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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45화 (45/112)

〈 45화 〉 송곳 (2)

* * *

요즘은 나나 한유정이나 집에서 한량처럼 지냈다. 한예림과 이지아는 이것저것 준비한다고 얼굴 보기도 힘들었지만.

그거야 공동 창업자들의 일이고. 신입 매니저인 나는 일 없으면 이렇게 소파에 누워 TV나 보는 거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쉬는 건지.

그동안 바쁘다고 못 챙겨 본 드라마와 영화들을 쭉 훑는데, 멀리서 한유정이 쭈뼛대며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왜 그러고 있어?”

“아저씨, 저 부탁하나만 드려도 돼요?”

뭐지?

웬일로 내게 부탁을 하려나 보다. 항상 내가 먼저 챙겨주지 않으면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않았는데.

자세를 고쳐앉으며 물었다.

“뭔데?”

한유정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인다.

“저 성인 인증 좀….”

얼굴을 쓸어내렸다.

벌써 가는 귀가 먹었나.

“어떤 인증?”

“성인 인증이요.”

“아니, 성인 인증을, 무슨….”

당황해서 말을 더듬으니까 한유정이 다급히 손사래를 친다.

“이, 이상한 건 아니구요!”

“아냐, 너 지금 충분히 이상해.”

“그런 게 아니라 게임이에요! 제가 나이 때문에 구매가 안 돼서 부탁드릴려구요.”

“진짜?”

“진짜요!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 보여드릴게요.”

한유정이 노트북을 들고 오더니 결제창을 보여준다. 어떤 걸 구매하나 했더니 조금 잔인한 종류의 게임이었다.

턱을 긁적이며 이걸 해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간절한 시선이 옆얼굴에 꽂힌다. 이러다가 뚫어지겠네.

“아저씨, 이거 둘이서도 된대요.”

“그래?”

“네. 그런데 원래 보호자가 동행하면 성인 영화도 볼 수 있잖아요.”

“그치.”

“저하고… 게임을 해주기로 약속하신 것도 있구요.”

얼씨구?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 건지 알겠다. 같이 게임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까, 약속도 지킬 겸 허락해달라는 의미다.

잠깐 고민하다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시침이 돌아갔다.

그래, 나중에 언제 또 시간 남을지 모르는데 이 기회에 하고 싶은 거 다 하도록 도와줘야지.

“너 근데 이거 할 때는 나하고 같이 해야 한다. 알지?”

한유정이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어차피 진행 상태도 공유돼서 이어 하려면 같이 해야 해요. 그리고 제가 알아봤는데요. 평판이 되게 좋더라구요. 아저씨도 분명 좋아하실 거에요.”

목소리만 들어도 알 거 같다. 얘가 지금 얼마나 기쁜 건지. 말도 평소보다 조금 더 길고 톤도 높다.

미치겠네. 신나서 떠드는 걸 보니까 자꾸만 귀여워서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척 입꼬리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유정이 밝게 외쳤다.

“잠깐만요, 방에서 게임기 들고 올게요!”

*

우웅! 우우웅!

전화가 왔다. 게임기를 주섬주섬 챙기던 한유정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헌터 협회 서울 본부 인사 팀장 서현석입니다. 한유정 씨 맞으시죠?

예의 바른 남자의 목소리.

한유정이 긍정했다.

“네.”

­2차 시험 관련해서 사고가 사고다 보니까 연락이 늦어져 죄송합니다. 다른 게 아니라 한유정 씨한테 좋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요.

“좋은 제안이요?”

­중요한 이야기라 직접 얼굴 보고 말씀드렸으면 하는데, 한유정 씨가 작성한 신상명세서를 확인했거든요.

사락, 사락.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린다.

­그런데 등록하신 회사가, 아니, 길드가 없으시더라고요.

아직 한창 심사 중이었다. 당장 이름도 없는 길드의 이름을 적을 수는 없어서 공란으로 비워놨었다.

­이게 아무래도 한유정 씨가 미성년자다 보니까 길드가 없으면 보호자가 필요하거든요.

“네.”

­혹시 부모님 말고 다른 친척분들은….

팀장이 말끝을 흐렸다.

보호자도 공란으로 비어 있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중요한 건가요?”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1차 시험에서 3,000점을 넘긴 게 이제 고작 두 번째 사례라 협회 차원에서….

“아뇨, 그거 말구요.”

한유정이 어두컴컴한 방 속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발끝에 닿은 게임기가 갑자기 초라하게만 보였다.

“보호자요. 꼭 필요해요? 매니저는 있는데.”

팀장이 곤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이게 계약서가 오가는 이야기라서요. 미성년자는 계약서를 써도 언제든지 취소가 가능해서…. 보호자분의 동의가 필요해요.

“그럼 매니저는….”

작은 한숨 소리.

들리지 않도록 조심한 모양이지만, 한유정의 귀에는 모든 게 또렷했다.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보호자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한유정의 머릿속에서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휙휙 지나갔다.

김현우, 이지아, 김현우, 한예림, 김현우, 친척들, 김현우….

한유정이 입술을 달싹이며 고민했다.

­한유정 씨? 듣고 계세요?

부탁하면 들어줄까?

계약의 문제다. 게임하게 주민등록 번호를 쳐달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돌렸다. 여러 가지 대답들이 떠올랐다.

불안함, 기대감, 실망, 기쁨… 들쑥날쑥하던 감정은 곧 하나로 귀결됐다.

무서웠다.

만약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차라리 묻지 않고 덮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한유정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제가, 제가 보호자가 없어서요….”

­친척분들도요?

“네, 연락이 안 돼요. 죄송하지만 말씀드린 건은…….”

한유정이 띄엄띄엄 말을 하던 때였다. 커다란 손이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 김현우가 목을 긁적이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이 보호자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헌터 협회 서울 본부 인사 팀장 서현석입니다. 혹시 법정 대리인이신가요?

“아뇨, 그건 아닌데….”

김현우가 힐끔 한유정의 눈치를 살폈다.

“필요하면 빠른 시일 내에 준비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다른 게 아니라 협회에서 한유정 씨한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무슨 제안이요?”

­중요한 이야기라 직접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은데, 오늘 시간 괜찮으십니까?

김현우가 시계를 확인했다. 한예림이 능력 복사하고 떠난 지 얼마 안 됐으니, 시간도 널널했다.

“너무 늦게만 아니면요.”

김현우가 팀장과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약속을 잡았다.

“그럼, 있다가 뵙겠습니다.”

김현우가 핸드폰을 끊고 한유정에게 내밀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가서 들어봐야겠지만, 썩 나쁜 이야기를 꺼내려는 건 아닌 거 같았다. 그런 거면 얼굴 보자고 하지도 않았을 터다.

“미안한데 약속을 바로 있다가 잡아놔서. 게임은 못할 거 같네.”

한참 동안 팔을 뻗고 있는데 어째 반응이 없었다.

“유정아?”

“네?”

“뭐해? 나 팔 아픈데 안 받을 거야?”

한유정이 냉큼 핸드폰을 받았다.

“아, 아뇨. 죄송해요.”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먼저 옷부터 입고 있어.”

“네.”

의아하게 한유정을 쳐다보던 김현우가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방문을 닫으려는데, 머뭇거리던 한유정이 불쑥 물었다.

“아저씨. 무슨 일로 올라오신 거에요?”

“게임기 가지러 간다는 애가 이십 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니까 걱정돼서 와봤지.”

“그, 통화요.”

“응.”

“어디부터 들으셨어요?”

김현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보호자 없어서 말씀 드린 건은 곤란하다고 할 때부터. 방금 왔어.”

한유정은 옅은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뇨, 없어요. 저 옷 갈아입어야 해서 문 좀 닫아주세요.”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준비해.”

“네.”

철컹!

문이 닫혔다. 뻣뻣하게 서 있던 한유정이 사르륵, 침대 위로 녹아내렸다. 목이 자꾸만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다행이다.”

한유정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보호자를 찾는 팀장의 말에 앵무새처럼 매니저라고만 대답하던 게 떠올랐다.

“앞부분은 못 들었구나….”

*

협회에 도착해서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회의실로 안내받았다. 팀장은 이것저것 챙겨온 종이 뭉치들을 나와 한유정에게 한 부씩 내밀었다.

제일 앞부분에 적혀있는 글자에 눈이 갔다.

‘제2의 이지아’

팀장이 헛기침하며 시선을 끈다.

“크흠, 여기서 나눈 대화는 비밀엄수 부탁드립니다. 1급 보안 사항은 아니더라도, 일단은 대외비거든요.”

통화로 말을 하기에는 조금 그렇다더니, 본격적인 이야긴가보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아가 누군지 아시죠?”

“알죠.”

오늘도 얼굴 마주 보면서 밥 먹었다.

“그쵸, 대한민국 사람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헌터니까….”

팀장이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그리고 엄청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줄였다.

“사실, 이지아가 3,000점을 넘기고 나서 비슷한 제안을 했었거든요.”

“무슨 제안이요?”

“협회에서 이미지 메이킹해주겠다는 제안이요.”

이미지 메이킹?

“이지아가 최초로 3,000점을 넘었다는 타이틀도 있긴 했지만, 유독 떠들썩하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까? 지금 한유정 씨와 비교하면요.”

그렇긴 했다.

한유정도 똑같이 3,000점을 넘긴 유망주인데 당시의 이지아와 비교하면 화제성이 많이 낮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와 동갑이던 한 소녀가 역대급 유망주라는 타이틀을 얻고 나서 어비스 던전에 들어가기까지.

한 걸음 한 걸음이 전국민적 관심사였으니까.

그에 반해 한유정은 어느 정도 관심을 받고 있긴 했지만, 결국 아는 사람만 아는 유망주에 불과했다.

최초와 최고라는 단어가 가진 상징성을 잘 알지만, 그래도 조금 이상했다.

아직 1차 시험에 불과하더라도, 이지아를 제외하면 한유정은 역대 최고라는 말이 어울렸으니까.

팀장이 볼펜을 손안에서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딱 그맘때쯤입니다. 레드 게이트가 터진 게.”

“예?”

“레드 게이트요. 서울에 터졌던….”

“압니다.”

입술을 문지르며 말했다.

“잘 알죠.”

팀장이 의아스레 쳐다보더니 아, 하고 머리를 긁적인다.

“난리였죠. 사상자가 워낙 많아서 국가 추모 기간이었는데… 그때 협회에서 내놓은 게, 국민적인 영웅을 만들자! 였거든요.”

“그럼 설마….”

“네, 당시에 가장 전도유망한 이지아를 협회에서 선택한 겁니다. 그래서 소속 회사인 화신에 제안한 거고요.”

팀장이 종이를 넘겨준다. 여러 가지 표와 수치들이 적혀있었다. 마케팅 비용과 효과 같은 것들이었다.

“협회 차원에서 지원해줬죠. 그래서 유망주 때부터 그렇게 유명했던 거구요. 지금 와서 보자면, 내버려 둬도 금방 유명해졌었겠지만은.”

머리가 멍해진다. 이마를 짚고 생각했다. 이지아가 무너진 건 멘탈때문이었다.

당시 열여섯의 소녀가 역대급 유망주라는 말과 함께 온갖 관심을 받았다.

과한 관심, 이어지는 악플, 무너지는 멘탈.

길드와 협회에서 모를 리가 없다. 프로젝트를 강행하기 위해 멘탈 케어보다 성과를 우선시한 거겠지.

가진 재능이 워낙 뛰어나 실력으로 우뚝 섰지만….

열여섯.

이지아는 지금의 한유정보다 어렸다.

“지아 씨… 이지아는요?”

“네?”

“이지아도 이거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까?”

“아뇨.”

팀장이 어깨를 으쓱인다.

“그때 이지아 나이가 16살이었으니까요. 어린애한테 말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내용이죠. 회사 차원에서 거래된 내용입니다.”

“……일방적인 지원이었군요.”

“그래서 법적으로 이지아를 묶어놓을 방법이 없었죠. 처음이라 조금 미숙했어요. 지금은 여러 항목을 조정하고 당사자에게 직접 제안하는 겁니다. 아, 말씀은 이렇게 드려도 불공정 제안은 아니에요. 윈윈이지.”

팀장이 계약서를 들이밀며 여러 가지를 떠들었다.

한유정이 유명해지도록 협회가 얼마나 도와줄 수 있는지, 이후 활동에 얼마만큼의 편의를 봐줄 수 있는지….

달콤한 말이 지나가고 대가가 나온다.

“이후에 강제 동원 명령을 정해진 횟수만큼 따라주시면 됩니다.”

“강제 동원 명령이요.”

“네, 아무래도 길드 쪽이야 주판 두들겨보고 각이 안 나온다 싶으면 빠르게 포기하는 구석이 있어서요.”

던전을 공략한다는 건, 제법 많은 돈이 오가는 이야기였다.

소모품으로 사용하는 장비들부터 헌터들 몸값, 크게 다치면 계약 때문에 돈은 돈대로 빠져나가는데 1년이고 2년이고 쉬게 된다.

던전 공략이란 자연스레 투자자들을 필요로하는 구조였다.

“누군가는 공략을 해야 하는데, 득이 안 나온다 싶으면 아무도 안 건들죠. 투자자들이 관심을 안 가지니까요. 놔두거나 실패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고. 협회 입장에서는 그걸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데…….”

“강제 동원으로 비선호 던전을 처리한다는 거군요.”

“예, 맞습니다. 일단 계약서 한 번 읽어보시죠.”

계약서를 쭉 훑었다.

그리고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트렸다.

세상이란 정말,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어도 코 베어 가려는 도둑놈 새끼들 천지다.

“아무것도 안 적혀있네요.”

“네?”

“위험도가 얼마나 높은 임무까지 강제 동원 명령을 내릴 수 있는지, 아무것도 안 적혀있다고요.”

나이가 어리다는 게 참, 이게 문제다.

일부러 정장까지 입고 다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로만 본다.

빙긋 웃으며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이건 안 되겠네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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