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한예림 (5)
* * *
스카우터들의 명함을 테이블 위에다가 쫘르륵 진열해놨다. 이지아와 함께 둘러앉아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빠졌다.
아, 일단 이것들은 먼저 정리해놔야지.
내가 진열된 명함 몇 개를 쏙쏙 빼갔다.
“현우 씨, 그 명함들은 왜요?”
이지아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방금 빼낸 명함들을 한눈에 보기 쉽게 넘겨줬다.
“아레나, 태산, 헤일로…… 전부 대형 길드잖아요?”
근데 이걸 왜 빼요?
이지아의 얼굴이 딱 그런 얼굴이었다.
하나씩 짚으며 설명해줬다.
“아레나 길드, 어비스 공략대에 길잡이로 참가한 A급 헌터 김승윤이 소속된 길드죠.”
“…?”
“태산 길드, 마찬가지로 어비스 공략대에 참가한 A급 헌터 박재민이 소속 돼 있고요.”
“아.”
전부 이지아의 청문회 때 끌려 나온 길드들이다.
미친놈들. 지들이 묻어버리려고 했던 건 언제고 지금 와서 명함을 건네? 뒤통수 칠까 봐 무서워서 편하게 일이나 하겠어.
내 눈에 흙이 들어오더라도 이딴 곳에 이지아를 보낼 생각은 없었다.
명함들을 쫙쫙 찢어서 한구석에 던져버렸다.
남은 명함들은 여전히 많았다.
“이거, 이거, 이거…….”
거침없이 손을 움직이며 명함들을 빼갔다. 이번에도 이지아가 물었다.
“그건 왜요?”
“전부 처음 들어봐서요.”
나도 한 달 전까지는 헌터를 꿈꿨던 각성자였다. 업계에 직접적으로 몸을 담은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풍문으로 들은 정보들이 있다.
그런데 지금 골라낸 명함들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길드들이다.
승수물산 길드는 대체 뭐 하는 길드인데?
이런 길드들은 정말 이지아에게 한번 찔러나 보자는 식에 불과했다.
S급 헌터인 이지아한테 최소한의 조건이나 맞춰 줄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지. 일일이 반응해줄 필요도 없다.
“이거, 이거, 이거…….”
이건 우리 엿먹이려던 놈들이니까 빼고, 저건 못 들어본 길드니까 빼고.
또 이건 재무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빼고, 저건 업계에 워낙 나쁜 소문들이 많아서 빼고.
분류를 마치고 나니 테이블 위에 남은 명함은 수십 장중에 단 다섯 장 뿐.
다섯 개 모두 대형길드라기엔 부족하지만 중소길드라기에는 큰, 제법 견실한 중견 길드들이었다.
“현우 씨, 괜찮을까요?”
이제 와서 길드에 들어가는 게 걱정되는 모양인지 이지아가 물었다.
“……몇 가지 조율은 해봐야죠.”
핸드폰을 꺼내 명함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 *
팀장이 스카우터에게 물었다.
“성현 씨?”
“아, 팀장님. 무슨 일이세요?”
“이지아 헌터는 어떻게 됐어?”
은근하게 기대하는 태도. 스카우터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 집 앞까지 찾아가 봤는데요.”
“그런데?
“매니저가 아직 생각이 없다고…… 명함도 못 주고 왔어요.”
“뭐?”
“다른 길드에서 온 스카우터들이 워낙 많아서, 질색하면서 도망가더라구요.”
팀장의 표정이 대번 험악해진다. 스카우터가 다급하게 변명했다.
“이, 일단 이지아 헌터 집에 얹혀사는 애가 있어서 명함은 그 애한테…….”
“야, 이 새끼야!”
팀장이 손가락질하며 언성을 높였다.
“지금 무슨 육아 예능물 찍고 있는 줄 알아?! 이야기 한 번 제대로 못 나누고 왔는데 그 집 애가 잘도 건네줬겠다, 종이 아깝게 명함은 왜 줬어?! 어차피 쓰레기통 들어갈 텐데!”
스카우터의 목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변명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지아 헌터를 노리는 스카우터들이 워낙 많아서…….”
“그걸 어떻게든 하는 게 니 할일이잖아!”
불가능한 걸 어떻게 하라고?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속으로 작게 중얼거린 스카우터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지아 헌터는 내가 찾아갈 테니까. 너, 이번에 계약 기간 끝나는 헌터들 리스트 싹 다 정리해서 오늘까지 책상 위에 올려놔! 알겠어?”
야근하라는 팀장의 말에 스카우터가 눈물을 삼키고 대답했다.
“넵!”
책상에 앉은 스카우터가 씩씩거리며 리스트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띠리링.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모르는 번호다. 스카우터가 전화를 받았다.
“풍화 길드의 배성현입니다.”
안녕하세요? 매니저 김현웁니다. 보내주신 명함은 잘 받았──
귀에 쏙쏙 박혀 들어오는 남자 목소리.
김현우? 김현우가 누구였지?
야근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어깨로 전화를 받친 스카우터가 키보드를 두들기며 심드렁히 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시라구요?”
김현우요. 어, 풍화 길드의 스카우터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김현…….”
스카우터의 입이 벌어졌다. 그가 자세를 바로 고치며 대답했다.
“기, 김현우 씨? 이지아 헌터 매니저 김현우 씨요?”
맞아요.
“아이고, 실례했습니다! 전화 주신 건 무슨 용무이신가요?”
풍화 길드하고 이지아 헌터 계약 건으로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요. 직접 얼굴 보면서 대화 좀 나눌까 하는데, 혹시 시간 언제가 괜찮으신…….”
“제가,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스카우터가 다급하게 짐을 쌌다. 양복을 입고 나가던 그가 때마침 팀장과 마주쳤다.
“내가 일 시켜둔 건 어째 놓고 어디 가고 있어? 오늘 안에 끝낼 자신 있어?”
“방금 이지아 전담 매니저한테 전화 왔어요! 이야기 좀 나누고 싶다고요!”
“어, 응?”
“계약 관련해서 이야기하고 싶다니까 먼저 갔다 와서 이야기 드릴게요. 아이씨, 빨리 가야 하니까 좀 비켜보세요!”
“그, 그래? 필요한 건?”
“없어요!”
팀장을 밀친 스카우터가 허겁지겁 달려갔다.
* * *
풍화 길드에 전화한 지 삼십 분은 됐을까.
초인종 소리에 나가보니, 스카우터가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허억, 헉! 방금 통화한 풍화 길드의 배성현입니다.”
“아니, 벌써 오셨어요?”
“기다리시게 할 수는…… 켁!”
숨넘어가겠네. 가볍게 악수를 하고는 거실의 소파로 데려갔다.
스카우터가 서류 가방에서 서류들을 꺼내 테이블에 척척 올렸다.
“풍화 길드로 말씀드릴 거 같으면, 풍화 그룹에 근간을 두고 있는 만큼 재무적으로 탄탄한 장점이 있으며…….”
“아직 길드의 역사가 짧아 2군 헌터들의 랭크가 조금 낮지만, 이는 자본을 바탕으로 시간이 해결해줄 것으로…….”
“특히나 이지아 헌터께서는 랭커로서 풍화 길드에 원하는 인재상인 만큼, 전폭적인 지원이…….”
불라불라불라.
“──이지아 헌터께서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는 풍화 길드만큼 좋은 곳은 없다고 자신합니다.”
끝도 없이 이어지던 말이 드디어 마무리됐다. 실속 없는 내용뿐이었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계약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시죠.”
“…넵! 일단 계약서를 보시면…….”
사실 풍화 길드에 연락하기 전에 이미 다른 길드의 스카우터들 하고도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확실히, 앞에서 떠벌리던 말들이 허언은 아닌지 조건은 다른 길드에서 제시한 것들보다 훨씬 좋은 편이었다.
“지아 씨, 어떠세요?”
“네?”
“풍화 쪽 조건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지아에게 계약서를 넘겼다.
결국, 선택하는 건 내가 아니라 이지아의 몫이었다.
내 질문에 스카우터가 고개를 번쩍 들어 이지아를 쳐다봤다.
“으음…….”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이지아가 계약서를 다시 내게 넘겼다.
“저는 현우 씨 판단에 맡길래요.”
“그런 중요한 선택을 남한테 떠넘기면 어떡해요?”
“맡길래요.”
홱, 스카우터의 고개가 번개처럼 꺾여져 나를 쳐다본다. 저러다가 눈알 튀어나오겠네.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탁탁, 두들기던 내가 결정을 내렸다.
“저는 좋다고 생각이 드네요.”
스카우터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몸을 떨었다. 아직 좋아하긴 이른데.
“사실, 굳이 대형 길드가 아닌 중견 길드에 연락한 이유가 있습니다.”
“네?”
의아해하며 묻는 스카우터에게 우리들의 계약조건을 말했다.
“이지아 헌터가 던전에 들어갈 때, 저도 같이 들어가야만 합니다.”
당황한 스카우터가 묻는다.
“그, 실례지만 매니저님도 각성자신가요?”
“네.”
스카우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례지만, 랭크가…?”
“……F랭크입니다.”
F랭크.
헌터가 되지 못한 각성자들을 뭉뚱그려 포함한 랭크다.
스카우터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매니저님은 대체 왜 던전에 들어가셔야 하나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설명했다.
나와 떨어지면 이지아가 제 전투력을 전부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니까, 스카우터가 골머리를 싸맸다.
“제가 결정할만한 사안은 아니긴 한데, 그런 거라면 뭐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2군 헌터 한두 명 정도 호위로 돌리면 되니까요. 이 건은…… 윗선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저희도 계약서는 검토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악수를 하니 스카우터가 허리를 냉큼 숙이며 손을 맞잡았다.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 풍화 길드로 부디!”
스카우터가 서류 가방을 챙겨 떠나려는데, 그가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들기며 다시 돌아섰다.
“김현우 씨!”
“네?”
“아직 사인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설레발치는 건가 싶긴하지만... 그래도 미리 말씀드려야 될 거 같아서요. 일단 형식상으로나마 입단 테스트로 던전에 들어가야 합니다.”
“아.”
“이지아 헌터에게 별로 어렵진 않을 거예요. 마음 편하게 생각하고 계세요. 김현우 씨도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