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한예림 (8)
* * *
4년 전, 각성한 한예림은 헌터와 매니저 사이에서 고민했다.
결국 던전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건 부담스러운지 매니저 쪽으로 노선을 틀었다.
좋은 선택이었다. 한예림은 에이스 길드의 매니저다.
미국에서도 대형 길드 취급받는 에이스 길드의 매니저라면, 어지간한 헌터들보다 훨씬 나았다.
그래서 길드를 만든다는 한예림의 말이 너무나 뜬금없었다.
“너 원래 다니던 직장은 어떻게 하고?”
“그만뒀지.”
“그걸 왜 그만둬! 내가 다 아깝게.”
“직장 생활이 안 맞아서.”
4년 동안 일한 직장을 그런 이유로 그만둬?
“어차피 잠깐 거쳐 갈 생각이었어. 길드 만들기 전에 인맥 쌓고 내 팀 하나 꾸려서 나오려고 버티던 거지.”
한예림이 애초에 길드를 만들 생각이었던 건 알고 있었다.
맨땅에 헤딩 중인 나와 다르게 제대로 된 정규 코스를 밟은 엘리트다.
“그런데 뜬금없이 한국에서 길드를 만든다고?”
“엉.”
“왜?”
“너한테 말해 뭐하니.”
활짝 웃은 한예림이 이지아에게 사근사근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지아 헌터. 오랜만이에요. 한 달 만이죠? 반가워요.”
“…….”
어째 대답이 없다.
등 뒤를 돌아보니 이지아가 떫은 얼굴을 하고 있다.
“지아 씨?”
“넹? 아!”
이지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넘긴다.
"예림 씨가 집까지 찾아올 줄 상상도 못 해서 깜짝 놀랐어요. 다시 보게 돼서 반가워요.”
“표정이 너무 안 좋으시길래 심각한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 뭐예요.”
한예림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가 캐리어 가방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내게 말했다.
“야, 그런데 반갑지도 않나 보다? 날씨도 어두운데 언제까지 밖에 세워둘 거야?”
“아, 맞다! 지아 씨, 잠깐 괜찮죠?”
“……네. 사양 말고 들어오세요.”
한예림을 데리고 거실로 향했다. 의자에 앉는 그녀에게 물었다.
“커피? 차?”
“그동안 카페 알바했었다면서? 그럼 커피!”
“입맛 안 바뀌었지? 아메리카노?”
“응.”
“지아 씨는요?”
“저두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래도 카페 알바 경력이 꽤 돼서 커피 타는 실력만큼은 수준급이다.
부엌에서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데 한유정이 질린 얼굴로 내 옆을 서성거린다.
“무슨 일이야?”
“거실에서 게임하고 있었는데…… 게임할 분위기가 아니어서요.”
“너무 시끄러웠나? 방에라도 들어가 있지.”
한유정이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아뇨, 어차피 다시 와야 할 거 같은데 그냥 아저씨 옆에 있을래요.”
“그래? 커피 마실래?”
“마시면 잠 안 와서요. 괜찮아요.”
취이이익!
커피 내리는 걸 신기하게 구경하던 한유정이 문득 묻는다.
“아저씨. 전에 게임이요.”
“응?”
“오더 엄청 잘내리던데 티어가 어디에요?”
한유정의 물음에 자랑스레 대답했다.
“다이아.”
“진짜요?”
한유정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는다. 내 콧대가 1mm 정도 높아졌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17살짜리한테 자랑할 게 게임 실력 밖에 없다는 게 갑자기 한심해져서.
뭐 하고 있는 거냐, 진짜. S급 각성자한테.
“그럼…….”
"뭔 말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여?"
“저, 게임 알려주시면 안 돼요?”
“게임?”
“네.”
“뭐…… 시간 나면.”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선선하게 허락해주자 한유정이 만족스레 웃는다.
커피를 들고 거실로 갔다.
한예림과 이지아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둘 다 팔짱을 낀 채 무심한 얼굴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까톡! 까톡! 까톡!
적막 속에서 메신저 소리만 요란하게 들린다.
뒤에서 한유정이 팔뚝을 문지르며 몸서리친다.
“……소름 돋네, 진짜.”
인기척을 느낀 이지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손 안 부족해요?”
“유정이가 도와줘서요. 자리에 앉아 있어요.”
일어나려는 이지아를 말리며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놨다.
한예림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소식은 들었어요. 지아 씨 길드 구하는 중이라고.”
“네.”
“때마침 제가 길드를 만들 생각이거든요. 지아 씨 생각은 어때요?”
이지아가 다리를 꼬며 발을 까딱거린다.
테이블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괸 채, 세상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갑과 을이 누구인지 명확히 인지한 것이다.
“글쎄요…… 예림 씨 매니저로 일한 기간이 얼마나 됐다고 했죠…?”
“4년이요.”
“4년이면…….”
이지아가 어림 계산하더니 피식 웃는다.
“제가 이쪽 업계에 뛰어든 지 10년이 넘었는데…….”
“매니저하고 헌터는 엄연히 분야가 다르죠. 이지아 씨는 유망주 시절까지 계산한 거고, 저는 대형 길드에서 매니저로 밑바닥부터 닦으며 올라간 거구요.”
“그래도 4년이면 너무 짧지 않아요? 길드 마스터가 어리면 어디 가서 무시당하지 않을까 해서요.”
“글쎄요. 다른 곳도 아니고 에이스에서 쌓은 경력인데 국내 중소 길드 십수 년하고 비교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라 생각되네요.”
드르륵.
한유정이 조심스레 의자에서 엉덩이를 뺐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한유정에게 물었다.
“어디가?”
한유정이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쉬잇, 쉿! 거렸다.
그녀가 대화하는 이지아와 한예림을 힐끔 훔쳐보더니 작게 속삭였다.
“저 잠깐만 TV 보고 있을게요.”
“그래? 알겠어.”
한예림과 이지아의 대화에 집중했다. 설검이 오가고 있다.
“사실, 이제 막 만들어지는 길드가 S급 헌터를 섭외하려는 거 자체가…… 무례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현우 씨 인맥에 기대는 건 아니죠?”
“저도 일반적인 S급이었으면 시도도 못 해봤죠. 그런데, 던전 공략에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S급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대화 수위가 조금 높아진 거 같은데.
이렇다 일이 터지겠다 싶은 순간, 이지아가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선언했다.
“조건이 너무 안 맞아요. 저하고 현우 씨를 품기엔 예림 씨 길드에 준비된 게 너무 없네요.”
이지아가 탁,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단칼에 거절 의사를 밝혔다.
내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예림은 이지아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유를 잃지 않았다.
현재 이지아의 상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소문 들었어요. 중견 길드에 다 까였다구요.”
실실 웃던 이지아의 뺨이 움찔 경직된다.
“이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거든요. 지금 영입 시장에서 가장 핫한 게 지아 씨잖아요. 벌써 소문 다 돌았는데 어떻게 모르겠어요.”
한예림이 핸드폰을 불쑥 내민다. 대충 훑어보니 다른 길드 매니저가 정보를 공유한 모양이다. 아까 주고받은 메신저가 이거였나?
“S급 헌터 소식이면 퍼지는 건 금방이죠.”
이지아는 S급 헌터다.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완전한 몸값은 못 받지만 최소한의 계약금은 받아야 했다.
그 정도 헌터를 유지 가능한 건 최소 중견 길드 수준.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는 이지아를 중견 이상의 길드에서 고용할 이유가 없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그럼 넌 지아 씨한테 계약금을 어떻게 맞춰줄 생각인 건데?”
크게 뜬 한예림의 눈에 섭섭함이 깃든다.
어찌 됐든, 나는 한예림의 친구가 아닌 이지아의 매니저로서 이곳에 있는 것이다.
“……사실, 이지아 씨한테 2년 치 계약금을 지불할 정도의 보유금은 가지고 있어.”
“뭐? 매니저가 무슨 수로 그만한 돈을 얻었어?”
“대형 길드에 S급 헌터 매니저로 있다 보면 뒷돈 챙길 방법이…….”
“…….”
“S급 헌터하고 인맥 쌓고 싶은 사람들한테 청탁금도…….”
“…….”
“왜? 뭐? 나 정도면 적당히 챙긴 거거든?”
“됐다, 그래서?”
헛기침한 한예림이 이어 말했다.
“그런데, 이 자금은 길드 보유금으로 써야 해. 땡전 한 푼 없이 길드 운영하는 건 말도 안 되니까.”
“그럼 지아 씨가 받게 되는 건?”
“길드 지분.”
한예림이 팔짱을 꼈다. 썩 내키지 않는 모양새지만, 그녀가 양보 할 수 있는 건 결국 그거뿐이다.
“내가 팔 수 있는 상품은 나하고 길드 지분뿐이야.”
미국 대형 길드에서 일한 한예림의 인맥 네트워크과 노하우.
지금이 아닌 미래의 가치를 거래하는 것이다.
“…….”
긴 침묵이 이어졌다. 선택하는 건 결국 이지아의 몫이었다. 고민하던 이지아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계약할게요.”
한예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히죽 웃으며 이지아를 내려다봤다.
“오늘 대화 너무 즐거웠어요. 지아 씨.”
째깍째깍째깍.
이지아가 힐끔 시계를 확인했다. 시곗바늘이 12시로 향하고 있었다. 이지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예림 씨, 그러고 보니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머물 숙소는 잡았어요?”
“호텔 있어요. 왜요?”
“그러지 말고 저희 집에서 묵고 가시라구요. 이제 12시인데 언제 택시 잡고 가겠어요. 방 하나 내드릴 테니까 푹 쉬시고 내일 출발해요.”
한예림이 얼떨떨한 얼굴을 한다.
“……그럼 사양 않고 오늘만 자고 갈게요.”
띵동!
시곗바늘이 12시를 가리킨다.
갑자기 등 쪽에서 묵직한 감각이 느껴진다.
이거 뭐야?
한유정이었다. 대롱대롱 매달린 한유정이 물었다.
“아저씨,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요? 졸린데.”
어리둥절해하는데, 문득 내일이 일요일이란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시간상으로 지금이 일요일이다.
한유정의 천살성이 7일 차로 폭주하는 날짜였다.
“아, 너 오늘 천살──”
“쉿! 현우 씨!”
이지아가 내 입을 가로막았다. 그녀가 한예림의 눈칠보더니 작게 속삭였다.
“아직 말하면 안 돼요.”
“아니, 예림이도 이제 같이 일하게 될…….”
“계약서에 도장 안 찍었잖아요.”
도장이라, 그건 또 맞는 말이지.
침을 꿀꺽 삼키며 한예림쪽을 쳐다봤다.
아씨, 괜히 봤네. 눈빛이 살벌하다.
서늘해지는 목덜미를 긁적이는데 이지아가 내 팔짱을 잡아당긴다.
“저흰 자러 들어가 볼게요. 예림 씨는…… 제가 쓰던 방 쓰시면 되요. 아, 저희가 들어가는 방 바로 옆방이에요.”
이지아가 나를 끌고 가는데, 뒤에서 싸늘하게 굳은 목소리가 들린다.
“야.”
“어, 응?”
“너 설마 이지아, 한유정하고 같이 자는 거야?”
이제는 존칭도 생략하네.
녹슨 고개를 겨우 끄덕이는데 이지아가 나를 홱 잡아당긴다.
한예림의 얼굴을 보기 무서워져 이지아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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