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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14화 (14/112)

〈 14화 〉 한예림 (2)

* * *

“방금 통화한 사람, 대체 누구냐구요.”

이지아가 싸늘한 목소리로 추궁한다. 마주친 시선이 착 가라앉아 있다. 이지아가 이런 얼굴도 할 줄 알았나? 섬뜩하단 말로는 부족해져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 한예림이라고, 옛날부터 친했던 친구인데…….”

“친구요?”

시계를 확인한 이지아가 되물었다.

“새벽 1시에 전화를 해요?”

“워낙 친한 녀석이라서요.”

난 이걸 왜 변명하고 있는 거야?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으려니까 이지아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한예림 씨하고 왜 갑자기 멋대로 약속을 잡으신 거예요?”

“얘가 외국에서 일하다가 4년 만에 돌아온 거라 그냥 넘어가긴 좀 뭣하더라구요.”

“계약서상 연차나 휴일 없는 거로 했잖아요.”

이지아가 볼멘소리를 냈다. 그녀의 말대로 연차 부분은 계약서상 존재하지 않는다. 원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결국 이지아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아까부터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도 않았고.

결국 내가 먼저 고집을 꺾었다.

“그, 그럼 못 본다고 전할게요.”

한예림에게 문자를 보냈다.

크게 실망할 텐데.

[김현우: 예림아, 나 일 때문에 못 만날 거 같다 ㅜㅜ 미안!]

[한예림: 일요일인데 일해?]

[김현우: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계약상 계속 케어해줘야 해서……. 진짜 미안]

[한예림: 일요일 내내 일하는 건 아니지?]

일요일에 뭐 할 거 있나? 이지아 성격에 어디 나갈 거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한 번 물어는 봐야지. 고개를 돌리는 찰나였다.

“으아! 깜짝이야!”

이지아가 내 어깨에 착 달라붙어서 핸드폰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쉴 틈 없이 굴러가며 대화 내용을 읽고 있었다.

당황한 내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지아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네?”

“남의 핸드폰을 그렇게 훔쳐보면 어떡해요? 실례잖아요!”

내 지적에 이지아가 충격받은 얼굴로 물러났다.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변명했다.

“저, 저희…….”

“네?”

“…….”

무언가 말을 하려던 이지아가 말문이 턱 막힌 듯 입을 다물어버렸다.그러더니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데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뭐 때문일까, 이지아와 나 사이에 기묘하고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우웅.

한예림한테 문자가 왔다.

[한예림: 그럼 내가 직장으로 찾아갈게. 얼굴 잠깐 보는 건 괜찮을 거 아니야?]

[김현우: 오랜만에 한국 와서 볼 사람도 많을 텐데, 괜찮겠어?]

[한예림: 그렇다고 너 얼굴도 안 보고 돌아가겠어?]

그래. 연차는 없더라도 잠깐 집 앞에서 얼굴 보는 정도는 괜찮겠지. 이지아가 이 정도까지 이해 못 해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아 씨. 방금 친구하고 문자 나눴는데요.”

“…네.”

이지아가 풀죽은 목소리로 대꾸한다. 괜히 마음이 약해져 최대한 살가운 투로 물었다.

“내일 집으로 찾아와도 되냐고 묻네요. 괜찮을까요?”

“…….”

이지아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민에 빠졌다.

“아.”

고민하던 이지아가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까맣게 죽어가던 안색에 화색이 돌았다.

“현우 씨, 친구분하고 언제 보기로 했다구요?”

“어, 내일이요.”

“내일, 그러니까 일요일 맞죠? 날짜상 오늘이요.”

“네, 맞아요.”

이지아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털썩, 침대에 다시 몸을 뉘며 말했다.

“그럼 괜찮아요. 현우 씨.”

“고마워요! 집에는 몇 시에 와도 괜찮다고 할까요?”

집주인인 이지아에게 편한 시간대를 맞추려고 묻는 말이었는데,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뇨, 집에서 볼 필요 없어요. 내일 약속 잡으세요.”

“네? 그치만…….”

괜찮겠냐는 의미로 말끝을 흐리자 이지아가 흔쾌히 대답했다.

“저도 따라가죠 뭐.”

“고마워요, 지아 씨!”

이 기쁜 소식을 친구에게 전했다.

[김현우: 예림아, 내일 볼 수 있을 듯]

[한예림: 진짜? 왜 갑자기?]

[김현우: 사장님한테 허락받았어ㅋㅋ]

[한예림: 올ㅋㅋ 그럼 내일 점심에 볼까? ]

[김현우: 그래 내일 점심에 보자]

[한예림: <^)오(^>/ < 잘 자 ) ]

핸드폰을 보며 히죽거리는데 이지아가 묻는다.

“언제 보기로 했어요?”

“내일 점심이요.”

“그래요? 그럼 일찍 자야겠네요.”

이지아가 옷깃을 잡아당겨 날 침대에 눕혔다. 눈을 감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이지아가 작게 속삭였다.

“한예림…… 한예림…… 한예림…… 한예림…… 한예림…… 한예림…….”

으득. 으드득.

귓가를 때리는 소름 끼치는 손톱 깨무는 소리.

한예림의 이름을 작게 되뇌는 이지아.

셔츠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는다.

“…….”

잠자리가 불편한 척, 한유정 쪽으로 돌아누웠다.

“…….”

한유정이 한쪽 눈만 뜨고서 날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안자니?”

“시끄러워서 깼어요.”

“미안…….”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

“현우 씨, 현우 씨.”

이지아가 내 어깨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당황한 내가 횡설수설하며 물었다.

“어어, 응? 지아 씨? 왜, 왜제 방에 있어요?”

“어제 유정이 때문에 같이 잤잖아요. 기억 안 나요?”

“아, 맞다.”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아직 오전 6시다. 군대도 아니고 뭐 벌써 깨워?

“너무 일찍 일어난 거 아니에요?”

“점심에 친구분 만난다면서요.”

“어, 그쵸. 그런데 그게 왜……?”

점심에 친구 만나는 것과 아침 6시에 일어나는 것에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그런 의문을 담아 쳐다보니 이지아가 빙긋 웃는다.

“그럼 만날 준비해야죠.”

“만날 준비요?”

시계를 다시 확인해봤다.

역시 6시가 맞았다.

“……아침 여섯 시부터요?”

“현우 씨가 너무 잘 자고 있어서 일부러 늦게 깨운 거예요. 사실 지금도 늦었어요.”

“아니, 그래도…….”

“어서요.”

이지아가 내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S랭크 헌터의 악력에 내 몸이 종잇장처럼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화장대였다.

“여기 앉아있어요.”

단호하게 말한 이지아가 한유정과 함께 화장대 앞에 앉았다. 한유정이 귀찮은 티를 풍기며 투정 부렸다.

“이거 저도 해야 해요?”

“응.”

“해본 적 없는데.”

“그럼 가만히 있어. 내가 해줄 테니까.”

귀찮아하는 한유정과 다르게 이지아는 의욕적으로 화장품을 칠했다.

뒤에서 가만히 기다리다 지친 내가 물었다.

“지아 씨,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어요.”

“거의 다 됐어요.”

한 시간을 더 화장하던 이지아는, 남은 시간 동안 피팅룸 안에서 옷을 바꿔입었다.

“어때요?”

“와, 진짜 예뻐요.”

“이건요?”

“엄청나게 어울리는데요?”

“이것도요.”

“……어, 어울려요.”

“이건 어때요?”

“지아 씨, 제발 그만…….”

*

“지아 씨.”

“네?”

“이거 맞아요?”

이지아, 한유정과 함께 밖으로 외출한 내가 물었다. 내 옆구리에 팔짱을 끼고 있던 이지아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뭐가요?”

“팔짱 끼는 거요. 맞냐구요.”

“아.”

이지아가 해맑게 웃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아직 하루가 지나지 않아 한유정의 천살성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걷는 동안 혹시라도 떨어질까 봐 무섭다며 이지아가 옆에 착 달라붙었다.

고등학생인 한유정까지 옆구리에 끼는 건 주위 시선이 너무 따가울 게 분명해서, 그녀는 그림자 속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렇게 싫으면 돌아갈까요? 전 괜찮은데.”

이지아가 팔짱 낀 손에 힘을 꾸욱 주며 물었다.

솔직히,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 때문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약속 시간 30분 전.

한예림도 준비하고 나온 시간이 있을 텐데 여기서 돌아가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아뇨,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네요. 가죠.”

띠리링.

전화가 왔다. 한예림이었다.

“어, 예림아.”

­어디쯤이야?

“나 다 도착했어. 아, 그리고 아까 문자로 설명했던 것처럼…….”

­너희 사장님도 온다는 거지?

“응. 일 때문에 어쩔 수가 없네.”

한예림한테는 나와 이지아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해놨다.

­뭐, 잘 부탁한다고 나도 인사나 하지.

“부담스러울 텐데 미안하다, 야.”

­아니 됐어, 아! 저기 너 보인…….

갑자기 한예림의 말이 툭 끊겼다.

“예림아?”

통화가 꺼졌나? 핸드폰을 보는데 신호는 연결된 채 그대로였다.

“예림아? 나 도착했는데 어디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내가 한예림을 겨우 찾아냈다. 손을 들며 외쳤다.

“예림아! 한예림!”

못 들었나? 우두커니 제자리에 얼음처럼 굳어있는채였다.

다시 부르려는데 팔짱을 낀 이지아가 갑자기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지아 씨?”

한예림이 멀리서부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

“…….”

한예림과 이지아의 시선이 교차했다.

*

한예림이 인상을 찡그렸다. 김현우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이지아 때문이었다. 그녀가 빠르게 이지아의 인상착의를 위아래로 훑었다.

‘……작정하고 꾸몄네.’

이지아와 김현우의 기사를 뉴스로 볼 때부터, 의심은 하고 있었다.

김현우는 몰라도 이지아는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그게 확실시된 지금, 한예림은 좀 더 꾸미고 나올 걸 하는 후회를 했다.

분석하는 시선은 한예림뿐만이 아니었다.

한참 동안 한예림을 훑어보던 이지아의 얼굴에 자신감이 감돌았다.

그녀가 김현우의 눈치를 보며 몰래 비웃음을 보냈다.

“…!”

뭐야, 뭘 보고 웃는 건데.

발끈하려던 한예림이 겨우 속마음을 진정시키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지아 헌터죠? 현우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저두요. 한예림 씨 맞으시죠?”

“그런데, 두 분이 많이 친해 보이시네요?”

“아하하.”

한예림의 날카로운 어투에도 이지아가 담담하게 웃었다.

그녀가 김현우의 팔을 더욱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대답했다.

“한 달간 동고동락했는데, 안 친해질 수가 있나요.”

“…그러세요?”

썩어 문드러지는 한예림의 얼굴. 이지아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여기서 이렇고 있지 말고, 우리 점심부터 먹으러 가요. 아, 그리고 사정상 계속 팔짱 끼고 있어야 할 거 같은데…….”

이지아가 도발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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