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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23화 (23/112)

〈 23화 〉 한유정 (2)

* * *

어린이 대공원.

한예림과 이지아가 동물원을 걸었다.

때마침 돌고래 쇼가 진행 중이었다. 이지아가 솜사탕을 한 움큼 베어 물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표지판을 가리켰다.

“이거.”

한예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끼에에에엑!”

고리를 통과한 돌고래가 청량한 울음을 터트린다. 관객들이 손뼉을 치며 웃는다.

“…….”

“…….”

한예림과 이지아는 맨 앞 좌석에 앉아 다리를 꼬고 발만 까딱였다. 팔짱까지 낀 채로. 서늘한 둘의 태도에 조련사가 긴장된 웃음을 지었다.

‘맨 앞자리 관중들 반응이 중요한데.’

어느 공연이나 마찬가지였다. 공연 진행자도, 그걸 보는 관객들도 영향을 받는다.

조련사가 결단을 내렸다. 이런 분위기로는 공연에 지장이 갈게 너무나 뻔했다. 어쩔 수 없다. 돌고래쇼의 하이라이트를 지금 바로 터트린다!

‘너만 믿는다! 쭈리!’

조련사가 신호를 보냈다. 영리한 돌고래 쭈리가 첨벙! 하늘로 튀어 올랐다.

“끼에에에에엑──!”

돌고래가 관중석을 향해 물을 뿌렸다. 물에 맞은 관객들이 웃으며 비명을 질렀다. 조련사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돌고래 쇼의 하이라이트, 물뿌리기였다. 반응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관중석을 돌아보던 그의 눈길이 이지아와 한예림에게까지 닿았다.

“…….”

“…….”

푹 젖은 머리를 쓸어넘긴 한예림이 인상을 구기며 혀를 찼다. 이지아도 싸늘한 얼굴로 팔짱을 끼며 돌고래를 노려보고 있었다.

“끼룩…?”

동물은 인간보다 주변 환경에 민감하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쥐 떼들이 다급히 먼저 도망가는 현상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됐다.

영리한 돌고래 쭈리라면, 특히나 더더욱.

한예림과 이지아의 시선에 겁먹은 돌고래 쭈리가 오한을 느꼈다.

“켁!”

몸을 부들부들 떨던 돌고래 쭈리가 배를 까뒤집고 쓰러졌다. 게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온다. 조련사가 물에 뛰어들며 외쳤다.

“쭈, 쭈리! 쭈리야! 정신 차려 인마!”

*

수근수근. 쏙닥쏙닥. 쑥덕쑥덕.

백화점을 걷는데, 주변의 차가운 시선이 툭툭 내 얼굴을 때린다.

따가워 죽겠네. 얼굴 뚫어지겠다.

옆에서 걷고 있는 한유정과 어깨가 자꾸만 스친다.

가족이라기에는 어색하고 서먹한 분위기.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이유였다.

하긴. 26살짜리 성인하고 17살짜리 애하고 이렇게 붙어있으면, 나 같았어도 눈길 한 번은 갔을 거다.

그리고 이렇게 욕했겠지.

세상 말세네. 미친 새끼. 대낮부터 지랄한다.

그런 시선은 4층 여성복 매장에 도착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생각해보니까 오기가 생긴다.

내가 뭐 죄지었어? 입을 외투 하나 없다길래 옷 사주러 데리고 나온 건데. 철판 깔고 당당하게 행동하자.

“유정아, 일단 아무 데나 빨리 들어가자.”

“네?”

“좀.”

후다닥. 근처에 있던 매장으로 한유정을 끌고 갔다. 같이 옷을 구경하는데, 한유정이 내 소매를 꾹꾹 잡아당긴다.

“아저씨.”

“응?”

“이거요. 이거.”

한유정이 가리키는 옷을 보니 말문이 턱 막힌다. 색깔도 휘황찬란한 거적때기가 마네킹에 걸려있었다.

“……야, 됐고 그냥 내가 골라줄 테니까 그거 입어.”

“좋은 거 같은데.”

“좋긴 개뿔!”

아쉬워하는 한유정을 끌고 다니며 매장 구석구석을 탐방했다. 가끔 그녀가 발을 멈칫멈칫 세워서 마네킹을 가리키는데, 대부분 패션쇼장에서나 입을법한 옷이었다.

“일단 블라우스부터 고르자. 넌 뭐 들고 올 생각도 하지 마. 하의는…… 치마가 좋아? 아니면 바지?”

내가 묻자 한유정이 눈을 휘둥그레 뜬다. 웬일인지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는다.

“외, 외투 말고 다른 옷들도 사게요?”

“옷 사준댔잖아. 너 블라우스 깃에 때 탄 거 좀 봐.”

안쓰럽게, 진짜.

한유정이 헉! 숨을 들이쉬더니 겨우 내뱉는다.

“…저, 전 치마요.”

“그래?

“네에…….”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한유정에게 가져다 댔다. 뻣뻣하게 선 한유정이 침을 꼴깍꼴깍 삼킨다. 어리니까 아무거나 대충 걸쳐봐도 찰떡처럼 어울린다.

그래도 나이대에 어울리는 분위기가 좋을 거 같아서 단색 블라우스에 하늘하늘한 치마를 골랐다. 비슷한 거로 몇 벌 챙긴 내가 말했다.

“대충 사이즈는 맞을 거 같고. 일단 피팅룸에서 옷 갈아입자.”

“…….”

바리바리 싸든 옷을 들고 피팅룸으로 가는데 어째 말이 없다. 오고 있는 거지?

고갤 돌려 한유정을 찾았다. 등 뒤에서 총총 걸어오고 있었다.

어째 묘한 태도가 신경 쓰인다.

비어있는 피팅룸에 들어가 입을 옷들을 걸어놓는데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걸을 때도 어깨를 부딪쳐야 할 정도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야 하는데 옷 갈아입을 때는 어떡하지?

“아…!”

아까부터 이상하던 한유정의 태도가 이해됐다. 식은땀이 뻘뻘 흘러내린다. 다급히 옷을 회수하고 나가려는데,

철컥!

한유정이 피팅룸의 문을 닫고 걸쇠를 잠근다.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데 어떤 표정인지 알 거 같다. 머리카락 사이로 튀어나온 귀가 시뻘겋게 익어있었다.

한유정이 작게 속삭였다.

“아, 아저씨…… 누, 눈 좀…….”

그녀의 부탁에 질끈, 두 눈을 감았다.

*

천호의 한 오락실장.

동전 한가득 들고 오락실을 서성이던 남자에게 게이머가 다가왔다.

“야, 방금 저쪽에서 여자 둘이 격투 게임하는거 봤냐?”

“누구? 유명 스트리머라도 왔어?”

“아니,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런데?”

“어우, 조이스틱을 얼마나 살벌하게 누르는지 판때기 부서지겠더라.”

“어딘데.”

“저기.”

게이머가 손가락으로 반대쪽을 가리켰다.

남자가 등 뒤를 쳐다봤다.

사람들이 오락기를 둘러쌓고 바글바글 모여있었다. 웅성웅성. 가끔 터지는 감탄사. 오락기 위에는 동전이 바벨탑처럼 위태롭게 쌓여있었다.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씨팔, 비매너 새끼들이잖아? 동전 쌓인 것 좀 봐. 하루종일 한 거야 뭐야. 지들이 무슨 오락실 전세 냈어?”

오락실의 암묵적인 규율을 어긴 여자들에게 남자가 성을 냈다. 그런데 정작 게이머들의 반응은 이상했다. 다들 팔짱을 끼고는 흥미롭게 경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불쾌한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저놈들 게임 하다가 드디어 맛 간 거야? 반응들이 왜 저래? 비매너에 여자라고 봐주는 게 어딨어?”

남자의 의문에 게이머가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야. 너도 한 번 봐봐. 장난 아니니까.”

남자가 호기심을 가지고 오락기로 걸어갔다. 군중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그가, 오락기의 화면을 보고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

“…….”

파바바바바박!!

여자, 이지아와 한예림이 무표정한 얼굴로 조이스틱을 두들기고 있었다. 한예림이 현란한 콤보로 이지아를 때렸다.

끊김 하나 없이, 모든 콤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힐끔, 한예림의 계급장을 확인한 남자가 말을 더듬었다.

“화, 황단…?”

황금단. 준프로급 실력의 플레이어.

동네 오락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구경꾼들이 모일만했다.

이지아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두들겨 맞기만 했다. 남자가 혀를 찼다. 이지아의 계급장을 보니 초보였다.

‘움직이는 거 보니까 계정 새로 만든 것도 아니고…… 진짜 쌩초보잖아?’

잡기 기술에 걸리면 푸는 방법도 몰라서 속절없이 당하기만 한다.

[Win!]

[lose!]

단 한 대도 맞지 않은 한예림이 퍼펙트게임을 만들어냈다. 그녀가 오락기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던 이지아가 시선을 느끼고 눈동자를 마주쳤다.

“풉.”

한예림이 입가를 가리고 비웃는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이지아가 곧바로 동전을 투입했다. 게임이 다시 잡힌다. 둘 다 방금 경기와 같은 캐릭터였다.

남자가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우, 저거 멘탈 많이 갈릴 텐데.”

오늘 청정수 한 명이 신고식을 버티지 못하고 또 떠나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은 곧바로 반전됐다.

남자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한예림이 아니라 이지아의 플레이를 보려고 모였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툭! 툭! 툭!

이지아가 엉성한 손놀림으로 주먹질을 했다. 강공격과 약공격을 번갈아 넣는, 그냥 아무렇게나 키를 누르기에 초보자라고 하기도 뭐한 공격.

그런데, 콤보를 넣으려던 한예림이 주먹에 맞고 공격이 캔슬되면서 순식간에 수세에 밀린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게이머들이 단체로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남자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패, 패턴과 동작을…… 전부 외웠어?”

단 한 번 본 걸로?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되는데,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한예림이 무언가 하려 하면, 이지아가 약공격으로 빠르게 캔슬시킨다. 약공격을 맞고 경직된 한예림에게 이어지는 강공격. 발차기는 쓰지도 않는다.

조이스틱에서 단 두 개의 키만으로, 초보자가 준프로급 플레이어를 농락하고 있었다. 결국, 이지아가 퍼펙트로 한예림에게 승리했다.

쾅쾅쾅!

열 받은 한예림이 오락기를 마구 내려쳤다. 그녀가 시선을 느끼고 오락기 너머를 쳐다봤다. 이지아가 고개를 옆으로 내민 채 생글생글 눈웃음 치고 있었다. 그녀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지(Easy).”

까득, 한예림이 이를 세게 깨물었다. 그녀가 살벌한 눈빛으로 동전을 집어넣었다. 이번엔 방금과 다른 캐릭터를 골랐다. 한예림이 압도적인 실력으로 이지아를 이겼다.

그렇게 한 두 판을 이기고 나면 이지아가 곧바로 반격한다.

비정상적인 경기였다.

퍼펙트, 퍼펙트, 퍼펙트.

온통 퍼펙트게임이다.

한예림이 이기면 이지아가 역전한다.

이지아가 역전하면 다시 한예림이 캐릭터를 바꿔서 승리를 탈환한다.

양측 전부가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광경만을 연속해서 보여줬다.

“우와아아아!”

“콤보 끊는 거 봐! 예술이다!”

동전 탑은 갈수록 높아져만 갔지만, 누구도 그녀들에게 나오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불평하러 왔던 남자마저도. 박수와 환호성 소리가 커져만 갔다.

*

약속대로 한유정과 카페로 향했다.

차 안에서는 서로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어색해 죽을 거 같았는데, 가게에 들어오자 한유정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가만히 서서 메뉴판만 뚫어져라 들여다보길래 물었다.

“골랐어?”

한유정이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한다.

“잠깐만요. 딸기 케이크하고 티라미수 중에 고민하고 있어요.”

어이구, 이러다가 날 새겠다.

한유정을 귀엽게 바라보던 뒷줄의 손님들도 눈초리가 조금씩 옆으로 째지고 있었다.

“그냥 먹고 싶은 거 다 고르라니까?”

“오, 옷 비싸던데.”

“됐다고!”

걱정하는 한유정을 제치고 카운터 알바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위아래로 쭉 훑으며 말했다.

“이거 다 주세요.”

“네? 고객님, 다시 한번…….”

“메뉴 있는 거 전부 달라구요. 포장해서요. 아, 딸기 케이크하고 티라미수는 매장에서 먹고 가요.”

드르륵. 드르륵.

카드를 긁자 영수증이 내 키만큼 올라온다.

“영수증은 버려주세요.”

“……넵! 기다리시면 제품들은 포장해서 드리겠습니다.”

대답하는 알바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굳은 입꼬리가 마구 경련한다.

나도 알지 그 마음. 카페 알바했었으니까.

커피 수십 잔이 한꺼번에 단체 주문이라도 들어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딸기 케이크와 티라미수만 받아 테이블로 향했다. 자리에 앉는데 한유정이 엉덩이를 붙이고 옆자리에 앉는다. 주위를 둘러보니 또 시선이 날아와 얼굴에 파바박 꽂힌다.

이젠 정말 초탈했다.

“……먹자, 유정아.”

한유정이 포크를 든 채 옴짝달싹 못 하고 굳어있다. 딸기 케이크와 티라미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데 눈동자가 마구 흔들린다.

이제는 무슨 이유인지 알겠다.

“왜? 뭐 먹을지 고민돼서?”

한유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갈등 중인 그녀를 위해 새 포크를 꺼냈다. 디저트들을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둘 다 먹으면 되지.”

“아.”

감탄한 한유정이 디저트 한 조각을 가득 입에 문다. 항상 새침하던 얼굴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복스럽게도 먹네. 그렇게 맛있나? 호기심에 나도 하나 찍어서 먹어 보는데 그냥 달기만 하다.

한유정한테는 디저트 카페에 관심 많은 척했지만,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부담 갖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준 거지.

쯧, 학생 때는 나도 과자 많이 먹었는데.

디저트가 담긴 그릇을 옆으로 슬쩍 밀어줬다. 그러다가 한유정과 눈이 딱 마주쳤다. 입을 우물거리던 그녀가 꿀꺽, 딸기를 삼키더니 내게 말했다. 쑥스러운 기색으로.

“아저씨.”

“응?”

“오늘…… 고마웠어요.”

부끄러워서 뒤통수가 간질거린다. 참지 못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한유정.

날 죽이려고 했던 천살성 소녀.

협회장과의 관계는 모두 들었다. 한유정이 처음 각성했을때, 협회장은 일부러 그녀에게 일주일의 시간을 줬다.

왜? 어째서?

천살성의 현실을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다린 것이다.

나와 만나기 전까지 당장 자살하려던 이지아도 마음의 평화 범위를 극적으로 좁히지 않았다. 하지만 천살성은 달랐다.

살의가 폭주하는 일요일이 되면 이렇게 어깨까지 착 달라 붙이고 있어야만 했다.

한유정의 살의는 의지 같은 추상적인 것으로 극복하지 못한다.

협회장이 준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가장 먼저 해친 인간은 누구였을까? 친구? 일요일. 그것도 잠자는 시간대였을 텐데?

­부모님하고는 안 만나봐도 괜찮겠어?

차 안에서 한유정의 반응을 기점으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

일 년간 한유정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너무나 눈에 훤해서 순간 목구멍에서부터 무언가가 울컥 솟구쳤다. 눈시울이 살짝 벌게진 거 같기도 하다.

협회장 이 십새끼.

“너 입에 크림 묻었다.”

목소리가 좀 잠긴 거 같은데. 어색한 거 눈치챘으려나? 다행히 의심하는 기색은 없다.

“어? 진짜요?”

“있어 봐. 아저씨가 닦아줄게.”

티슈를 서너 개 뽑아 한유정의 입가를 마구 문질렀다. 한유정이 눈을 감고 인상을 찡그렸다.

“됐어. 다 닦았다. 생각날 때마다 와서 사줄 테니까 천천히 먹어. 나중엔 금방 질릴걸.”

단 음식이 다 그렇지.

그런데 한유정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아뇨. 이건 안 물릴 거 같아요.”

“그래?”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다 물리더라.

“유정아.”

“네?’

“그냥, 필요한 거 있으면 거리낌 없이 말해. 최대한 손 닿는 데까지 도와줄 테니까.”

한유정의 눈이 커진다. 고민하던 그녀가 멋쩍게 웃는다.

“아저씨.”

“응?”

“아저씨도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하. 당돌한 한유정의 약속에 웃음을 터트렸다.

*

한예림이 매표소에 팔을 탁 걸치며 카드를 내밀었다.

“영화 클래식으로 좌석 두 개요.”

“좌석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직원이 눈앞의 모니터에다가 좌석 리스트를 쭉 띄웠다. 옛날 명작 영화를 재개봉하는 거라 빈자리가 많았다. 눈동자를 쉴 틈 없이 굴리던 한예림과 이지아가 가운데 좌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동시에 말했다.

““가운데로. 한 자리 띄워서 주세요.””

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네? 자리 많은데…….”

“괜찮아요.”

단호한 거절. 직원이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럼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으시죠?”

“고마워요.”

싱긋 웃은 한예림이 티켓을 받아 이지아에게 내밀었다. 집게손가락에 걸린 티켓이 까딱까딱, 위아래로 움직인다.

“…….”

홱! 낚아챈 이지아가 앞서 걸었다. 한예림이 뒤따랐다. 영화관 스크린에는 지루한 캠페인 광고가 나왔다. 상영 시간까지는 아직 10분 남았다. 한 좌석 건너뛰고 앉은 이지아가 팝콘을 한 움큼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도대체 오늘 뭐 하는 거예요?”

이지아가 물었다. 한예림도 팝콘을 입에 털어 넣으며 대답했다.

“뭐가요?”

“밥 먹고, 놀이공원 가고, 오락실 가고, 영화 보고. 가자니까 일단 왔는데 지금 뭐 하는 거냐구요?”

한예림이 한마디로 요약했다.

“일이요.”

“…일이요?”

“네. 일이요.”

“밥 먹고 영화 보는 게 일이에요?”

“저한텐 일이에요.”

이지아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한예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영화 시간까지는 5분 남았다.

“앞으로 같이 일 해야 하잖아요. 저는 길드 대표고, 이지아 씨는 우리 길드 간판 헌터가 될 거고. 지분 가진 대주주님이기도 하고.”

“그래서요?”

“언제까지 얼굴 볼 때마다 으르렁거릴 거예요? 현우 없을 때는 제가 이지아 씨 데리고 다닐 텐데.”

“그럼…….”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비즈니스적으로는 좀 편하게 가자구요. 24시간 붙어 다닐지도 모르는데 항상 날선 반응하면 피곤해지잖아요. 서로.”

한예림 나름의 평화적인 제스처였다.

업계에서 구를 대로 구른 이지아도 한예림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길드 마스터와 간판 헌터가 척을 지는 건, 당연하지만 썩 좋게 보이지 않았다.

내부적으로도 문제다. 당장에 이지아부터 화신의 길드 마스터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어비스 던전의 공략이 실패하고 곧바로 버림패로 던져지지 않았던가.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김현우가 중간에서 중재하면 극단적으로 가진 않겠지만, 곪은 감정이 터지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이지아 씨하고 사적으로 친해질 생각은 없어요.”

한예림이 단단히 못 박았다. 이지아가 뾰로통한 얼굴로 팔걸이에 턱을 괴며 대답했다.

“그거참 다행이네요. 저도 친해질 생각은 없거든요.”

한예림도 팔걸이에 턱을 괬다.

영화관 조명이 암전됐다.

* * *

한예림과 이지아가 집으로 돌아왔다.

둘 다 지친 안색이었다. 견원지간에 같이 다니기 피곤했겠지.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둘을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대충 7시간 정도 지나있었다.

한예림에게 물었다.

“왜 벌써 왔어?”

“능력 발동 시간이 8시간이란 건 대략적으로 잡은 거니까, 안전하게 일찍 돌아왔지.”

한예림과 대화를 나누는데 이지아가 불쑥 끼어든다.

“오늘 뭐 했어요?”

“어, 밖에 나갔었죠.”

“밖에요? 유정이는…….”

“같이 갔죠.”

이지아가 등 뒤에 있던 한유정을 발견하고는 불쑥 묻는다.

“유정아, 옷 바뀌었네? 못 보던 옷인데.”

“네? 저요?”

갑자기 불똥이 한유정에게 튀었다. 그녀가 식은땀을 흘린다.

엎어져 있던 한예림도 눈을 빛내며 한유정을 쳐다본다.

“…아저씨가 사줬어요.”

“그래? 그리고?”

“뭘요?”

“그리고, 또 뭐 했냐구.”

시선을 쓱, 피한 한유정이 어색하게 웃는다.

“디저트 카페 갔어요.”

“디저트 카페?”

“역 앞에 새로 생겨서…… 가서 딸기 케이크하고 티라미수 먹고.”

한예림이 초조하게 다리를 떤다. 이지아가 한유정을 빤히 쳐다봤다.

“아하하…….”

한유정이 내 등 뒤로 쏙 숨었다. 이지아가 내게 묻는다.

“유정이 옷, 어떻게 갈아입었어요?”

“네?”

“…….”

“…….”

이걸 뭐라 대답해?

유구무언. 할 말이 없어 뻘쭘하게 목덜미만 긁적였다.

나도 알고, 이지아도 아는 뻔한 답밖에 없었으니까.

한유정을 노려보던 이지아가 허탈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예림도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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