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11화 (11/112)

〈 11화 〉 이지아 (11)

* * *

한밤중에 협회장의 의뢰를 받은 한유정이 이지아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 앞 가로등 길에 주저앉은 한유정이 한참을 망설였다.

천살성을 각성한 후.

두 손에 피를 묻힌 건 수십번도 넘었지만 자신의 의지로 직접 살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갈등하던 한유정이 양손으로 볼을 짝짝 때렸다.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결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한유정이 기척을 숨기고 집안으로 침입했다. 집안에서 두 명의 기척이 느껴진다.

한 명은 손발이 쩌릿쩌릿해질 정도로 난폭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S급 헌터 이지아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옆방에서 미약한 기운이 느껴졌다.

한유정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쌕쌕──

침대에 누운 남자가 잠에 푹 골아 떨어져 있었다. 협회장에게 받은 사진과 남자의 외모가 일치했다.

김현우.

그 남자였다.

한유정이 김현우의 목에 손날을 가져다 댔다.

죽이는 건 간단한 일이다.

부족한 건 결단력.

이번만큼은 천살성과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로 죽이는 것이다.

째깍째깍.

망설이던 한유정이 손날을 휘두르려던 찰나였다.

덜컹!

이지아가 갑자기 김현우의 방으로 쳐들어왔다.

그녀가 날카로운 눈매로 주변을 훑어봤다.

“……착각인가?”

고개를 갸웃거린 이지아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나갔다.

김현우의 그림자가 일렁거리더니 한유정이 불쑥 튀어 올라왔다.

그녀가 식은땀을 흘리며 멈춘 숨을 내뱉었다.

‘이지아와 김현우가 붙어있는 동안에는 암살하기 힘들겠어.’

잠깐의 살기를 읽은 이지아가 곧바로 반응했다.

김현우를 죽이더라도 이지아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어 보였다.

‘오늘 천살성을 잠재웠으니까…… 일주일 동안 기횔 노려보자.’

바로 옆방이긴 하지만 설마 일주일 동안 붙어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한유정은 기회를 노리기로 하고 김현우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

사흘이 지나고 한유정은 깨달았다.

‘떨어지질 않네?’

바늘 가는 데 실 따라간다고, 이지아와 김현우가 딱 그짝이었다.

평소에는 말할 것도 없다.

“현우 씨.”

“네?”

“저, 화장실…….”

한유정이 놀란 건 이지아와 김현우가 화장실까지 같이 간다는 것이었다.

‘병신인가?’

이지아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박살 났다.

대한민국 탑랭커라고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는데 하는 짓이 어미 따라다니는 새끼오리나 마찬가지였다.

“현우 씨, 어디 가세요?”

“빨래 걷으려고요.”

“앗, 같이 가요.”

결국 한유정의 인내심도 슬슬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다.

‘벌써 사흘이 지났는데.’

살심은 한 번에 솟구치는 게 아니었다. 약한 불로 주전자를 데우듯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갔다.

아직 사흘이라 멀쩡했지만 일주일째가 찾아오면 또 폭주할지도 몰랐다.

늦은 새벽.

지붕으로 올라간 한유정이 협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유정 양, 소식이 너무 느리군.

“암살할 기회가 없어서요.”

­음, 재촉할 마음은 없네만… 혹시 천살성이 폭주할 때까지 버티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지금 김현우를 죽이면 이지아와 반드시 싸우게 될 수밖에 없어요. 일이 커지길 원하는 건 아니죠?”

­믿겠네.

뚝.

전화가 끊겼다.

한유정은 순간 마음속에서 치밀어오르는 살심을 느꼈다.

협회장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에 반응해 살심이 솟구친 모양이었다.

스읍, 후.

한유정이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다시 김현우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다.

*

다음날.

김현우가 이지아에게 구속복을 입히고 있었다.

‘…!’

김현우의 그림자가 살짝 일렁였다.

당황한 한유정이 자신도 모르게 기척을 드러낼 뻔했다.

“저희 훈련 안 하면 안 돼요?”

“이제 2주도 안 남았어요.”

구속복을 입은 이지아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한유정이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끌게요.”

“네…….”

김현우가 마음의 평화를 껐다. 이지아가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기었다.

갑작스럽게 괴로워하는 이지아.

그리고, 갑자기 치밀어오르는 살심.

‘……?’

한유정이 감정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이런!’

자신도 모르게 기세가 그림자 밖으로 뿜어져 나갔다.

틀림없이 이지아에게 읽혔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다행히 이지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

한유정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조급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봇물 터지듯 몰아치는 살의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변화는 또 갑작스레 찾아왔다.

“시작하죠.”

시간을 재던 김현우가 마음의 평화를 다시 켰다.

‘……!’

일렁이던 살의가 억눌러진다.

한유정이 감정의 급격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김현우가 멋쩍게 말했다.

“다시 시작할까요?”

“……네.”

꺼지고, 켜지고, 꺼지고, 켜지고.

한유정은 변덕스러운 살기에 뇌가 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한유정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천살성의 살의를 억누르고 있어…?’

두근, 두근.

한유정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고작 만약의 가능성.

아직 천살성의 살의가 쌓인 건 나흘째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에 사흘 뒤에도 온전히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면…….

‘만약, 그렇다면…….’

김현우를 바라보는 한유정의 눈동자에 탐욕이 깃들었다.

*

“청문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드디어 청문회가 시작됐다.

어비스 던전 공략대원들부터 각 길드의 길드장까지 모두 참고인 석에 착석했다.

면면들이 모두 휘황찬란한 양반들이었지만, 스포트라이트는 명백히 이지아에게 향해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이번 청문회의 진짜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이지아였으니까.

긴장하며 청문회의 진행을 보고 있으려니까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고갤 돌리자 꼬장꼬장한 얼굴의 노인네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김현우 군? 반갑네.”

익숙한 목소리.

나도 아는 체 해줬다.

“이렇게 직접 뵙는 건 처음이군요, 협회장님.”

“하하, 전화로 대화할 때는 당차더니. 이렇게 보니 아주 예의 바른 젊은이였군.”

지금 전화로만 깝죽거릴 줄 아냐고 비꼬는 건가?

“노친네하고 감정 상해서 멱살 잡고 티격태격하다가 매스컴 탈 일 있겠습니까? 여기 있는 카메라가 몇 대인데요.”

“…직설적이군.”

협회장이 내 옆자리에 섰다.

다른 좋은 자리 다 버려두고 왜 불편하게 이쪽으로 오는 거지.

­화신 길드장님께 먼저 묻겠습니다.

청문회 위원이 화신 길드장에게 질문했다.

­평소 이지아 헌터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시발새끼가.

내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옆의 노인에게 짜증스레 물었다.

“얼마나 먹였습니까?”

“뭐가 말인가?”

“얼마나 처먹였길래 지아 씨 본인도 아니고 길드장한테 저런 질문을 해요?”

화신 길드장이 최대한 이지아에게 불리한 쪽으로 증언하려는 게 눈에 뻔히 들어왔다.

“음, 저거 다 개짓거리에요.”

커피를 쪽쪽 거리며 나타난 변호사가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현우 씨.”

“건욱 씨.”

“반갑습니다, 협회장님.”

협회장이 고개만 까딱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이런 일련의 사고들을 종합해 보자면, 정신이 불안정한 이지아 헌터가 전투에서 실수를 벌여──

“아이고, 협회장님. 그쪽 로펌에 돈 얼마나 주셨어요? 한 오십만 원 쓰셨나?”

변호사가 피식 비웃는다.

“현우 씨보다 먼저 저희 쪽에 의뢰하시지 그랬어요, 협회장님. 후폭풍 최대한 막아보게 바로 기자회견 열어서 머리부터 박으라고 충고드렸을 텐데.”

툭툭, 변호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쳤다.

“괜찮아요, 건욱 씨? 그래도 협회장인데.”

“어차피 이번 사건 끝나면 옷 벗을 노인네가 뭐가 무서워서요.”

옷을 벗어? 협회장이?

“어비스 공략대 실패해서 던전 터진 거 이지아 헌터한테 덤터기 씌우고 자기들만 쏙 빠지려 했는데.”

힐끔 협회장의 안색을 살핀 변호사가 이어 말했다.

“이번 사건에서 이지아 헌터는 결백으로 뜨고 진실 밝혀지면, 후폭풍을 협회장 혼자 감당 할 수 있겠어요?”

그런가?

전문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청문회 위원은 이지아를 제외한 공략대 인원과 길드장들에게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럼 이지아 헌터가 평소에 자해를 습관적으로 했다는 것입니까?

­병력은 남기지 않았지만 길드 상담사와 상담한 결과 우울증 증상을 호소했습니다.

­이태원에 수백억대에 달하는 집을 보유하고…….

무슨 집 가격까지 보고 있어?

질문들의 의도가 너무 뻔했다. 명백히 이지아의 멘탈을 흔들려고 하는 수작질들이었다.

­다음 참고인인 이지아 헌터에게 묻겠습니다.

위원의 말에 이지아가 자세를 가다듬으며 대답을 준비했다. 옆에 있던 협회장이 입을 뗐다.

“현우 군, 지아 양이 S 랭크인지, A 랭크인지가 그리 중요한가?”

“……?”

“이지아 헌터가 원한다면 원래 위치까지 금방 올라갈 수 있을 거네. 랭커였던 실력이 어디 가진 않았잖은가.”

맞다.

이지아의 랭크가 A인지, S인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이지아는 영원히 S랭크일 것이다.

구속복을 구매했을 때, 현재 A 랭크인 이지아를 상담사가 공인으로 인정해줬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손을 내미는걸세. 정말 우연히 나온 기회야. 미처 준비하지 못한 대본을 챙겨주는 척, 지아 양에게 다가가서 말하세. 이번 싸움은 포기하자고. 자네 말이라면 듣지 않겠는가.”

변호사는 여전히 커피를 쪽쪽 빨며 심드렁히 이지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우리의 대화를 못 듣는 것처럼.

“……지아 씨가 인터넷에서 악플 받는 거, 아십니까?”

“잘 알지.”

“최근 유독 심해졌죠. 던전 공략 실패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지아 씨한테 덮어씌웠으니까요.”

찡그려진 눈썹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폈다.

“제가 지금 고작 지아 씨 랭크 때문에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결국 실력이 중요한 업계였다.

이지아는 다시 올라간다.

그것만 보면 긁어 부스럼이다.

협회장과 척을 지면서까지 싸울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협회장도 안일하게 대처한 거겠지.

“앞으로 계속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겠죠. 무엇을 하든 간에 공략을 실패하고 잠수탄 헌터라고요.”

요 한 달간 계속 지켜봤다.

이지아가 악플로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그냥 우리 끝까지 한 번 가봅시다, 협회장님. 지아 씨나 저나 뭐 여기서 더 잃을 게 있겠습니까? 잘 풀리면 명예회복이고 안 되면 원상태지.”

“자네 선택은 그런가.”

협회장이 못마땅한 한숨을 내쉬었다. 묘하게 여유 있는 태도였다.

“사실, 좀 전부터 자네와 나에게는 인식 방해 스킬이 걸려있네.”

“네?”

“자네한테 마음의 평화라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알지. 그걸로 이지아의 멘탈을 추스르고 있다는 것도. 이래 봬도 협회장 아닌가.”

협회장이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자네 선택이 그러니 유감이야. 젊은이답지 않게 담력도 있고, 거래한다면 좋은 친구가 될 거라 생각했네만…….”

“…?”

“자네가 지금 사라지면 지아 양이 어떻게 될 거 같은가?”

어떻게 되긴. 마음의 평화가 사라지면 책상 엎고 난리 치겠지.

“유정 양, 처리하게.”

협회장이 나직하게 말했다. 내 그림자 속에서 고등학생 정도 나이의 여자가 튀어나왔다.

이게 뭐야?

“…….”

여자가 멈춰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협회장이 여자를 불렀다.

“유정 양? 뭐 하는가?”

“…….”

“어서 그 남자를 처리하게, 한유정.”

협회장이 웃는 낯으로 윽박질렀다. 한유정이 협회장을 무시하며 내게 다가왔다.

“아저씨.”

“…?”

“저하고 거래하실래요?”

오늘 나하고 거래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식은땀이 흐른다.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무슨 거래요?”

그림자 속에서 한유정이 튀어나오는 동안 아무도 우리를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옆자리의 변호사마저도.

현재 내 목숨줄을 쥐고 있는 게 누군지는 명확했다.

“협회장 명령은 무시하고 살려드릴게요.”

“대가는요?”

“그냥, 아저씨 옆에만 있게 해주면 돼요.”

한유정의 말에 협회장이 버럭 소리 질렀다.

“한유정!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천살성을 생각해라! 그 남자가 널 도와줄 수 있을 거 같나?!”

한유정이 심드렁히 대답했다.

“되던데요.”

“뭐…?”

“되더라구요. 아저씨 옆에 있으니까 괜찮았어요.”

“천살성을 진정시켰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혼란에 빠진 협회장. 긴장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한유정. 위원의 질문에 대답을 시작하려는 이지아.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선택했다.

“좋아요. 옆에 있고 싶은 만큼 있어요.”

한유정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진짜죠?!”

고개를 끄덕였다.

“꺅!”

한유정이 기쁨의 비명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그럼, 이지아 헌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책임을 지지 않고 잠적한 사건에 대해 설명해주시길 바랍니다.

“본 청문회는 어비스 던전 공략 실패 대한 논제가 우선입니다. 위원님, 부디 관련 없는 제 과거 행적으로 본질을 흐리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일단…….”

변호사가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책상 안 엎었으니까 이기겠네.”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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