?”
“아니거든!”
콧대 높은 지화자가 자신에게 의뢰를 맡긴다니!
흥미가 샘솟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야, 그 지화자가 맡기는 의뢰이지 않은가? 단순 경호 임무처럼 보이지만,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게 분명했다.
“나는 안 맡을 거야. 서도운, 저 놈 말은 무시해.”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서이안 길드장님께서 의뢰를 맡을 생각이 없다면, 서도운 씨께 따로 부탁하겠습니다.”
“뭐?”
“역시 값은 충분히 지불할 겁니다. 괜찮겠죠, 서도운 씨?”
“네, 지화자 팀장님.”
“잠깐!”
서이안이 황급히 두 사람의 말을 끊었다.
“내 길드원한테 뭐 하는 짓이야?”
“서이안 길드장님께서 거절한 일을 서도운 씨께 부탁하고 있는 것뿐인데요?”
무슨 문제라도?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에 서이안은 어안이 벙벙했다.
지화자가 원래 저렇게 재수 없는 녀석이었나?
‘재수 없는 녀석이었기는 한데.’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아무튼.
“안 돼! 우리 길드원이 위험한 일에 처하는 건 반대야!”
“길드장님, 지화자 팀장님께서 부탁하시는 일은 유은영 씨의 가족분을 보호하는 단순 경호 임무입니다.”
“이 멍청아! 정말 그런 거라면 지화자가 충분히 할 수 있겠지!”
그럼에도 그녀는 스콜피언에게 굳이 의뢰를 맡긴다고 했다.
“분명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말걸? 서도운, 좋게 말할 때 내 말 들어.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꼰대.”
“뭐?”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서도운이 그렇게 말하고는 ‘지화자’를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그는 분명 사과를 보내고 있었다.
‘부탁을 들어주기 어려운 거겠지.’
암만 그라고 해도 서이안의 뜻을 꺾기에는 어려울 테니.
하지만 유은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스콜피언 측에 의뢰를 맡겨야했다.
제 가족의 안위를 책임질 수 있는 길드는 스콜피언이 제격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유은영은 물었다.
“그럼, 솔직하게 말해주면 의뢰를 받아주실 건가요?”
“역시 숨기는 게 있었나 보네?”
서이안이 비딱하게 웃었다.
“말해봐. 들어주고 판단할 테니.”
“알겠어요. 그럼, 서도운 씨. 죄송하지만 자리를 좀 비켜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서도운이 자리를 비켰다.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서도운을 치워버린 거야?”
“치운 거 아니에요.”
유은영이 불퉁하게 대꾸하고는 입을 열었다.
“유은영 씨, 말해줘도 되겠죠?”
“네, 하지만 좋은 선택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지화자가 비웃음을 흘렸다.
“팀장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서이안 길드장님께서는 지유화 씨를 워낙 좋아하시는 분이라.”
“그, 그걸 어떻게……!”
서이안이 놀라 입을 뻐금거렸다. 그런 그에게 유은영이 말했다.
“서이안 씨, 지금부터 지유화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 * *
‘지화자’가 돌아갔다. ‘유은영’을 데리고.
“그럼, 유승민 씨의 부상이 모두 회복되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병자 한 명을 남겨둔 채, 두 사람은 그렇게 떠나버렸다.
“길드장님, 지화자 팀장님과 유은영 씨 두 분 모두 돌아갔습니다. 다시 올 것 같지는 않군요.”
“그럴 거야.”
유승민의 부상이 모두 회복되면 다시 찾아온다고 했으니.
서이안이 초조한 낯으로 입술을 물어뜯었다.
“길드장님? 왜 그러십니까?”
“서도운.”
“네.”
“너는 죽은 사람이 돌아오면 어떨 것 같냐? 그러니까, 그 죽은 사람이 너한테 소중한 사람이었다면 어떨 것 같아?”
느닷없는 질문에 서도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는 곧 성실하게 대답해줬다.
“기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내 마음은 왜 그러지 않는 걸까?
서이안이 치미는 물음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지화자’가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그 손에 죽은 줄 알았던 지유화가 살아있다니. 그것도 사지 멀쩡하게 말이다.
“길드장님?”
“아니야, 아무것도. 내가 조금 전에 한 이야기는 잊어줘.”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지화자’는 지유화가 살아있다는 중요한 사실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이야기도 들려줬었으니.
“유승민 씨 좀 보고 있어 줄래?”
“결국, 지화자 팀장님의 의뢰를 맡기로 한 모양이군요.”
“그런 건 아니고.”
서이안이 더 묻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에 서도운은 결국 방을 나섰다.
그렇게 홀로 남게 된 서이안은 생각에 잠겼다.
지유화.
자신이 가장 동경하던 사람.
한때는 그녀의 옆자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란 사실에 분노하기도 했었다.
그런 그녀가…….
“잘 생각하세요, 서이안 씨. 당신이 아는 것과는 다르게, 지유화는 결코 선량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유승민을 저렇게 만든 범인임과 동시에 키메라를 이용해 제2의 개벽을 꿈꾸고 있다니.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지화자가 왜 그런 거짓말을 굳이 자신에게 늘어놓겠는가!
‘내가 지유화 님을 좋아하고 있는 걸 뻔히 아는데.’
지화자의 성격상, 그런 이야기를 해봤자 자신에게 득 될 일이 없는 걸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도 그녀는 제게 지유화에 대해 알려줬다.
“빌어먹을.”
역시, 마음에 안 드는 여자다.
지화자도.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곁에 붙어 있는 유은영도.
“아, 짜증 나.”
동경하던 이상이 거짓이란 것을 알게 된 것만큼 허무한 게 없다고 하더니.
서이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 *
“잘한 짓일까요?”
“유승민 씨를 스콜피언에 두고 온 거? 아님, 서이안에게 지유화에 대해 알려준 거?”
“둘 다요.”
유은영이 창가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서이안 씨께서 배신하면 어쩌죠? 저희 오빠를 인질로 붙잡고 협박할 수도 있잖아요.”
“물론,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서이안은 똑똑한 놈이야.”
“그렇다고 해도 지유화 씨를 엄청 좋아하시잖아요.”
그가 자신들을 배신하고 들려준 이야기를 지유화에게 일러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가 지유화를 찾는다는 가정하에.
유은영의 걱정에 지화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왜 갑자기 그렇게 웃으세요?”
“언니가 아직 서이안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지화자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서이안은 지유화를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야. 이를테면 동경이지.”
다르게 말하면 위인에 대한 선망이었다.
“지유화가 옛날에 침몰하던 배를 구한 적이 있어. 서이안은 바로 그 배에 타고 있었고.”
그때부터 서이안은 지유화의 팬으로 그녀를 좋아하게 됐다.
“그 자식 눈에는 지유화가 구세주처럼 보였을 거야.”
그런데 그 구세주가 사실은 악랄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란다.
“서이안은 배신하지 않을 거야. 지유화를 찾아 나설 가능성은 있겠지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확신이라…….
지화자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는 그 자식을 믿는 것뿐이야.”
오직, 지유화에 대한 선망만으로 랭킹 2위의 자리까지 올라온 그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