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한유정 (6)
* * *
“입 찢어버리기 전에 닥치고 가만히 있어. 옆에서 짹짹대지 말고.”
이지혜의 입가에 걸린 친절한 미소가 경직됐다.갑자기 돌변한 한유정의 분위기. 분노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
이지혜가 코웃음 쳤다. 그녀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팔짱을 꼈다.
“야, 한유정.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전부 너 생각해서 하는 충고잖아. 괜히 사람 머쓱하게 만드네.”
충고? 웃기고 있네.
이지혜의 말 어디에도 걱정은 담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깔아뭉개려는 비열함만 가득 있었지.
한유정이 울렁이는 속을 가라앉혔다. 평상심을 잃으면 안 된다. 익숙한 일이다. 1년간 얼마나 노력했는데. 겨우 이런 어린애의 치기에 흔들리면 안 된다. 한유정이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학교 다닐 때부터 나한테 질투 느끼는 거 알고 있었어.”
“뭐?”
“전교 1등 항상 나 때문에 놓치고. 반장도 내가 했었으니까. 그때도 지금처럼 나 쫓아다니면서 신경 살살 긁었잖아. 몰랐을 거 같아?”
정곡을 찔린 이지혜가 볼을 붉혔다. 한유정의 말이 맞았다.
인형처럼 곱상하게 생겨서는 교우관계도 원만하다. 관심받길 좋아하는 이지혜로서는 열등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험장에서 한유정과 마주쳤을 때.
이지혜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1년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부모가 사망하고 정신적인 충격 탓인지 갑자기 잠적해버린 한유정. 그리고 곧 헌터로 데뷔할 이지혜.
1년 전의 격차를 좁히다 못해 그 이상으로 역전했다.
대화하면 할수록 묵힌 열등감이 시원하게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방금까지는.
“난 너 안중에도 없었어. 옛날도, 지금도. 그러니까 혼자 자격지심 느끼지 말고…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평상심, 평상심.
들끓는 살의를 가라앉혀야만 한다.
후우, 한유정이 작게 심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주위에 들끓던 살기가 사라진다.
“…….”
한유정의 기세에 짓눌려 있던 이지혜는 생각했다.
모두 착각한 것이라고. 각성한 지 한 달 된 초짜한테 겁먹었을 리가 없다. 자존심이 그런 가정을 거부했다.
이지혜는 마음 속의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혼자 고고한 척은 다 하네. 아직도 너가 옛날 같은 줄 알아?”
“…….”
“꼴 보니까 고등학교 입학도 안 한 거 같고. 유령 길드에 낚여서는 헌터 되겠답시고 맨몸으로 온 주제에.”
조소를 짓던 이지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한유정은 감독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1차 시험은 인원이 많은 관계로 나눠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앞 조부터 테스트를 진행하고 차례를 기다리는 수험생분들께서는 로비에서 대기를…….]
넌 지껄여라. 난 무시한다. 그런 태도가 등에서부터 느껴진다.
자존심이 상한 이지혜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한유정이 어떤 말에 화냈더라. 맞다. 그거였다.
“너 매니저….”
한유정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꾸민 꼬라지가 그게 뭐냐? 빵하고 우유 사 오는 것도 그렇고. 유령 길드라고 매니저도 어디 허접한 새낄 붙여줘서는. 그리고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거 같던데 아저씨는 무슨… 혹시 너 원조 교제하니?”
마음속 죄책감과 이성이 분노와 살의로 뒤바뀐다.
한유정이 삐걱 거리는 고개를 겨우 돌렸다. 붉은 안광에서 살기가 폭사한다. 시선을 마주한 이지혜가 숨을 헙하고 들이켰다.
“야.”
한유정이 집게손가락으로 이지혜의 볼을 꼬집었다.
“입 닥치라고 했지?”
끈적한 목소리. 1년간 살육과 피가 낭자한 뒷세계에서 살았다.
고작 훈련장에서 노력한 정도로는 절대 따라오지 못할 지독한 실전들. 비슷한 시기에 각성했지만 둘의 격차는 천지 차이였다.
재능과 실력 이전의 문제였다.
이지혜는 살의에 짓눌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볼살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시, 시험장이야. 여기. 사, 사고 치면……..”
겨우 끄집어낸 반격은 형편없었다. 한유정이 손가락에 힘을 줬다.
“아악!”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볼 안쪽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진 것이다.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모르겠다. 얌전한 성격의 한유정이 고작 모욕 정도로 왜 갑자기 막무가내로 나오는지. 각성한 지 한달밖에 안 된 각성자가 어떻게 이만한 힘을 가졌는지.
그래도, 그녀는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깨달았다. 한유정이 입을 찢겠다고 한 말이 허언은 아니란 것을. 살벌하게 뜬 눈빛에서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꾸욱.
볼이 찢어지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한유정의 등 뒤로 김현우가 나타났다.
“유정아?”
천살성의 살의가 사르르 녹아 사라진다.
퍼뜩 정신을 차린 한유정이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아저씨?”
“설명 다 끝났는데 둘이 뭐해?”
김현우가 의아스레 물었다. 한유정이 어색한 미소로 변명했다.
“어어, 놀고 있었어요!”
이지혜가 빨갛게 부어오른 볼을 쓰다듬으며 입을 벙긋거렸다.
놀았다고? 방금 그게?
“그래?”
김현우가 의외라는 듯 한유정과 이지혜를 번갈아 봤다. 사이가 나쁜 줄로만 알았는데, 서로 볼까지 찔러가며 장난칠 줄 몰랐다는 듯이.
“네. 아저씨는 어쩐 일이세요? 이제 시험 시작하는데.”
김현우가 허탈하게 웃는다.
“야! 감독관이 말하는 건 제대로 들었어야지!”
“장난치느라….”
“사람 많아가지고 나눠서 진행한대. 너 빵하고 우유만 먹여서 보낸 거 계속 신경 쓰였는데 다행이다.”
김현우가 보란 듯이 손에 쥔 봉투를 흔들었다.
“요즘 편의점은 디저트도 잘 나오더라구. 가서 간단히 요깃거리하고 후식으로 먹자.”
“디저트 뭐 있는데요?”
“딸기 생크림 케이크.”
“진짜요?”
한유정이 폴짝 김현우의 옆으로 뛰어갔다.
이지혜가 눈을 깜빡였다.
방금과의 괴리감에 지금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얼얼하게 느껴지는 볼의 통증에서 깨달았다.
현실이다.
“너…!”
화내려던 이지혜에게 김현우가 봉투에서 커피를 꺼내 불쑥 건넸다. 이지혜가 뭐냐는 듯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사양 말고 시험 들어가기 전에 커피 하나 마셔요. 많이 사 와서 남았거든요.”
“누가 이딴 싸구려…….”
발끈해서 김현우의 손등을 내치려던 이지혜가, 문득 그의 등 뒤에 있는 한유정과 눈을 마주쳤다.
“…….”
갑자기 머릿속에서 울리는 한유정의 목소리.
이지혜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커피를 받았다.
“자, 잘 먹을게요. 마침 마시고 싶었는데.”
“그거 다행이네요. 몇 조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시험 잘 보세요.”
“…넵!”
한유정과 김현우가 등을 돌려 떠났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이지혜가 다리를 휘청이더니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 * *
건물 밖 벤치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긴장한 수험생들도 몇몇 보인다. 인생의 분기점에 선 것이니까. 그 심정을 뼈저리게 이해한다.
띠리링~ 띠리링!
옆자리에 앉은 한유정은 핸드폰 게임에 집중하고 있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어깨가 같이 들썩인다. 장애물을 피해 동전을 먹는 게임이다.
뚜루룽!
장애물에 닿은 캐릭터가 요란한 음악과 함께 죽었다.
점수는 5만 점.
형편없는 기록이었다.
“아, 진짜, 이걸 왜 죽어.”
한유정이 작게 투덜거린다.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쑤셔 넣고,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줘봐.”
“네?”
“이런 건 미리 정해진 루트로 가지 않으면 피할 수 없는 패턴들이 있어. 그런 건 외우지 않으면 못 넘기거든. 잘 봐.”
파바바박!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며 나아갔다. 한유정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콧대가 높아진 내가 마구 기록을 갱신했다.
“아저씨? 이제 저 할래요.”
“…….”
“그만…….”
“…….”
“아저씨!!”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데 가느다란 손가락이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한유정이스코어 점수를 확인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에 세상이 꺼질듯한 얼굴로.
[score: 1,080,530]
“…….”
축 늘어진 어깨가 애처롭다.그녀가 울적한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난 이렇게 점수 못 올리는데….”
아씨, 최고기록이 쭉쭉 올라가는게 눈에 보이니까 혼자 신나서 오버했네.
재빨리 봉지를 뒤적이며 과자를 찾았다.
알사탕 포장을 하나 뜯으며 한유정에게 건넸다.
“미, 미안. 하다 보니까 신나서.”
“…….”
날 노려보던 한유정이 날름 사탕을 받아먹었다. 오독 오도독. 사탕을 깨물더니 다시 게임에 집중한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주위에서 긴장한 수험생들이 자기들만의 방법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한유정은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게임에 빠져있다.
그래, 긴장해서 어버버 대는 것보다는 괜찮지.
한유정이 그 정도 실력도 아니고.
사실 상상이 안 간다. 저 새초롬한 얼굴이 긴장으로 바짝 굳어있는 게 말이다.
“아, 맞다. 유정아. 너 조 확인했어?”
“네?”
“조 말이야. 조.”
“아니요.”
“너, 진짜….”
한유정이 내 눈치를 슬그머니 살피며 핸드폰을 집어넣는다. 입가에는 애써 짓은 미소가 어색하게 걸려 있다.
“그거까지 안 들으면 어떡해?”
“죄송해요.”
“일단, 내가 확인해놨으니까 조금 있다 시간 되면 들어가자.”
한유정이 물었다.
“몇 조인데요?”
“마지막 조야. 그러니까….”
잠깐 말을 멈추고 시계를 확인했다.
여유 있네. 아직 많이 남았다.
내가 말했다.
“6조.”
* * *
이지혜가 신경질적으로 따졌다.
“아니, 오빠! 걔 뭔가 이상하다니까?”
“뭐가?”
“내 볼 안 보여?”
이지혜가 퉁퉁 부어오른 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매니저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싸웠냐?”
“싸운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맞았다니까!”
이지혜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말은 이랬다. 한유정에게 볼을 꼬집혔는데 이 정도로 부었다고. 눈깔이 사람 백 명 정도는 담군 살인마 같았다고. 매니저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들을수록 한숨만 나온다.
“한유정이었나? 걔 각성한 지 한 달 됐다며?”
“응.”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각성한 지 한 달 밖에 안됐는데 볼 좀 꼬집었다고 그렇게 붓는다고?”
이지혜는 재능 있는 유망주다. 시간의 간극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매니저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물었다.
“너 사실대로 말해. 누구하고 싸웠어? 걔 병원 가야 해? 미리 말해놔야 합의가…….”
“아니라니까!”
이지혜가 답답하다는 듯 커피를 벌컥 들이켰다.
말이 안 된다. 안되는 건 안다. 각성한 지 이제 한 달 된 각성자한테 속절없이 당한 사실이, 말이 안 된다는 것쯤 그녀도 알았다.
하지만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으윽.”
이지혜가 얼음주머니를 볼에 가져다 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서늘한 한기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려졌다. 따갑고 뜨거웠다.
“그년 뭔가 있어. 뭔가 있다고.”
자존심이 상한 이지혜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다.
우습게 보고 자랑하려다가 오히려 된통 당한 꼴이라니.
그녀의 눈에 독기가 차올랐다.
“일단 너 말대로라면 한유정한테 개발렸다는….”
매니저가 쏘아보는 눈초리에 다급히 말을 바꾸었다.
“크흠, 아무튼 일단 시험에 집중하자. 한유정이고 뭐고 간에 시험을 합격해야 너가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아니, 걔가 내 볼을…!”
“야, 이거 합격 못 하면 길드에서 완전 나가리되는 거야. 너 정도면 뭐 재능도 충분하고 자신 있는 것도 알겠는데, 일단 시험에 집중해.”
매니저가 정색하며 말했다.
자격시험에 합격하는 건 유망주로서 아주 당연했다.
스타트 라인부터 다른 그들이 시험에서 떨어진다는 건 본인의 재능을 증명하지 못한 것이 된다.
결국, 길드에서는 계약에 대해 재고하거나 지원을 줄일 수밖에 없다.
매니저의 충고에 조금 진정이 된 건지 이지혜가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우린 몇 조인데?”
“아까 감독관이 다 설명해 줬잖아. 그것도 확인 안 했어?”
“이런 건 매니저가 할 일이잖아!”
이지혜가 짜증스레 외쳤다.
“아오, 저놈의 성질머리 진짜….”
작게 중얼거린 매니저가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
그가 말했다.
“6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