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42화 (42/112)

〈 42화 〉 이미 흘러넘친 술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4)

* * *

*

한유정이 흥얼거리는 콧노래에 맞춰 샌들을 벗는다.

“오늘 고마웠어요, 아저씨.”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방으로 들어간다. 손을 흔들며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쿵!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자마자 황급히 핸드폰을 꺼냈다.

[창식이형]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카페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야?

“형, 전에 말씀드린 거 있죠?”

­뭐? 무슨 일?

“술 마시면서 고민 얘기한 거 있잖아요.”

­아, 한유정? 왜?

냉장고를 뒤적이며 콜라를 찾았다.

딸칵!

캔을 따고 목구멍에 탄산을 쏟아부었다. 시원 텁텁한 단맛과 함께 갈증이 좀 해소된다.

“전에 형이 신뢰를 다시 담을 수 없게 되기 전에 비우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오늘 유정이하고 놀이동산 갔거든요?”

­놀이동산?

“올 때 애가 얼굴도 많이 풀어졌고 분위기 좋았는데, 이거 신호 괜찮은 거 맞죠?”

­쓰읍….

뭐야? 불안해지게 왜 또 입맛을 다셔?

­왜 그랬어, 현우야.

“네? 형이 그러라면서요.”

­이래서 남자는 자식을 키워봐야 한다니까. 야! 만약 네가 지금 17살이야.

“네.”

­얼굴 본 지 얼마 안 된 26살짜리 누나가 갑자기 단둘이 놀이공원 가자고 하네? 이게 좋아? 불편하지. 학교 선생하고 단둘이 가는 거 아니야, 인마!

“어? 그거 맞아요, 형…?”

­너 딸 있어?

“없죠.”

­난 있어. 그것도 17살짜리 동갑이야. 그럼 네 의견하고 내 의견하고 누가 더 신빙성 있을까.

“형이죠.”

­넌 지금 한유정하고 아빠와 딸만큼의 관계가 아니야. 너 혼자만 내적 친밀감이 그 정도인 거지. 한유정은 딱 학교 선생 정도로 생각할 거라고.

식탁에 앉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불편한 거였나? 분명 표정 괜찮았는데.

­그거야 인마, 집주인이 같이 놀러 가자는데 거기다 대고 싫은 티를 팍팍 풍기겠냐? 뻔히 서로 스케줄 없는 거 알고 있는데.

“집주인은 지아 씨….”

­용돈 준다면서?

앞뒤로 조여오는 사장의 대화법에 할 말이 없어진다.

­너는 접근법이 잘못됐어, 접근법이. 놀이동산은 조금 가까워진 다음에 갔어야지.

“어떡하죠?”

­뭘 어떡해? 편법 쓰려고 하지 말고, 정공법으로 가.

“그니까, 그게 뭔데요?”

­게임 좋아한다면서?

“그럼 같이 게임해주면 될까요? 약속한 것도 있긴 한데.”

사장이 한심스럽다는 듯 말한다.

­아, 진짜…. 현우야, 그게 아니지. 이럴 때는 오락실이나 영화관이 나와야지.

뭐?

“그게 왜 그렇게 돼요?”

­게임은 걔가 맨날 하는 거잖아, 인마! 네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해줄 수 있는 거고. 다음에 쉴 때는 오락실이나 영화관 가.

“형, 근데 놀이동산은 불편했을 거라면서요…?”

­이 새끼 진짜 답답하네. 일할 때는 그렇게 눈치 빠르던 놈이 왜 이래? 놀이동산이야 가는 길이 멀어서 불편하고 어색한 거지. 막상 가면 재밌게 놀잖아, 인마!

“아.”

하긴 영화관이나 오락실이야 동네마다 하나씩 있으니까 가는 길도 금방이다.

­일단 학교 선생이랑 단둘이 놀이공원 가면 불편하다는 거. 이거 동의하지? 듣자마자 상상되잖아. 차 안에서 숨 막히는 분위기 어떡할 거야.

“네, 그쵸.”

­근데 선생이 야자째고 근처 영화관이나 오락실 가자고 하면 어떨 거 같아?

어떻긴.

끝내주겠지.

“형, 한 번에 이해했어요.”

­그래, 끝나면 괜찮은 데서 밥도 한 끼 먹고.

“밥 먹는 건 안 불편해할까요?”

­불편하겠지.

“그럼 안 하는 게….”

사장이 한숨을 쉬며 조언한다.

­그럼 대체 둘이 언제 친해지게? 구더기 무섭다고 장 안 담글 거야? 어색하고 불편해도 친밀감을 쌓아야 할 거 아니야. 불편하다가 금방 괜찮아져. 이런 건 거리감을 조금씩 좁혀야 하는 거야.

“덕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좀 보이는 기분이에요.”

­그래 인마, 원래 친해지려고 다가가는 게 제일 어려운 거야. 다음에는 혼자 고민하지 말고 물어볼 거 있으면 나한테 먼저 전화해.

“다시 전화드릴게요.”

­어. 고생해라.

뚝.

전화를 끊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음에는 내 생각대로 하지 말고, 사장의 말에 따라야겠다.

저쪽이야 이미 애 하나를 번듯하게 다 키운 가장이니까.

뭐든지 경력이 중요하다.

인생 선배의 금 같은 조언을 가슴속에 새기며 방으로 돌아갔다.

한유정이야 프로필 사진을 끝으로 오늘 할 일이 끝났지만, 매니저인 나는 다르다.

컴퓨터에 접속하고 포털 사이트를 뒤졌다.

2차 시험에 관한 기사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하나씩 훑으며 진행 상황을 확인했다.

[불법 로비 직원의 정체는 시스템 팀 중간 관리자]

[협회 측, 헌터 시험 중단 없어… 예정대로 진행할 것]

결국 대형 길드와 협회의 잘못은 쏙 들어가고, 개인의 일탈로 빠졌다.

이미 예상하던 일이다.

꼬리 자르기야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으니까. 조기 진압이 빨라 불도 더 붙지 않은 거 같고.

일부에서 대형 길드들의 잘못을 지적하긴 했다. 하지만 정황뿐인 데다가 전부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있어서 확정적인 증거를 잡기에는 제법 요원해 보였다.

결국, 전과 달라진 건 없다.

2차 시험은 그대로 진행될 거다. 꼬리로 잘려 나간 몇 명은 보여주기식 일부에 불과했다. 대부분이 시험 자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하다.

이제 한유정에게 티 나는 장난질을 치지 못할 거다.

그걸로 됐다.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대형 길드들의 평판을 떨어트리고 싶던 것도 아니다. 그저 한유정을 공정한 조건까지 올려보겠다고 밑바닥에서 발악한 거지.

다른 기사도 둘러봤지만 전부 제목만 살짝씩 바꾼 복제 기사들뿐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다. 잠옷 차림의 한유정이 쭈뼛대며 서 있었다. 금방 씻은 건지 뽀송뽀송하고 볼도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다.

한창 잘 시간 아닌가?

“무슨 일이야?”

한유정이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대답한다.

“그, 시간 돼서요….”

시간?

아.

시계를 확인했다. 23시 13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토요일이었지? 요즘 워낙 바빠서 날짜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직 좀 남은 거 같은데.”

“피곤해서, 먼저 와있으려구요. 방에 혼자 있으면 저도 모르게 잠 들 거 같아서….”

“들어와.”

한유정이 젓가락처럼 뻣뻣한 관절을 움직이며 들어왔다. 그리고 긴장된 얼굴로 침대에 앉는다.

“뭘 새삼스레 그렇고 있어? 그냥 편하게 있어.”

“네? 제가 불편해 보이세요?”

“응, 많이.”

“아뇨! 저 지금 엄청 편해요.”

글쎄, 옆에서 봤으면 절대 그런 말 못할 텐데. 한유정이 팔다리를 보란 듯 접었다 폈다 한다. 그런데 그게 꼭 고철처럼 삐걱댄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며 쳐다보다가, 한유정의 뚱한 얼굴을 보고는 정신을 차렸다.

“무리하지 말고 그냥 있어. 잠깐 할 거 있으니까.”

“…네.”

다시 마우스를 딸칵거리며 한유정의 기사를 찾았다. 잠들기 전 인터뷰 내용을 확인하는 건 하루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일과였다. 혹시나 기자들이 장난질 친 건 아닐까 싶어서.

이미 한 번 데일뻔해서 좀처럼 믿음이 가질 않는다.

길드라고 표현하기에는 아직 심사 중이지만, 현재 우리 길드는 부족한 게 많았다.

가장 먼저 직면한 거야, 홍보팀의 부재로 언론사에 대응하는 게 힘에 부친다. 태산 길드가 곧바로 진압에 나섰던 걸 생각하면 어서 빨리 조직도가 갖춰졌으면 하는 마음인데.

아직 먼 길이다.

이런 조막만 한 길드에 홍보팀이고 운영팀이고 전략팀이고는 무슨.

구멍가게에 담당 회계사 두는 격이다.

전반적인 건 한예림이 싹 다하고 나는 이렇게 발로 뛰는걸 할 뿐이…….

응?

등 뒤에서 달짝지근한 샴푸 향이 난다.

어느새 등 뒤에 다가온 한유정이 모니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일 하신다는 게 제 기사 확인하시는 거였어요?”

“응, 전에 기자하고 멱살 잡고 싸울뻔했잖아. 늦게라도 한 번씩 확인해줘야지. 안자고 뭐해?”

“뭐 하시는 건지 궁금해서요. 그런데….”

한유정이 간지럽게 웃는다.

“저 때문에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시는 줄은 전혀 몰랐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담당하는 헌터잖아. 매니저인데 제대로 관리해줘야지.”

“헌터, 매니저….”

한유정이 작게 중얼거린다.

인터넷 종료 창에 마우스를 올리며 생각했다.

바탕화면에 이상한 거 있었나?

없던 거 같다. 여자뿐인 집이라 혹시 몰라 더 조심했다.

안심하고 눌렀다.

자리에서 일어나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시간 넘어갈 거 같은데, 이지아는 언제 오나 생각하니까 방문이 슬며시 열린다.

잠옷 차림의 이지아가 이불을 품에 안고 들어왔다.

“현우 씨, 바로 잘 거예요?”

“그래야죠.”

천살성은 일요일마다 한유정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다.

이지아 같은 정신적 문제가 아닌 각성한 능력의 문제. 그 때문에 신체 일부분을 착 달라 붙이고 있어야만 억제가 가능했다.

곧 있으면 날짜가 넘어갈 시간이다. 슬슬 잘 준비해야지. 이부자리를 정리하는데 이지아가 말을 걸어온다.

“요즘 일 어때요?”

“인터뷰다 뭐다 해서 바빠 죽겠어요.”

내 투정에 이지아가 웃으며 옆에 선다.

“이번엔 유정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으니까요. 매니저인 현우 씨가 많이 힘들긴 할 거예요.”

“지아 씨 시험 때도 이랬어요?”

“더 바빴죠.”

이지아가 머쓱하게 웃는다.

“저는 신인 때부터 엄청 유명했잖아요. 아시죠?”

알지.

이지아의 삶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정말, 태양 같은 존재였다.

등장 때부터 밝게 타올라 저 하늘 위에 우뚝 선, 태생이 다른 인간.

“예림 씨하고 대화 나눠봤는데, 길드 심사 통과하고 정식으로 허가받으면 직원도 새로 뽑을 거래요. 사무실도 알아보고 있어요.”

“아, 들었어요.”

“그렇게 되면 매니저도 새로 뽑을 수 있고, 현우 씨 일도 많이 줄어들 거에요.”

“어떤 식으로요?”

“현우 씨 담당이 저로 바뀔 수도 있죠.”

“유정이는요?”

“저희 둘 다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까 현우 씨가 계속 관리하긴 할 거예요. 그런데 유정이는 아무래도 서브로 맡고, 주로 담당하는 헌터는 제가 되겠죠.”

숨을 헙하고 들이키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 싶어서 뒤돌아보려는데 이지아가 말을 이었다.

“아쉬운 소리 하는 횟수는 많이 줄어들 거에요. 저하고 다니면 대부분 을보다는 갑 쪽이거든요.”

하긴, 어디 가서 고개 숙이는 일은 적을 거 같다. 이지아야 국내에서도 첫 번째로 꼽히는 헌터였고, 꼭 던전이 아니더라도 이지아의 이력을 원하는 곳은 제법 많았다.

“예림 씨도 이번에 현우 씨가 일 처리 하는 거보고 되게 감탄하는 눈치더라구요.”

“제가 일을 좀 잘하죠?”

“그걸 말이라구요. 청문회 때부터 똑 부러지게 하는 거 제가 다 봤잖아요.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현우 씨는 승부사 기질이 좀 있는 거 같아요.”

“사람 쑥스럽게….”

“제가 뭘요? 있는 그대로 말한 건데. 시간 늦었다. 이제 슬슬 자요.”

이지아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침대 위에 몸을 눕히려는 때였다.

찰싹!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이지아가 벌건 손을 붙잡고 뒤로 물러나는 게 보인다.

뭐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한유정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갑자기 팔을 맞은 이지아보다도, 훨씬 더.

한유정이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슬쩍 내리깐 눈이 이번엔 이지아에게로 향한다.

그곳에, 작은 결심이 서린다.

“아줌마….”

한유정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냥, 예림이 언니하고 같이 자면 안 돼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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