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18화 (18/112)

〈 18화 〉 한예림 (6)

* * *

스카우터가 돌아가고 이틀이 지났다. 풍화 길드에서 전화가 왔다.

­매니저님, 전에 말씀드린 건은 잘 해결됐습니다.

풍화 길드는 중견 규모의 길드다.

이지아가 원래 몸담았던 화신 길드처럼 고위 던전을 공략할 일은 없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 쓰는 격이다. 현재 풍화 길드는 이지아를 데리고 할 수 있는 것들에 한계가 있다.

그런데도 풍화 길드에서 이지아와 계약하길 원하는 건, 그녀가 S랭크 헌터이기 때문이니까.

결국, 길드의 격을 높이기 위한 투자다.

­입단 테스트는 원래 공략하기로 예정돼있던 던전에서 진행할 겁니다. B등급이고, 예행 연습한다 생각하시고 편하게 오세요. 편하게.

계약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B등급 던전이라. 이틀이 지나고 조금 진정되니까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이거 스치기만 해도 사망 아닌가?

호위가 붙긴 하지만 길드의 2군 헌터들로 구성된다고 했고. 역풍하나 맞으면 맥아리 없이 고꾸라질 거 같은데.

냉수를 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들어가니까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다.

그래, 나도 헌터를 지망했었는데 이런 거로 겁먹으면 되겠어? 한때나마 꿈꾸던 현장으로 뛰어 들어가는 거다. 반쪽이나마 꿈을 이루는 거니까 기뻐하자!

……그런데 왜 자꾸 위가 쓰려오지?

쓰린 속을 가라앉히려고 다시 냉수를 목구멍에 쏟아붓는데, 거실에서 경쾌한 음악 소리가 들린다.

“아니, 탱커면 망치만 휘두르지 말고 방벽을 들라고…! 좀…!”

소파에 앉은 한유정이 게임 패드를 붙잡고 열을 내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하는지 상체까지 쭉 앞으로 내민 게 TV에 빠져들어 가기 직전이다.

어이가 없어 물었다.

“너 밤새 게임 한 거야?”

“예? 아, 네. 아저씨 잠깐만요. 경쟁전이라.”

설렁설렁 대답한 한유정이 다시 패드를 두들기며 게임에 집중했다.

눈가 밑은 거뭇한데 눈빛은 활활 불타오른다.

뭐지. 이 복잡미묘하고 싱숭생숭한 감정은.

퇴근하는데 마중은 안 나오고 게임 중인……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란 이런 걸까.

짧게 혀를 차며 지나가려는데, 문뜩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한유정 얘, S급인데.

“……!”

탁자 위에 올려뒀던 과자들을 한 보따리 싸 들고 한유정 옆에 앉았다. 콸콸콸, 머그잔에 음료수도 따른다.

한유정은 여전히 게임에 집중하고 있다.

TV 속 화면이 요란스럽게 흔들린다.

“아이씨…! 부활 나한테 쓰라고!”

한유정이 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성을 낸다. 그녀의 불만을 냉큼 받아먹었다.

“힐러가 못하네. 거기서 탱커를 왜 살려? 딜러인 너를 살려야지.”

“그쵸?”

“화내지 말고 이거 먹으면서 해, 먹으면서. 원래 팀 게임이 다 그래. 아군들이 정상인 적이 어디 한 번이라도 있냐?”

봉지를 뜯어 과자를 입에 쏙쏙 넣어줬다. 한유정이 우물거리며 다시 패드를 두들겼다.

“어어, 유정아! 3시 방향에 저격수 있다!”

“어디요? 어디요!”

“저기!”

한유정이 저격수를 처치했다.

“아싸!”

두 주먹을 불끈 쥔 한유정이 뒤늦게 내 눈치를 살피며 괜히 투덜댄다.

“누가 옆에서 알려주면 재미없는데…….”

아닌 척하지만 만족스러운지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 있다. 놓치지 않고 곧바로 칭찬했다.

“알려주긴 누가 뭘 알려줘? 그냥 너가 소질 있는데? 이 정도 실력이면 금방 올라가겠어.”

집중하고 있는 한유정의 조그만 입술에 머그잔을 조심스레 가져다 댔다.

고개만 살짝 틀어 꼴깍꼴깍 받아마신다.

하, 작게 숨을 내쉰 한유정이 말했다.

“제가 여기 있을 실력이 아니긴 해요.”

도긴개긴, 비슷한 거 같은데.

속마음은 속으로만 삼키며 옆에서 계속 도왔다.

결국 게임은 승리했다. 승급까지 했네. 한유정도 기뻐하는 기색이다.

“불태웠다아…….”

한유정이 소파에 쭉 뻗어 누웠다. 눈을 꿈뻑이는데 뒤늦게 잠이 몰려드나보다.

지금 잠들면 여태껏 옆에서 아부 떨던 게 다 날아가 버린다.

이제 비위는 충분히 맞춰준 거 같고, 마른 입술을 핥으며 본론을 꺼냈다.

“유정아.”

“네?”

“혹시, 너 지금 돈 좀 가진 거 있냐?”

한유정이 졸린 눈을 비비더니, 엉덩이를 내빼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저 돈 없는데요.”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에 헛웃음을 삼켰다.

누굴 양아치로 아나. 코 묻은 돈은 나도 필요 없다.

하지만 돈이 없다는 한유정의 말은 내 마음에 쏙 드는 답변이다. 설득할 길이 생겼으니까.

그런데, 협회장하고 일할 때는 무일푼으로 일한 건가?

“너, 협회…….”

아무런 생각 없이 물어보려던 내가 아차 싶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한유정은 협회장에게 속아 살인을 저질렀다. 그녀는 과거에 죄책감을 크게 느끼고 있다.

긁어 부스럼이지.

의아해하는 한유정이 눈치채지 못하게 황급히 원래의 본론으로 돌아갔다.

“이번에 지아 씨가 길드에 들어가게 된 거 알지?”

“네.”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지아 씨가 나하고 떨어지게 되면…….”

“난리 나죠.”

골똘히 생각하던 한유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아저씨도 던전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역시 이해가 빨라.

“그래서 말인데 너가 와서 도와줬으면 하거든. S등급 헌터하고 F등급 각성자하고 같이 던전에 들어간다는 것부터가 좀 무리수였던 것 같아. 지아 씨가 하고 싶어 하니까 일단 홱 던지긴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조금 더 설득하는 게──”

주절주절 후달리니까 자꾸만 말이 길어진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한유정에게 매달려 애원하고 있었다.

“제발 나 좀 도와줘!”

한유정은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다. 풍화 길드의 2군 호위? 한유정만 있으면 그딴 거 다 필요 없다. 누구하고 누굴 비교해?

“어차피 B등급 던전이라면서요? 아줌마 혼자서 다 쓸어버릴텐데 그걸 저까지 가야 해요?”

던전에서 그걸 어떻게 장담해? 무슨 사고가 벌어질지 모르는게 던전이고 헌터다. 안전장치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이건 내 사정이고, 한유정을 설득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나는 대답 대신에 협상안을 꺼냈다.

“유정아, 너 돈 없다 했지?”

“예? 네.”

“던전 한 번에 이 정도까지 용돈 줄 수 있는데…….”

손가락을 쫙 펴서 보여주자 한유정의 눈동자가 잘게 떨린다.

“……손가락 하나에 십만?”

고개를 저었다. 한유정이 다시 묻는다.

“그럼, 백…?”

“…….”

“…….”

침묵이 감돈다. 한유정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가, 갈게요.”

다리에 힘이 풀린 내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됐다. 위험에 떨 필요가 사라졌다. S등급 각성자 하나가 던전에서 오롯이 나만을 지켜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한유정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자러 가게?”

“날밤 새며 게임 했더니 피곤해서요.”

“그래? 잘 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게임패드를 손에 쥐는데, 한유정이 날 부른다.

“아저씨.”

“응?”

계단을 올라가던 한유정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빙글빙글 웃고만 있다.

자러 간다면서 안가고 뭐 하는 거지.

“굳이 돈 안 주셨어도 따라갔을 거예요.”

“뭐?”

“아저씨가 다치면 저도 큰일이니까요. 그래도, 주신 용돈은 잘 쓸게요.”

짧게 혀를 내민 한유정이 그림자로 변해 사라졌다.

* * *

입단 테스트 날이 찾아오고 이지아와 함께 던전에 들어갔다.

“와, 진짜 이지아다.”

“대박.”

길드원들이 연예인이라도 본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괜히 내 어깨가 쭉쭉 올라가는 느낌이다.

그래. 이지아가 인터넷에서나 씹고 뜯기던 먹잇감이었지, 헌터 업계에서 이지아만큼 권위 있는 인물들이 몇이나 있겠어.

결국 얼굴을 앞에 두면 다들 이런 반응이라고.

“매니저님이죠? 반갑습니다!”

호가호위라고 해야 할까. 이지아의 짐짝으로 따라온 나에게도 선선한 반응을 보내준다.

“…….”

어색하게 굳어있는 이지아의 등을 두들겼다. 깜짝 놀란 이지아가 날 쳐다본다.

“현우 씨?”

“가서 인사라도 나누고 오세요. 이제부터 같이 일하게 될 직장 동료들인데.”

이지아하고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건지 안절부절 못 하는 게 여기서도 뻔히 보인다.

내 등쌀에 떠밀린 이지아가 터덜터덜 길드원들에게 걸어갔다.

그녀 앞으로 길드원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근처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유정아?”

­네.

한유정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린다. 전음이라고 했던가. 그녀가 근처에 있음을 다시 확인하자, 작게나마 남아있던 긴장감이 싹 걷어진다.

“말했던 것처럼 진짜 위험한 순간에만…… 알지?”

한유정의 기록은 협회에 남아있지 않았다. 천살성을 써먹으려고 협회장이 데이터베이스에서 기록을 완전히 삭제시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유정이 표면에 드러나면 변명하기 힘들어진다.

­안 들킨다니까요.

저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꼬리란 길면 길수록 잡히는 법이니까.

­걱정 하지 마세요, 좀.

“알겠어, 인마.”

공략대장이 방패를 탕탕탕 두들기며 시선을 끌었다.

“잡담은 그만하고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공략대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내게 헌터 두 명과 일전에 만난 스카우터가 다가왔다. 짧게 인사를 나누는데 뒤통수가 자꾸만 근질거린다.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을 쳐다보니 이지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을 지었다. 여기에 S급이 둘이다. 걱정은 무슨.

“출발하겠습니다.”

때마침 공략대장이 외쳤다.

공략대가 출발했다.

*

가장 앞장선 이지아가 만나는 몬스터마다 말 그대로 박살 내며 전진하고 있었다.

솔직히, 내 눈으로는 잔상도 보이지 않아 얼떨떨해 하며 따라갈 뿐이었다.

다른 헌터들도 내 표정하고 마찬가지다. 공략대장은 아예 허탈한 얼굴이다. 실컷 짜둔 포지션이 의미 없게 변했기 때문이다.

무난한 공략이 진행됐다. 옆에 따라온 스카우터가 뺨을 씰룩이며 웃음을 참았다.

“매니저님!”

“네?”

“풍화 길드를 선택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뭘요. 그런데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넵! 말씀하시죠!”

“제가 던전은 처음이라 그런데, 원래 정찰도 없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돌파하나요?”

“사실, 풍화 길드의 1군 헌터들로도 공략 가능한 던전이라서요. 이지아 헌터까지 있으니까 뭐, 속전속결인 거죠.”

“제 말은 길잡이가 정찰을…….”

갑자기 이야기 꺼내는 게 우스워져 입을 다물었다.

하긴, 여기 전문가가 몇 명인데. 내가 뭐라고?

탐색은 순조로웠다. 몬스터들은 다른 헌터들이 나서기도 전에 이지아가 처리했다.

그리고, 사고는 갑작스레 벌어졌다.

쿠구궁!

암벽처럼 보이던 바위가 몸을 움직였다. 스카우터가 경악했다.

“트랩 골렘!”

트랩 골렘. 들어본 적 있다. 던전에 잠들어있는 함정이다.

전열을 공격하는 몬스터들과 맞춰서 후미를 습격한다고.

역시나, 앞을 보니 이지아가 때마팀 나타난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나를 호위 중이던 헌터들이 앞으로 나섰다.

난 그냥 시큰둥하게 있었다.

위험에 빠지면 한유정이 어떻게든 해줄테니까.

그런데, 이지아가 먼저였다.

쿠쾅!

순식간에 날아온 이지아가 골렘을 주먹으로 때렸다. 골렘이 박살 나며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거대한 암벽이 모래처럼 무너져내렸다.

“이지아 헌터 어디 갔어?!”

“빈자리 메꿔! 못 들어오게 막아!”

공략대 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전열의 중심이던 이지아가 갑자기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당황한 그녀가 내게 뛰어왔다.

“현우 씨!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데 없어요?”

이지아가 내 얼굴을 마구 더듬었다.

“으아악!”

공략대쪽에서 또 비명이 들린다. 누구 죽은 건 아니겠지? 걱정돼서 이지아를 먼저 안심시켰다. 빨리 돌려보내야 한다.

“지아 씨, 유정이 데려왔었잖아요. 뭐하러 왔어요?”

“네? 유정이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잊어버렸던 게 기억 난 건지, 새하얗던 안색에 혈색이 돌아온다.

“아!”

“먼저 몬스터부터 처리하고 오세요. 빨리요.”

이지아의 어깨를 밀었다. 망설이던 그녀가 결국 몸을 돌려 떠났다. 몬스터들은 금방 정리됐다. 다행히, 누구도 죽지 않았다.

*

습격이 마무리되고 공격대들이 재정비 겸 다시 뭉쳤다.

사실 이지아에 대한 것 때문이다.

가진 힘이 깡패라고, S급 헌터라 뭐라 말도 못 하고 공격대장이 넌지시 돌려서 지적했다.

“이지아 헌터, 자리를 비울 때는 미리 말 좀…….”

“길잡이는 뭐 하고 있었어요?”

이지아가 공격대장의 말을 끊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목소리였다. 그녀가 뒤를 힐끔 살폈다. 김현우는 한쪽 구석에서 스카우터하고 대화 중이었다.

“예, 네?”

공격대장이 말을 더듬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그가 재빨리 변명했다.

“아무래도 이지아 헌터의 참가로 공략 속도가 빠르다 보니까──”

“그럼 대장님이 속도를 조절했어야죠. 본인의 능력 부족 아니에요?”

전투 중인 공략대원들은 신경 쓰기 힘든 부분이었다. 공략대장도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지아도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다. 유망주로 시작해 대형 길드의 간판 헌터로 생활하기까지.

함께했던 공략대원과 공략대장들 모두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헌터들뿐이었다.

이런 기본적인 실수가 벌어질 거라고는 이지아 또한 상정하지 못했다.

“…….”

이지아가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녀가 공략대원들의 얼굴을 쭉 훑어봤다.

찍어누르는 듯한 위압감에 누구도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이지아가 등 뒤의 김현우를 의식하며 낮게 읊조렸다.

“……주의해라, 니네들.”

공략대원들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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