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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44화 (44/112)

〈 44화 〉 송곳 (1)

* * *

[kdlw999님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메시지 옆의 숫자 1이 사라지지 않는다.

방금까지 댓글로 싸우던 거 보면 금방 확인할 거 같은데.

기다리는 동안 품속의 한유정을 쳐다봤다. 게임에 집중하던 한유정이 시선을 눈치챈 건지 올려다본다.

“아.”

그리고 어색하게 다시 고개를 내리깐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설마 새벽에 있었던 일 때문인가?

“유정아.”

“네?”

대답은 평소처럼 무뚝뚝하다.

마치 어제 일은 신경 안 쓴다는 걸 주장이라도 거처럼.

그런데 내 가슴팍에 닿은 한유정의 등은 긴장으로 잔뜩 굳어져 있다.

“어제 말한 거 있잖아.”

“…네.”

“담당이 바뀐다고 지금의 관계까지 바뀌는 건 아니야. 설마 그런 속물적인 이유로 신경 써줬겠냐?”

“아뇨, 저도 그렇게는 생각 안 해요.”

발을 꼼지락거리던 한유정이 뒤늦게 중얼거린다.

“그래도 지금과는 다르겠죠?”

“응?”

“아저씨가 담당하는 헌터가 바뀌면요. 아줌마가 됐든, 나중에 길드에 들어올 헌터가 됐든 간에요.”

한유정이 게임기의 패드를 누르며 말한다. 별로 집중하지 못하는 눈치다. 화면에는 게임 오버가 뜬지 한참인데, 의미 없이 버튼만 꾹꾹 누르고 있다.

“지금처럼 절 위해서 일 하는 게 아니잖아요.”

한유정의 머리카락이 부슬부슬 턱 끝을 스친다. 간지러운 목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치? 아무래도, 큰 문제라면 회사 차원에서 나서겠지만… 담당 헌터를 가장 신경 쓰게 되겠지. 같이 일하는 시간도 지금보다는 줄어들 거고.”

담당 헌터가 달라지면 많이 바뀌긴 할 거다. 헌터 한 사람이 매니저를 몇 명씩 데리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

그런 헌터들이야 반쯤은 연예인처럼 활동하는 경우지만, 일반적인 헌터들도 바쁜 시기에는 매니저 하나로 벅차서 많이 갈려 나간다고 한다.

그렇다고 남처럼 데면데면해질 만한 일도 아니다. 집에 돌아오면 매일 마주칠 거고. 아직 이지아를 담당하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사서 하는 걱정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응?”

“그냥… 어제는 이상한 말 해서 죄송해요. 이제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정말 괜찮을 걸까. 한유정의 등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를 닦지 않은 듯 입안이 텁텁하고 찝찝했다.

띠링!

컴퓨터에서 알람 소리가 났다. 극성팬한테 답장이 왔다. 드디어 읽은 모양이다. 메시지창을 확인했다.

[kdlw999: 어, 네… 이지아 팬 맞아요. 그런데 누구세요?]

[나: 저도 이지아 팬이라서요. SNS 둘러보다가 싸우시는 거 보고 호기심 생겨서 연락드리는 거예요]

[kdlw999: 아…ㅎㅎ 이지아 팬 이시구나ㅋㅋ!!]

뭐야? 생각보다 되게 호의적이고 예의 바르다. 댓글로 싸울 때는 쌈닭으로밖에 안 보였는데.

[나: 무서운 분일 줄 알았는데 생각하고 되게 다르시네요]

[kdlw999: 악플러들한테만 그래요 제가 뭐 싸우는 거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글쎄, 충분히 즐기는 거 같았다.

[나: kldw999님을 쭉 지켜봤는데, 이지아를 정말 좋아하시는 게 보이더라구요]

[kdlw999: kdlw인데 오타나셨네ㅎㅎ]

[나: 앗, 죄송합니다]

[kdlw999: 닉네임이 영어라 좀 복잡하죠? 잠깐만요]

극성팬의 닉네임이 변경됐다.

[패왕 지아: 이제 부르기 편하죠?]

[나: 아… 남자세요…?]

이상하다. 분명 전에 올린 글을 볼 때는 꼭 여자 같았는데.

남자들은 다 어린 여자 좋아하냐고 한탄하는 글도 올렸었잖아.

설마 게이였나?

[패왕 지아: 아뇨, 여자예요. 국밥요정님도 여자시죠?]

[나: 네? 왜요?]

[패왕 지아: 이름이나 말투가 여자같으셔서ㅋㅋ 몇 살이세요?]

[나: 스물여섯이요]

[패왕 지아: 흠… 저도 스물여섯인데… 동갑이니까 친구시네]

뭐지?

뭔가, 뭔가 대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패왕 지아: 나이도 같고 인터넷이니까 서로 말 편하게 놓을까요?]

[나: 네? 어, 편하게 하세요]

[패왕 지아: 그래? ㅎㅎ]

[나: 그리고 아까 나보고 여자라고 한 거 있잖아]

[패왕 지아: 아, 의심해서 미안. 이상한 사람들 때문에 남자한테 메시지 오면 답장을 잘 안 해]

‘나 사실 남잔데’, 라는 글을 빠르게 지웠다.

들어봤다. 남녀불문하고 이성에게 노출 사진을 보내는 변태들이 있다고.

나야 그런 목적은 아니지만, 갑자기 남자라고 밝히기도 상황이 어정쩡해졌다.

[나: 맞아 요즘 이상한 사람들 많더라ㅋㅋ]

호기심에 찔러본 거치고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패왕 지아와의 채팅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의외로 대화를 하다 보니까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나이대가 같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분명 처음 만났는데도 묘하게 호감이 갔다. 패왕 지아도 비슷하게 느낀 건지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패왕 지아: 너 이지아 진짜 좋아하나보다ㅋㅋ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나: 좀만 찾아보면 아는 건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패왕 지아: 닉네임 봐, 이지아 팬이라니까]

뭔가 좀, 본격적인 사람 같았다.

아무래도 매니저로서 활동하다 보니까 나도 이지아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조사한 편인데, 패왕 지아는 더 했다.

당장 이지아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취향 같은 사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꿰차고 있었다. 여자 팬이 아니라 남자 팬이라고 했으면, 불쾌감이 느껴졌을 정도였다.

[패왕 지아: 아ㅋㅋ 나 잠깐 볼 일 있어서 그만 나가볼게]

[나: 담에 봐]

패왕 지아는 그대로 SNS를 종료했는지 상태창이 로그아웃으로 바뀌었다. 제법 길게 채팅했다. 뻣뻣하게 굳은 어깨를 쭉 잡아당기며 기지개를 켰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지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현우 씨, 저 잠깐 예림 씨하고 나갔다 올게요.”

“무슨 일 있어요?”

“장 좀 보고 오려구요.”

“그럼 저도 같이 가죠.”

“유정이하고 그러고 나가게요…?”

이지아가 내 무릎 위에 앉아있는 한유정을 빤히 쳐다본다.

나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이지아를 배웅했다.

&

“텄어.”

소파에 시체처럼 골아 떨어져 있던 한예림이 벌떡 일어났다. 커피잔을 내밀며 물었다.

“텄다니, 뭐가?”

옆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는데, 한예림이 서류 봉투를 불쑥 내밀었다.

“뭐야?”

“길드 심사 건.”

“아, 반려됐다는 거? 잘 처리 됐어?”

“아니. 또 반려됐어.”

한예림이 다리를 꼬며 커피를 마신다. 쓰읍, 아메리카노가 갑자기 팍 쓰게 느껴지는데. 잔을 내려놓고 서류 봉투를 확인했다. 가장 앞장에 ‘불허’라는 글자가 큼지막한 도장으로 찍혀져 있었다.

쭉 훑어봤지만, 약관이 어떻고 조항이 어떻고 빼곡하게 적혀있는 글자들을 내가 본다고 뭐 알 거 같지는 않다.

그러모은 서류들을 테이블에 던지며 물었다.

“서류는 전부 확인한 거야?”

“벌써 반려만 세 번째라 짜증 나서 규정 다 뒤지고, 여기저기 물어보면서 준비했어.”

“그런데?”

“이게 결과지. 왜 반려된 건지 아직도 모르겠네. 난 분명 완벽하게 준비했거든.”

조금 이상했다. 처음 한두 번이야 실수라고 볼 수 있지만, 이게 벌써 몇 번째야?

한예림은 에이스에서 이미 팀장급 매니저로 근무한 이력이 있다.

동양인이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길드의 관리자까지 올라간 거다. 당시 기준으로 25살짜리 애송이가.

고작 2년 만의 결과였다.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괜히 미쳤냐고 타박한 게 아니다.

그런데, 서류 심사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질질 끌고 있다고? 그 정도로 허술하게 일할 거라고는 생각 들지 않는다.

한예림이 머리를 거칠게 긁적이며 일어났다.

“어디가?”

“서류 재검토하고 자문받아봐야지. 이지아하고 나가볼게. 쉬고 있어.”

*

이지아가 자연스레 조수석으로 들어갔다. 한예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운전석에 앉았다.

“내 참, 회사 잘 돌아간다. 대표가 운전하는 꼬라지 하고는….”

“제가 운전이 좀 미숙해요. 어디 갈 일 있으면 맨날 매니저가 해줘서.”

“그게 자랑이에요?”

“변명이죠. 미안하니까.”

그럼 미안한 얼굴을 하던가, 한예림이 혀를 차며 차 키를 꽂아 넣었다.

띠링!

이지아의 주머니가 울렸다. SNS 계정으로 메시지가 왔다.

[국밥요정: 점심으로 짜장vs짬뽕]

이지아가 자판을 꾹꾹 눌렀다.

[나: 짬뽕]

[국밥요정: 오ㅋㅋ 통했음]

핸드폰을 집어넣은 이지아는 창가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괬다. 긴 터널을 빠져나올 때쯤, 한예림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요?”

“예?”

“어떤 재밌는 생각을 그리하길래, 운전하는 사람 심심하게 입 꾹 다물고 있냐구요.”

이지아는 한참 동안 갸름한 턱을 쓰다듬었다. 한예림은 운전용 껌을 씹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귀찮아서 무시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참에 이지아의 입술이 열렸다.

“유정이요.”

한예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유정이가 왜요?”

“걔요.”

“예.”

“현우 씨를 너무 따르지 않아요?”

“그렇긴 하죠. 우리하곤 별로 대화도 안 하는…….”

“꼭 좋아하는 거처럼요.”

한예림이 인상을 찌푸리며 마구 기침했다. 목에 걸린 껌이 넘어가지 않았다. 한 손으로 가슴을 턱턱 두들기던 한예림이 눈물을 찔끔 뺐다.

“에이씨, 당황해서 어디 박을뻔했네. 둘이 몇 살 차인데요?”

“9살이죠.”

“뭔 고민을 그리하길래 회사 옮길 생각하고 있나 걱정했더니….”

한예림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아 씨는 9살 위의 남자하고 사귀고 싶어요?”

“싫겠죠.”

“유정이도 똑같죠. 17살 입장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세대 사람인데. 현우를 왜 좋아해요. 부르는 것도 아저씨라고 딱 잘라 부르더구만.”

팔짱을 낀 이지아가 탁탁, 검지로 팔뚝을 두드렸다.

“학교 다닐 때요.”

“예.”

“반에 한 명씩 있잖아요. 학교 선생님 좋아하는 애들.”

“그쵸. 아, 유정이도 그런 비슷한 거다?”

한예림이 머리를 긁적인다.

“그런 느낌은 전혀 아니던데. 현우가 잔정이 많다 보니까 오빠처럼 따르는 느낌이지. 좋아한다고 해봤자 호감하고 사랑을 착각하는 거겠죠. 아직 어리잖아요.”

이지아는 대답 대신 자신의 손등을 쳐다봤다.

“글쎄요.”

이지아가 입술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런 걸 수도 있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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