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호텔에서 생긴 일 (2)
* * *
차 안에서부터 호텔까지.
이지아나 나나 말수가 웬일로 적어졌다. 옷깃 스치는 것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서먹서먹한 분위기는 호텔 라운지에 들어갈 때 가장 심했던 거 같다. 어깨를 부딪친 이지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리를 벌렸던 걸 보면.
이게 S급 헌터인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 빠른 움직임이었다.
숨 막히네. 목구멍에 감자알 다섯 개를 꾹꾹 위장까지 쑤셔 담은 거 같다.
이미 몇 번 와봤다는 말이 무색하게, 어색한 감탄사를 터트리며 구경 중인 이지아를 뒤로하고 예약부터 확인했다.
아마 방 안에 들어가면 어색해서 죽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트렁크 가방만 대충 집어 던져놓고 밖으로 나갔다.
“앗, 현우 씨.”
“네?”
“저 잠깐 목욕용품만 챙기고 나올게요.”
뭐야, 그런 것도 따로 있어?
“그럼 저는 발코니에 있을 테니까 그쪽으로 오세요.”
텁텁한 폐 속이나 환기할 겸, 찬 공기 좀 쐬고 싶다. 복도 쪽 발코니로 걸어갔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쭉 뻗어있는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멍하니 난간에 기대어있는데, 주머니의 핸드폰이 진동으로 떨렸다.
[패왕 지아: 나 좀 도와줘….]
뭐지? 언제나 자신감 넘치던 말투는 사라지고 웬 소심쟁이 하나가 여깄었다.
[나: 무슨 일인데?]
[패왕 지아: 어쩌다 보니까 친구하고 호텔에 묵게 됐는데, 어색해서 죽을 거 같아.]
[나: 친구끼리 갔는데 왜 어색해? 어색할 게 있나?]
[패왕 지아: 그 친구가 이성 친구라서!]
허, 우연이네.
나도 마찬가지인데. 나부터 어디에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어색해 죽겠는데 해결방법 없냐고.
[나: 누가 먼저 가자고 제안했는데?]
[패왕지아: 친구 쪽에서.]
뭔가 내가 마주친 상황하고 엇비슷해서, 남자 쪽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싶어졌다.
[나: 억지로 끌려간 건 아니잖아.]
[패왕 지아: 어어… 그치?]
[나: 그럼 괜히 의식하지 말고 있어. 그 친구도 불편해질 테니까.]
[패왕 지아: 그런가…?]
당연하지.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데 이지아가 꼭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빨간 망토처럼 구니까 민망해 죽겠거든.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는데 창문이 드르륵 열린다. 이지아가 터벅터벅 옆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난간에 나란히 기대서 손가락으로 어딜 가리킨다.
“현우 씨, 저기 보여요?”
시선을 따라가니까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게 보였다. 어렴풋이 보이는 복장들이 일반인들은 아니었다. 햇빛에 번쩍이는 쇠붙이들을 하나씩 들고 있는 게, 아무래도 헌터들인 거 같았다.
“저쪽 온천이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어서, 이 근방 호텔들은 대부분 전지훈련 숙소로 많이 쓰여요.”
블로그에서 봤던 내용이다.
단순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도 효능이 있다고.
그래서 제법 가격이 비싸다고 한다.
“헌터 시험 앞둔 유망주들은 떡잎이 보인다 싶으면 길드에서 돈 끌어모아서 데려다주거든요.”
“지아 씨도 유망주 때 왔었어요?”
이지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우쭐한 얼굴을 한다.
“저는 스위트룸이었죠. 특별한 일 아니면 여기서 거의 살았어요. 이런 말 하면 좀 그런데, 제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잖아요?”
우울증과 편집증.
그녀의 고질적인 정신병이다.
“그러면 여기는 제법 익숙하겠네요?”
“익숙하죠. 그래서 가끔 오려고 했는데, 현우 씨한테 말 꺼내기 미안하더라고요.”
“네? 뭐가요?”
“그렇잖아요. 저야 원체 밖에 안 나가고 그게 제 성격에 맞지만, 현우 씨는 그런 사람도 아닌데…….”
이지아의 말이 맞았다.
비록 밖에 뽈뽈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무릎에 곰팡이 필 정도로 눌어붙어 있는 게 취향도 아니었다.
“저 때문에 어디밖에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내가 가고 싶은 곳 있다고 무작정 끌고 가는 게, 맞는 건가 싶기…… 얼굴이 왜 그래요?”
“예? 제가요? 뭘요?”
이지아가 눈을 게슴츠레 뜬다.
“지금 기특하다는 얼굴하고 있었잖아요!”
그랬나?
얼굴을 쓸어내리며 재빨리 표정 관리를 했다. 동갑한테 보여줄 만한 감정은 아니지. 그녀가 자존심이 상한 듯 툴툴거린다.
“현우 씨는 가만 보면 꼭 절 연하처럼 생각하는 거 같아요.”
“설마요.”
어색한 분위기가 제법 많이 풀어진 거 같다. 힐끔 이지아의 귀를 보니 역시나, 제법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민망할 거다. 어느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면 그렇겠지.
내가 이지아를 대견하게 쳐다본 건, 평소처럼 날 대하려고 노력하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현우 씨”
“네?”
“처음에 당황해서 감사 인사를 안 했더라고요.”
이지아가 난간에 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신경 써줘서 고맙다구요, 그냥.”
&
젖은 머리를 털며 온천 매대 앞을 지났다. 바닷가라 그런지 날이 저무니까 제법 날씨가 쌀쌀하다.
온천에 들어갔다가 나오긴 했는데, 뭐가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몸이 노곤하긴 한데 그거야 집 앞 목욕탕도 마찬가지고.
마음의 평화를 각성하기 전부터 멘탈 하나 만큼은 강하다고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 건가?
심신을 안정시켜준다는 게 나한테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
계란을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으며 이지아를 기다렸다.
시계를 확인했다.
안에서 샤워하고, 온천에서 몸도 뜨겁게 덥히고, 사우나도 즐기고, 폭포수도 맞고, 마사지까지 받았는데 지난 시간은 고작 한 시간이었다.
젠장, 두 시간 뒤에 만나기로 했는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둥글둥글한 보름달을 보니까 한유정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보냈다.
[유정아, 뭐해? 밥 챙겨 먹었어?]
5분 정도 지났을까. 한참 뒤에도 한유정에게 답장이 오지 않았다.
왜 답장이 없지? 평소에는 칼처럼 반응하는 애인데…….
무슨 일 있나 걱정이 들 때쯤, 문자가 왔다.
[ㅇ아저씨 문자뱡금봣어요ㅕ]
[방금 봤어요. 죄송해요.]
오타 났네. 많이 바쁜가?
[지금 바빠?]
[제가 밖에 나와 있어서 늦게 본 거에요. 문자 할 수 있어요. 무슨 일이세요? 말씀하세요.]
문자 치는 속도가 진짜 빠르다. 속으로 3초를 세기도 전에 답장이 온다.
[아니, 그냥 밥 먹었나 걱정돼서.]
[저 밥 먹었어요. 아저씨한테 보여주려고 사진도 찍어놨었는데 보내드릴까요?]
[사진]
답장을 하기도 전에 한유정으로부터 사진이 도착했다. 치킨. 밤에 먹는 게 특히 일품이긴 하지. 핸드폰을 꾹꾹 누르며 이어지는 답장을 작성하는데, 갑자기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에이씨, 뭐야?”
고개를 들었다. 태산 길드 유망주들이 뭐 씹은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에이씨?
어이가 없어서 이마를 확 찌푸리니까 짜증스레 고개를 돌려버린다.
“김현우?”
태산 길드 매니저가 의아하게 날 쳐다본다.
“송 실장님, 아직 안 잘리셨어요?”
“이 새끼가….”
욱한 매니저가 얼굴을 쓸어내린다.
“……헌터 시험까지는 담당하기로 했다, 됐냐?”
저 양반이 이제는 그냥 편하게 말을 놔버리네.
하지만 매니저의 말을 들으니까 앞뒤 상황이 예측 갔다.
결국 잘리긴 잘린 거다.
다만, 지금 바로 나가면 불법 로비했다고 광고하는 꼴이니까 담당하던 일만 정리하고 나가는 거로.
“아무래도 회사에 말은 안 하신 거 같네요.”
내 말을 알아들은 건 매니저뿐이었다. 그가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법 로비 건을 폭로한 당사자가 나란 건 외부인 중에 매니저와 조 기자만 알았다.
태산 길드에 말하지 않은 건지 그쪽에서는 반응이 조용했다.
당시에 한유정이 전음으로 대체 뭐라 한 건지 모르겠지만, 매니저는 바짝 위축돼있었다.
“그런데, 그쪽 분들은 눈깔이 왜 그런답니까?”
“뭐?”
“꼭 절 적처럼 바라봐서요.”
턱짓으로 매니저의 등 뒤를 가리켰다. 유망주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창 같은 시선으로 날카롭게 날 찌른다.
“송 실장님, 혹시 유망주들한테 말씀하셨습니까?”
“……말하면 나도 좆 되는데, 그걸 떠벌리고 다니겠냐? 조용히 시간만 때우다가 그만둘 생각이니까 알아서 애들하고 욕보시던가.”
매니저가 짜증스레 머리를 긁적이며 사라졌다.
눈 띠껍게 뜨고 쳐다본다고 싸울 만큼 내가 쌈닭은 아니다.
혹시 시비에 걸릴까 봐 자리를 피하려는데, 유망주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여자였다. 많다고 해봤자 나하고 엇비슷해 보인다.
분명 나예정이었나? 그랬던 거 같다.
그녀가 말했다.
“들었어요.”
들었다고?
“이번에 협회하고 각 세우고 싸운 거, 그쪽이라면서요? 바스타드 길드 김현우. 한유정 담당 매니저.”
아.
다른 쪽 이야기였구나.
“네, 뭐, 어쩌다 보니까요.”
“어쩌다가 싸웠다고요? 어쩌다가?”
나예정이 모래 바닥을 발등으로 쿡쿡 찌른다.
“당신 때문에! 우리가…!”
뭐야? 미친년인가?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정말 몰라서 그래요?”
“모르니까 묻죠.”
이 정신 나간 미친년아.
나예정이 낮은 목소리로 외친다.
“당신이 협회를 그따위로 엿먹이니까, 계약 체결될뻔한 거 물 건너 갔잖아요!”
“계약? 무슨 계약이요?”
“협회에서 일부 유망주들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겠다는 계약! 보복 행정 건 터지니까 전부 보류됐다고!”
잠깐, 지금 말하는 계약이 설마….
“혹시 협회에서 홍보해주겠다는 계약 말하는 겁니까?”
나예정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본다.
그녀가 곧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요즘 이상할 정도로 주변에서 저 유망주들의 얼굴과 이름이 들린다 싶었다.
사실상 계약은 체결되기 직전이었고, 지원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던 게 아닌가 싶다.
헛웃음이 나왔다.
고만고만한 상위권 유망주들이 어떻게 길드 지원을 받아 여기까지 왔나 싶었더라니.
그런 거였구만?
“어이가 없네….”
“뭐라구요? 당신 지금 뭐라 했어요?”
“어이가 없다고요. 이 양반들아.”
유망주들의 눈이 날카롭게 째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들이 여기서 날 칠 거야 뭐야?
“계약서, 제대로 확인은 해봤어요?”
“……뭐요? 계약서요? 당연히 봤죠.”
“그러니까 제 말은, 전부 제대로 이해하고 읽었냐고요.”
유망주들이 합죽이처럼 입을 닫고 또르륵 눈을 굴린다.
꼴을 보니까 대답을 안 들어도 알겠다.
“계약서 제대로 이해했으면 당신네들이 그걸 좋은 기회로 생각하지도 않았겠죠.”
홍보해주고 훈련, 장비 지원해줄 테니까 나중에 강제 동원 명령을 따라라.
한유정한테 이미 한 번 왔던 제안이다.
유망주들한테는 의도적으로 축소해서 설명했겠지.
결말이야 뻔했다. 협회가 원하는 건 비선호 던전을 공략시키는 거다. 길드들이 수지가 안 맞는다고 판단한 고위험 던전.
그곳에 밀어 넣을 거다.
그게 협회와 바스타드 길드의 여론 싸움으로 미뤄졌다.
유망주들 입장에서는 구사일생이었다.
“몇 살이세요?”
“……스물여섯이요.”
나예정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저하고 동갑이신데, 그쯤 먹었으면 우리 생각 좀 하면서 삽시다. 밖에 나왔으면 똑같은 사회인이잖아요.”
이러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나이 어리다고 무시하지. 자리를 피하려는데 나예정이 손목을 거칠게 잡아당긴다.
“아까부터 듣자 듣자 하니까 자꾸!”
어어, 하는 사이에 몸이 끌려갔다.
“고작 해봐야 매니저인 주제에 네가 뭐 그리 잘났다고 떠들어?”
팔을 흔들며 털어내려는데 꼼짝도 안 한다.
누가 헌터 유망주 아니랄까 봐 손아귀 힘이 강하다.
“이 손 놓으세요.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못 놓겠으면요? 신고하시게? 손목 좀 잡았다고?”
나예정이 기세등등한 미소를 짓는다.
화나니까 분에 못 이겨서 힘으로 밀어붙이는 꼬라지 하고는.
“이따가 후회하지 말고 빨리 손…….”
“뭐예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나와 유망주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닌 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서 있었다.
조금 수상쩍은 차림새였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봤다.
그도 그럴 게, 이지아였으니까.
그녀가 짝다리를 짚으며 삐뚤어진 시선을 보냈다.
“아는 사이라 서로 장난치는 건 아닌 거 같고…… 어이가 없네.”
이지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야, 그 손 안 놔? 미쳤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