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한유정 (9)
* * *
저 멀리 몬스터 무리가 보인다. 이지혜가 필사적으로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방패를 버린 지는 이미 오래다.
걸리적거리는 건 모두 벗어던지고, 그녀는 뛰었다.
끼에에에엑!
인기척을 느낀 괴물이 괴성을 질렀다. 이지혜가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서걱!
괴물이 정확하게 절반으로 분리됐다. 시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쯧!”
이미 예상했던 바다. 이지혜가 방향을 틀어 옆에 있던 괴물에게 몸을 날렸다. 그녀가 칼을 휘두르려했다.
콰직!
갑자기 괴물의 머리가 터졌다. 이지혜의 칼이 뒤늦게 애꿎은 시체만 찔렀다. 그녀가 허공을 바라봤다.
[score: 397]
[20위>27위]
당연하지만, 시체를 찌른 거로 스코어는 오르지 않는다. 초조해진 이지혜가 함성을 내질렀다.
“덤벼라──!!”
몬스터 무리의 어그로를 끌었다. 방패도 없이 칼만 덩그러니 들었지만, 위험이 어떻고 체력의 분배가 어떻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께에에에엑!
이성을 잃은 괴물들이 사방에서 덤벼들었다. 이지혜가 나무를 등지고 전투를 대비했다.
서걱!
섬광이 번뜩이며 돌개바람이 불었다. 괴물들이 피 분수를 내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하, 시발… 이게, 이게 말이 돼…?”
이지혜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녀가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이지혜.”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한유정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포기해.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할 거야.”
“이, 이익…!”
이지혜가 분노로 어깨를 덜덜 떨었다.
그녀가 흙을 한 움큼 쥐어 집어던졌지만 한유정은 공중에서 한 바퀴 빙글 돌며 피했다.
날다람쥐처럼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내가 뭘… 뭘 그렇게 잘못했어?!”
이지혜가 악다구니를 쓰며 흙을 마구 집어 던졌다. 벌건 눈가에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그딴 개뼈다귀인지 매니저인지를 모욕한 게 이 정도로 잘못한 거야?! 이건, 내 인생이 달린 시험이야! 넌 지금 한 사람의 인생을 끝장내는 거라고!”
“징징대지 마.”
청문회에서 암살 명단을 갈기갈기 찢었던 김현우가 떠올랐다.
적인 협회장을 완전히 매장할 수 있음에도, 한유정을 위한 선택을 했다.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남의 사정까지 일일이 신경 쓸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많지 않거든. 그러니까, 알아서 조심했어야지.”
“으아아!!”
이지혜가 괴성을 내지르며 풀숲을 달렸다. 미쳐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score: 397]
[27위> 34위]
그 사이에 순위가 또 하락했다. 한유정의 목적은 확고했다. 바로 몬스터들을 사냥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
키에에에엑!
몬스터가 보인다. 이지혜가 상단 자세로 빠르게 접근했다.
휘릭!
어디선가 날아온 가느다란 실이 몬스터의 목을 감았다. 몬스터가 아등바등하며 공중으로 딸려 올라갔다. 이지혜의 칼이 뒤늦게 허공을 갈랐다.
[score: 397]
[34위> 41위]
이지혜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몬스터 어딨어? 몬스터!”
그녀가 다음 타깃을 찾았다. 저 멀리, 거대한 괴수가 풀잎을 뜯어 먹고 있었다.
“으아! 으아아아!”
이지혜가 칼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달렸다. 먹잇감을 발견한 괴수가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그워어어어어!
거대한 포효. 온몸이 쩌릿쩌릿 떨린다. 순간, 이지혜의 머릿속에 과연 혼자 저걸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필요 없는 의문이었다.
피슛!
어디선가 날아온 빛줄기가 괴수의 머리를 관통했다. 괴수가 다리에 힘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땅이 커다랗게 흔들렸다. 이지혜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score: 397]
[41위> 53위]
등수가 내려갔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공허한 눈동자가 사방을 훑었다. 몬스터를 발견했다.
끼에에에엑!
이지혜가 괴물에게 접근했다. 그녀가 칼을 높이 들어 올렸다.
푹!
어디선가 날아온 대거가 괴물의 미간에 꽂혔다.
[score: 397]
[53위> 67위]
몬스터를 발견했다.
서걱!
섬광이 번쩍인다. 괴물의 몸이 절반으로 갈라졌다.
[score: 397]
[67위> 84위]
몬스터를 발견했다.
콰직!
갑자기 괴수의 머리가 터졌다.
[score: 397]
[84위> 97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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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re: 397]
[97위> 12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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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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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re: 397]
[121위> 144위]
.
.
.
[score: 397]
[144위> 427위]
이지혜는 풀숲을 걸었다. 몬스터들의 씨가 마른 건지 이젠 보이지도 않았다.
“이제 제발 그만해… 미친 새끼야… 내가, 내가 잘못했어….”
지금부터 사냥을 한다고 해도 과연 합격권까지 갈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그래도, 지푸라기나마 잡아보고 싶었다.
“내가 말했지. 결국 울면서 컴퓨터를 끌 수밖에 없었다고.”
한유정이 피곤한 기색으로 두 눈을 집게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중이었다. 이지혜의 목에 칼을 꽂는 상상이 계속 떠올랐다. 천살성으로 난폭해진 성격 탓이다.
띠링!
이지혜와 한유정의 시야에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현재 남은 시간 10분입니다.]
[09:59]
[09:58]
[09:57]
“아, 안돼…….”
이지혜가 덜덜 떨리는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그녀가 비척이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코웃음 친 한유정이 빙글빙글 대거를 돌리며 이지혜의 뒤를 따랐다.
* * *
우리는 팔짱을 끼고 한유정을 기다렸다. 기다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카페 문이 열리며 소녀 두 명이 함께 들어왔다. 한유정과 이지혜였다.
“유정아! 여기!”
손을 번쩍 들어 시선을 끌었다. 한유정의 지친 안색이 한결 편해진다. 눈가가 거뭇한 게 피곤해 보인다. 시험이 힘들었나? 걱정스레 물었다.
“너 얼굴이 왜 반쪽이야? 괜찮아?”
“네.”
한유정이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리 주문해놓은 음료를 건넸다.
“힘들었나 보네. 고생했어.”
“별거 아니었어요.”
“별거 아니긴? 눈이 벌겋게 충혈됐는데.”
“이건 잠 못 자서 그런 거에요.”
한유정이 빨대로 스무디를 쭙쭙 빤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그려진다.
그건 그렇고.
한유정과 함께 돌아온 이지혜의 표정이 좋지 않다. 처음 만났을 때의 자본주의 미소는 어디 가고, 초췌해진 안색으로 연신 매니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지혜! 시험 잘 봤어?”
“아니, 그, 오빠.”
“무슨 말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여? 성적별로 안 좋아?”
“응….”
“20위권 밖이야?”
“응….”
“…30위권도 안 돼?”
이지혜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1차 시험 결과 나왔지? 줘봐.”
이지혜가 종이를 손에 쥐고 쭈뼛댄다. 알 것만 같다. 시험 대차게 죽 쒔구나. 매니저도 눈치챘는지, 안색이 시커멓게 죽는다.
그래도 실장이란 자리를 거저먹은 건 아닌가보다. 금세 감정을 추스르고 이지혜를 달랜다.
“일단 1차 시험은 이미 끝나고 지나간 일이니까, 실수는 2차, 3차 시험에서 만회하자.”
이지혜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린다.
“야, 이지혜! 1차 시험 망했다고 안 죽어! 기회 아직 있다니까?”
이지혜의 흐느낌이 더 커진다.
뭐야, 왜 저래? 카페 손님들의 시선으로 뒤통수가 근질근질하다.
한유정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유정아.”
“네?”
“쟤 무슨 일 있었어? 왜 저렇게 서럽게 울어?”
“아, 지혜요.”
한유정이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래?”
“네.”
매니저가 종이를 확인했다. 그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그리고 바짝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묻는다.
“현우 씨네는, 점수 어떻게 나왔어요?”
한유정이 나를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트 결과가 매니저의 손에 넘어갔다.
“각성한지 이제 한 달 됐다는데 결과야 뭐 보나마나 불합격이겠....”
내기의 결과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거 같았다.
종이를 펼친 매니저의 얼굴이, 잔뜩 굳어져 있었으니까.
불신이 가득 담긴 눈빛을 받으며, 나는 게슴츠레 웃었다.
“어때요?”
거봐, 이 양반아.
“제가 이겼죠?”
사마귀는 호랑이를 못 이긴다니까.
* * *
조수석에 한유정을 앉히고 운전대를 잡았다.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으려는데 전화가 왔다. 한예림이다.
“여보세요?”
유정이 3,000점이라면서? 1등 잘했다고 전해줘! 딱 원하던 그림이야.
깜짝 놀란 내가 물었다.
“점수는 어떻게 알았어?”
벌써 기사 떴지. 지금 올 거지?
“응.”
운전 조심해. 유정이는 괜찮아도 너는 훅 가니까.
“넌 항상 말 살벌하게 하더라.”
뚝. 전화를 끊은 내가 호기심에 인터넷을 확인했다.
뭐야. 진짜 기사 떴네? 얼마나 지났다고 바로 올라오는 거야?
조회수가 가장 높은 기사를 확인했다.
[3,000점을 넘긴 유망주의 등장! 제2의 이지아가 될 수 있을까]
급하게 써서 올린 건지 내용은 빈약했다. 한유정에 대한 정보도 많이 부족해서 추측성 글만 난무했다.
대형 길드가 꽁꽁 숨겨놓은 유망주다,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진짜 천재다, 어떻게든 하나 얻어걸리라는 식이었다.
대충 훑어보고 댓글을 확인했다.
[방배동라이더: 뭐야? 벌써 시즌 찾아왔네 3,000점이면 이지아 이어서 두 번째로 성적 높은 거 아닌가? 대단하네.]
[아방스트랏슈: 유망주랍시고 시간 지나면 몇 명 살아남아 있지도 않더라]
[wldk123: 장난치나 진짜ㅋㅋㅋ 누구하고 누굴 비교함? 이런 기사는 헌터 시험 있을 때마다 나오네… 아무리 그래도 이지아한테는 안 되지 ㅋㅋ]
[떡볶이냠냠: 아직 1차 시험만 끝난 거 아니야? 설레발 오지네]
[ㄴ방배동라이더: 그 1차 시험에서 3,000점 넘긴 게 여태까지 이지아 말고는 없었다고. 병신이냐?]
[ㄴ떡볶이냠냠: 모를 수도 있지 왜 시비임?]
아직은 두고 보자는 여론이 대다수였다.
하긴, 잠깐 반짝였다가 추락하는 유망주가 한둘이 아니었다. 몇 번 반복되다 보면 기대감도 한풀 꺾이기 마련이다.
다만 한유정은 다를 거다.
기대가 아닌 현실이다. S급 각성자인 한유정은 빠르게 치고 올라가 빛날 것이다. 제2의 이지아가 아닌 한유정이라는 이름으로.
그때 가서 이 댓글들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
악플이 될지, 호의적인 시선을 보낼지.
[gusdn999: 음… 나이 보니까 어린애인데 다들 말 너무 심하게 하지 말죠. 고등학생 때 댁들은 집에서 뭐 했는지 생각부터 하고 키보드 칩시다.]
핸드폰을 집어넣고 안전벨트를 맸다.
안전벨트를 착용해주세요.
안전벨트를 착용해주세요.
경고음 때문에 귀가 따갑다. 범인이 누군지는 뻔하다.
“한유정, 너…….”
한마디 하려다가 참았다. 한유정이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며 졸고 있었다.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다.
딸칵!
벨트를 착용시켜주고 시트를 뒤로 넘겼다. 조심스레 차를 몰아 도로로 나갔다. 자는 한유정을 의식하며 쭉 뻗은 길을 달리는데,
덜컹!
차가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한유정이 투정 부리듯 눈을 비비적거린다. 내가 괜히 변명했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도로에다가 쓰레기를 버렸어? 미안. 다시 자, 유정아.”
“네….”
한유정이 졸린 눈을 깜빡이며 시트에 몸을 파묻는다.
빨간 신호에 걸렸다. 검지로 핸들을 툭툭 두들기는데, 이지혜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정아.”
“네…?”
한유정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한다. 전방을 주시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지혜하고 중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거 맞지?”
“네.”
“이지혜 관련된 거로 한 가지 말하고 싶은게 있어서. 혹시, 사적인 부분까지 참견하는 게 꺼려지면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말씀하세요.”
마른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너가 친구가 없….”
“아저씨.”
“적잖아.”
“네.”
“기왕이면, 이지혜하고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가지고. 나하고 예림이를 봤으면 알겠지만, 학교 친구하고 사회 친구는 많이 다르거든.”
너무 꼰대 같나? 그런데, 정말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대인 관계가 워낙 좁았으니까.
이지혜가 성격에 조금 하자 있긴 해도 한 명쯤은 얼굴 볼 친구가 있으면 좋았다.
뭐, 괴롭히거나 그런 관계도 아니었다니까.
고개를 숙인 한유정이 슬쩍 웃는다.
“친하게 지낼게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마음이 한결 놓인다.
매니저의 말이 떠올랐다.
뺨이 부어오른 게 한유정의 탓이란다.
이지혜의 계략이 눈에 훤했다. 영악하기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리는데, 한유정이 물었다.
“왜 웃으세요?”
“아까 악산 길드 매니저하고 대화했던 게 떠올라서.”
“무슨 대화요?”
웬일인지 호기심을 드러낸다. 숨길만 한 이야기도 아니고, 사실대로 말해줬다.
“이지혜 뺨 봤어? 부어오른 거.”
“……네.”
“아니 글쎄, 악산 길드 매니저가 말했는데, 네가 그렇게 만들어 놨다는 거야. 근데 그럴리가 없잖아. 그치?”
동의를 구하는데 어째 반응이 없다. 마침 빨간 신호에 걸린 상태라 잠깐 조수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유정은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천사 같은 얼굴이다.
천살성을 떼놓으면, 정말 벌레 하나 잡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응?”
한유정이 이마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린다. 덥나?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었다. 시원한 바람이 텁텁한 내부를 가득 채웠다.
빠앙──!
뒷차가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다. 어이쿠, 한눈판 사이에 신호가 바뀌었다. 액셀을 밟았다. 차가 조용히 출발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