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22화 (22/112)

〈 22화 〉 한유정 (1)

* * *

한유정이 새침한 얼굴로 묻는다.

“저, 게임 알려줄 수 있어요?”

잠깐 생각해보자.

모처럼 두 달 만의 휴가다. 그것도 12시간의 아주 짧은 시간.

바스타드 사장이 항상 꿈에도 그리던… 와이프가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떠난, 그런 상황인 거잖아.

이런 휴가가 또 언제 올지 알아? 그 소중한 시간을 고작 게임에다가 전부 할애하라고? 진짜?

그거 엄청 마음에 드는데.

“그럴까? 약속도 했었고.”

흔쾌히 대답하자 한유정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아저씨, 컴퓨터 방에 있었죠?”

“응.”

“빨리 가요.”

“컴퓨터는 왜? 거실에서 하려고?”

“네.”

“됐어. 언제 옮겨서 선 연결해? 설치하다가 하루 끝나겠다. 그냥 게임방 가자.”

오랜만에 바람도 좀 쐬고 싶고. 이지아가 웬만큼 집순이여야지. 집에 얹혀산 지 두 달이 돼가는데 밖에 나간 횟수는 손에 꼽는다.

나도 활동적인 성격은 아닌데, 이지아는 좀 심할 정도다. 이러다가 무릎에 곰팡이 피는 거 아닌가 걱정이 들었는데 때마침 잘됐다. 이럴 때라도 나가야지.

환절기라 아직 낮 바람이 선선하다. 가벼운 봄 외투를 걸치는데, 블라우스 한 벌만 초라하게 입은 한유정이 멀뚱멀뚱 나를 기다린다.

“……옷 안 입니?”

“입었는데요.”

한유정이 블라우스 밑단을 잡고 살랑살랑 흔들며 강조했다.

“아직 여름 아니야. 밖에 바람 많이 부니까 외투 하나 걸쳐.”

“오후 되면 더워져요.”

“가방에 넣으면 되지. 아니지, 너 평소에도 그림자에다가 이것저것 집어넣잖아.”

“…….”

내 지적에 한유정이 슬쩍, 시선을 피한다.

설마 옷을 입기 싫어하는 건…… 고양이도 아니고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항상 비슷한 옷만 입고 있는 것 같은데.

문득 어느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아니, 설마.

아니겠지?

그래도, 혹시 몰라 물었다.

“유정아.”

“네?”

“너 혹시 옷 없어?”

한유정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아닌 척, 자기는 당당하고 멀쩡한 척 작게 헛기침하는데 부끄러워하는 거 이미 다 들켰다.

“……네. 없어요.”

한유정이 겨우 대답한다. 어떻게 외투 하나가 없어? 어이가 없어 물었다.

“전에 준 용돈은.”

“평소에 사고 싶었던 것들 샀어요.”

“뭐 얼마나 비싼 걸 샀길래.”

“그냥 게임기하고 부속품들 이것저것…….”

한유정이 말끝을 흐린다. 그 사이에 그 많은 돈을 전부 게임에다가 썼어? 옷 한 벌 못살 정도로?

“게임 말고 옷을 먼저 샀어야지!”

“어차피 곧 여름인데 지금 사면 한 달밖에 못 입잖아요.”

“환절기때 또 입으면 되잖아! 그걸 이유라고…….”

말을 말자. 저런 생각은 한번 죽었다 깨어나야 고쳐진다.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그래서, 너 지금 수중에 돈 얼마 남았어.”

한유정이 내게 팔을 뻗어 손가락을 쫙 핀다.

“오십만 원?”

절레절레.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오십만 원이 아니라면…….

“오만 원?”

절레절레.

이것도 아니야?

“야, 너 그럼…….”

정답을 말하려는데 한유정이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먼저 선수친다.

“오, 오천 원 남았어요…….”

“…많이도 남았다.”

이지아도 그렇고 이 집 아가씨들은 왜 경제 관념이 다 이 모양이지? 눈앞이 깜깜해진다.

“너, 진짜…… 알겠으니까 일단 이거라도 걸쳐.”

입고 있던 외투를 한유정의 어깨에 걸쳐줬다. 안 입는 것보단 낫겠지. 사이즈가 워낙 넉넉해 나름 트렌치코트처럼 보인다.

장롱에서 외투 한 벌을 다시 꺼내 옷 위에 걸쳤다.

“나가자.”

한유정과 어깨를 툭툭 부딪치며 밖으로 나갔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서로의 발걸음이 엇갈린다.

한유정은 오른쪽으로. 나는 왼쪽으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던 한유정이 다급히 내게 달라붙었다.

마치 고목 옆에 붙은 매미처럼.

그녀가 맴맴 울었다.

“아, 아저씨 어디 가세요? 게임방 저기로 가야 하는데.”

“차 타고 가게.”

“차요?”

한유정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묻는다.

“걸어서 금방인데 차를 타요?”

“들릴 데 있어. 게임방은 그다음에 가자.”

매미처럼 달라붙은 한유정의 목덜미를 잡고 조수석에 앉혔다. 문을 닫고 시동을 거는데 옆에서 계속 시선이 느껴진다. 고갤 돌리자 한유정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어디 가요?

눈동자에 딱 그렇게 쓰여 있다.

한숨을 내쉬며 안전밸트를 매는데 경고음이 울린다.

띠딩. 띠딩.

­안전벨트를 착용해주세요.

시끄러운 경고음에도 한유정은 움직일 생각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너, 안전벨트…….”

그러고 보니 얘 안전밸트 매기 싫어했었지. 허리를 숙여 한유정의 안전 밸트를 강제로 착용시켰다.

괜히 말 꺼내기 쑥스러워서 지나가듯, 툭 무심하게 내뱉었다.

“백화점 먼저 들리자.”

“네? 백화점은 왜요?”

“옷 사주게. 너 나이가 몇인데 외투 하나도 없이 그게 뭐냐?”

치킨 사 온 아버지가 오다가 주웠다고 하던 건, 이런 이유일까. 나도 모르게 괜히 툴툴거리게 된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한유정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색해 죽겠네. 헛기침하며 액셀을 밟았다. 그냥 게임이나 할 걸 그랬나? 그런데 저걸 보고 어떻게 게임방이나 가겠어. 안쓰러워서 계속 눈에 밟힐 게 뻔한데.

도로로 나온 자동차가 쭉쭉 앞으로 치고 나갔다. 조용하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둘만 남아서 길게 대화하는 게 얼마 만이더라.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처음이다.

항상 이지아가 옆에 있어서 조용할 틈이 없었으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 유정아?”

“네?”

“요즘 공부 잘 되니?”

“네…?”

아니, 이게 아니지.

얘가 공부를 왜 해. 재능 낭비도 정도가 있지. 핸들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기다가 겨우 주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너 편의점 갈 때 빼고는 지아 씨네 집에서 나가는 걸 별로 못 봤네. 부모님하고는 안 만나봐도 괜찮겠어?”

말하고 나서 곧바로 후회했다.

한유정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져서.

안 움직이는 목울대를 억지로 움직여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 어째 밟는 곳마다 지뢰다.

“마, 맞다. 저번에 운전하면서 봤는데, 역 앞에 디저트 카페 생겼더라구.”

“디저트 카페요?”

“응. 디저트 카페.”

한유정이 관심을 가진다. 됐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카페 알바했어서 그런데 관심이 많거든.”

“알아요.”

“어떻게?”

“그, 암살 프로필에서…….”

한유정이 멋쩍게 말하는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다.

“……어우, 춥다. 창문 올릴까?”

“네? 별로 안 추운데.”

“아냐, 내가 추워서 그래. 잠깐 올릴게.”

부르르 어깨가 떨린다. 입 조심해야지. 목에 팍! 칼이 꽂히는 장면이 눈앞을 스친다. 한유정의 눈칠 살피며 조심스레, 넌지시 권유했다.

“디저트 좋아하면, 백화점 들렀다가 카페 가자.”

“저 돈 오천 원밖에 없어요.”

아하하. 마른 웃음을 지었다.

얘가 날 뭐로 보고.

“설마 내가 데리고 가는 건데 애한테 돈을 내라고 하겠냐? 나 돈 많아.”

“어, 얼마나 사줄 건데요?”

돈 걱정할 필요 없다는 내 말에 한유정이 눈을 빛낸다.

어이구야, 입에서 침 떨어지겠네.

옷보다도 이쪽에 더 흥미 느끼는 거 같다. 괜히 이런 거로 생색내고 싶지 않아서 공수표를 던졌다.

“먹고 싶은 대로 골라. 포장도 좀 해가지 뭐.”

“진짜요?!”

저 조그만 몸뚱이에 들어가봤자 얼마나 들어가겠어.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우울한 분위기가 한결 가신 게 보여 나도 흐뭇해진다.

근데 옷 사고 디저트 카페까지 들리면 게임방은 대체 언제 가지?

모르겠다.

시간 남겠지, 뭐.

* * *

브런치 카페.

사장이 팔뚝을 슥슥 문지르며 엄살을 떨었다.

“……지릴뻔했네.”

“왜 그러세요, 사장님?”

“저기 테이블 분위기 왜 저래?”

직원이 고갤 빼꼼 내밀었다. 여자 두 명이 마주 앉아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지아와 한예림이었다.

그녀들이 말없이 핸드폰만 보면서 서걱서걱,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이고 있었다.

직원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왜?”

“전에 사장님 안 계실 때 커플 한 명 왔었거든요.”

“…?”

“남자가 바람피웠던 거 같은데, 그때 테이블 분위기보다 더 싸늘해 보이네요. 사람이라도 죽였나?”

“……농담처럼 안 들려서 더 무섭네. 손님들 저쪽 근처에 앉히지 마. 가게 인상 안 좋아지겠다.”

“넵. 주의할게요.”

이지아와 한예림은 직원의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식사에 집중했다.

“…….”

“…….”

소시지를 포크로 푹 찍은 이지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육즙이 소매에 튀었다. 이지아가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티슈.”

토스트를 우물거리던 한예림이 옆좌석에서 티슈를 쫙쫙 뽑아 건넸다. 낚아채듯 받은 그녀가 티슈로 소매를 긁었다.

달그락, 달그닥.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들린다. 커피잔을 홀짝이던 한예림이 인상을 찡그렸다. 커피가 텅 비었다. 그녀가 커피잔을 이지아에게 내밀며 말했다.

“물.”

딸칵! 물병의 뚜껑을 뜯은 이지아가 커피잔에 물을 쏟아부었다. 넘칠락 말락, 물이 절묘하게 가득 찬다.

이지아가 작게 웃으며 커피잔을 밀었다. 김현우와 있을 때는 절대 보여주지 않던, 짓궂은 미소였다.

“쯧.”

한예림이 짧게 혀를 찼다. 물이 넘치지 않게 조심스레 잔을 들어 올린다. 그래도 살짝 흐른 물이 테이블에 뚝뚝 떨어진다.

오기가 생긴 한예림이 벌컥, 물을 한꺼번에 들이마셨다.

탁!

테이블에 거칠게 잔을 내려놓은 한예림이 이지아를 노려보며, 강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물.”

“…….”

이지아가 물을 따랐다.

* * *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