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야, 지화자! 유은영 씨 저렇게 엄한 사람한테 맡겨도 돼?”
지화자가 서이안을 흘긋거렸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언니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대?”
“처음부터 제대로 불러줬거든!”
“웃기시네.”
조소를 흘리며 지화자가 말했다.
“괜찮아. 유은영 씨를 맡긴 사람, 우리 센터 쪽에서 그나마 실력 있는 힐러거든.”
“아무리 그래도!”
“걱정마. 저 인간이 언니한테 못할 짓을 할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생각이 제대로 박힌 인간이라면 같은 힐러를 해하려고 하지 않을 거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인력이 바로 ‘힐러’였으니까.
“그러니 걱정말고 가자.”
“너는 걱정도 안 되냐?”
“뭐가?”
“유은영 씨 말이야.”
서이안이 다소 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는 잘 알고 있잖아. 내 독이 얼마나 지독한지.”
“그래, 아주 잘 알고 있지.”
서이안과 몇 번 결투를 치른 적 있는 지화자였다.
그 결투는 모두 지화자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서이안의 독에 의해 지독한 통증에 시달려야했었다.
“그래도 믿어.”
유은영이라면 분명 잘 이겨낼 거라는 것을.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가 할 일을 하자.”
멀지 않은 곳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째질듯한 사람들의 비명도 시끄럽게 밤을 울리기 시작했다.
“가자.”
서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땅을 박차며 키메라가 나타난 곳으로 향했다.
* * *
“…영아, 유은영!”
거듭해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유은영이 힘겹게 눈을 떴다.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앉았지만 유은영은 두 눈을 비비며 억지로 잠을 깨웠다.
“이 녀석아, 그렇게 잠이 와?”
유은영이 멍하니 물었다.
“아빠?”
“그래. 우리 은영이, 못본 사이에 아주 잠꾸러기가 다 됐구나.”
중년의 남성이 인자하게 웃었다.
“다 컸어, 정말.”
“…진짜 아빠야?”
“그럼!”
남자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제 딸의 머리를 짓궂게 헝클어뜨렸다.
“너한테 나말고 다른 아빠가 어디 있다고 그래?”
그러고는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혹시 정 여사가 다른 남정네를 남편으로 들인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유은영이 자신도 모르게 빼액 소리 질렀다.
그녀가 울먹이며 말을 덧붙였다.
“엄마한테는 아빠 뿐이라고!”
남자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래, 우리 정 여사한테 일생의 남자는 나뿐이겠지!”
그러면서 남자는 제 부인과 어떤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이 어떻게 결실을 맺었는지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 딸.”
남자가 자신을 꼭 닮은 딸의 손을 쥐고서 물었다.
“많이 힘들었지?”
유은영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많이 힘들었다고.
“많이 아팠고.”
정말 많이 아팠다고.
그렇게 울음을 터트리며 아버지에게 설움을 쏟아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중년의 남성은 유은영이 삼키고 있는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딸을 달랬다.
“은영아, 쉬고 싶으면 쉬어도 괜찮아. 여기, 나름대로 괜찮은 곳이니까.”
유은영이 있는 공간은 온통 백색으로 칠해져 있는 곳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그곳에서 남성은 말했다.
“우리 딸, 너무 고생했던데 푹 쉬어야지.”
그 말에 유은영이 입술을 파르르 떨다 사과했다.
“미안, 아빠.”
사과를 내뱉은 그녀가 곧 몸을 일으켰다.
“나중에 쉴래.”
중년의 남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 낯으로 물었다.
“그래도 되겠어?”
“응, 그래도 돼.”
걱정이 가득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유은영은 남자와 똑같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많이 힘들었고 많이 아팠지만.”
그리고.
“또 계속 그럴 테지만.”
유은영이 눈가에 맺혀 있던 것을 닦아내고는 말했다.
“나중에 쉴래.”
단호하면서도 힘입게 대답하는 목소리에 남자가 싱긋 웃었다.
“그래, 그러렴.”
그러고는 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영아.”
딸의 손을 꼭 쥐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빠는 너 구한 거 후회 안 해. 그러니까 너도.”
“후회 안 할게.”
자신의 아버지는 제가 환상 속에 갇혀 그를 찾으며 울었던 것을 모두 봤었나 보다.
유은영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나중에 올게, 아빠.”
“아니, 오지마.”
남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평생 살아.”
“그건 싫어!”
유은영이 질색하고는 헤실거리며 웃었다.
“잘 지내고 있어야해.”
“그래.”
남자가 싱긋 웃었다.
“너도 잘 지내렴.”
될 수 있으면 누릴 수 있는 거 모두 누리고, 아프지 말고, 힘든 일은 눈치껏 빼고.
남자가 치밀어 오르는 말을 겨우 삼키고는 딸아이를 배웅했다.
“잘가렴.”
유은영의 앞에 문이 생겼다.
그녀는 제 아버지의 인사와 함께 그것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번에 그녀의 앞에 나타난 광경은.
“유은영 씨! 정신이 들어?!”
현실이었다.
* * *
유은영이 느릿하게 눈을 굴리고는 저를 애타게 부른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혜나 팀장님?”
“그래! 나야!”
이혜나가 크게 안도했다.
“정말이지, 유은영 씨 조금 전에 죽을 뻔했다고 알아?!”
유은영이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며 대답했다.
“네… 알아요…….”
“뭐?”
이혜나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지만 유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상체를 일으켰다.
“뭐하는 거야? 어서 도로 누워!”
“괜찮아요.”
유은영이 담담하게 대답하고는 제 몸에 힐을 걸었다.
따뜻한 기준이 번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게 됐다.
온 몸을 괴롭히던 서이안의 독이 완전히 해독된 것이다.
“지, 지금 뭐야? 유은영 씨, 자기 몸에 지금 힐을 건거야?”
“네.”
유은영이 손등에 꽂혀있던 주삿바늘을 제거하고는 대답했다.
“저 F급에서 벗어난 거 알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요.”
“당연히 알고 있었지!”
하지만 겨우 E급이나 잘봐줘도 D급 정도 되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조금 전에 본 광경은 E급이나 D급의 힐러로 볼 정도가 아니었다.
애초에 죽어가던 그녀가 완전히 쌩쌩해졌지 않는가!
“그, 도, 독은? 서이안 길드장님의 독에 당했다고 하던데?”
“아, 그거요?”
유은영이 자신의 몸을 점검하고는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독됐어요.”
“뭐?”
“해독됐다고요.”
유은영이 주섬주섬 겉옷을 챙겨 입었다.
“그럴 리가!”
이혜나가 빼액 소리 질렀다.
“서이안 길드장님의 독이 평범한 독인 줄 알아?! A급 힐러 여러 명이 달라붙어야만 해독이 되는 독이야!”
“알아요.”
유은영이 그렇게 대답하고는 창 밖을 쳐다봤다.
곳곳이 불타오르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단순한 화재는 아니었다.
‘키메라.’
지유화의 죽음으로 풀러난 그것들이 도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리라.
“유은영 씨, 지금 뭐하는 거야?”
“지원 나가려고요.”
유은영이 병실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저는 0팀 소속이잖아요. 다른 팀원들 모두가 싸우고 있는데 저 혼자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요.”
더군다나 몸도 완전히 멀쩡해졌는데 말이다.
“안 돼!”
하지만 이혜나가 그 앞을 막아버렸다.
“지화자 팀장님께서 유은영 씨 제대로 보살피라고 했단 말이야!”
그런 소리는 한 적 없었다. 잘 좀 부탁한다고만 했었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유은영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팀장님.”
성큼, 이혜나의 앞에 다가선 그녀가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팀장님께서 왜 이곳에 있는지 제가 모를 줄 아나요?”
A급 힐러 이혜나가 이곳 병원을 지키고 있는 이유.
“환자들 치료하는 거 도와주려고 그러는 거 아니잖아요.”
“무, 무슨 소리를.”
“몬스터를 맞딱드리게 될까봐, 그게 무서워서 이곳에 있는 거잖아요.”
지원이라는 이름 하에 말이다.
유은영이 이혜나의 어깨를 잡고서는 입을 열었다.
“저는 안 무서워요.”
몬스터를 마주치게 되는 것도, 그로 인해 다치는 것도.
유은영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유은영이 이혜나를 지나쳐 병실을 빠져나갔다. 이혜나는 멍하니 입을 뻐금거리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를 뒤로하며 유은영은 병원 밖으로 나왔다.
“으아앙! 엄마! 엄마아!”
“누, 누가 우리 아빠 좀 살려주세요! 선생님! 의사 선생님!!”
“나 좀 봐줘! 나부터 좀 봐달라고! 내 말 안 들려?!”
“흐아아앙!”
병원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미처 응급실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환자들과 그들의 보호자들이 곳곳에서 목소리를 토해내는 중이었다.
유은영은 그 가운데를 지나가며 자신의 힘을 터트렸다.
“어……?”
죽어가던 소리를 내고 있던 누군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아파! 안 아프다고!”
피가 멈추고 상처가 치료됐다.
다른 환자들 역시 마찬가지.
이번에 병원 밖은 다른 의미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유은영은 그 소란을 뒤로 하며 걸음을 옮겼다.
쿵! 쿠궁!
멀지 않은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유은영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바로 저곳에 지화자가 있음을.
-Name: 유은영(劉隱映)
-Birth: 20X1. 12. 26
-Local: 82_대한민국
-Rank: S급
-Number: 1982
F급 힐러였던 유은영은 그렇게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