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역대급 유망주 (4)
* * *
트롤(Troll)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트롤과 혼동하지만 Trolling(낚시 기법)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아군을 고의로 방해하는 플레이어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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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롤?”
나예정이 눈을 깜빡였다.
“트롤이 뭐야? 처음 듣는데?”
“몬스터 아닌가?”
“몬스터 이름인 건 아는데, 포지션으로 트롤이란 게 있어요?”
한유정을 제외한 세 여자가 추측을 나눴다. 게임과 담쌓은 그녀들은 한유정의 입에서 나온 말이 어떤 의미인지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한유정 씨, 트롤이 뭔가요?”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한 박지현이 물었다. 한유정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두통과 함께 살심이 치솟아 오른다. 그녀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제 포지션이요. 적당히 말한 거에요. 다들 말하는 분위기라.”
“아….”
본인이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점수가 낮았으면 개소리 말고 작전 짜게 말하라고 멱살을 잡았겠지만, 한유정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누가 뭐래도 이곳에서 가장 점수가 높은 고득점자였다.
세 명은 그냥 버스에 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모두에게 들어 있는 공통적인 생각이었고, 나예정은 그걸 직접적으로 표출했다.
“됐어요, 저렇게 뻗대는 거 보면 자기 할 일은 완벽하게 하겠죠.”
나예정이 마무리를 지어버리자 다른 사람들도 할 말은 없었다. 다들 호기심을 버리고 시험에 집중했다.
“전사 둘에 염동술사….”
나예정이 힐끔 한유정을 살피고는 이어 말했다.
“…트롤까지. 나쁘지 않네요.”
한유정은 알아서 잘할 거고, 전사 포지션의 각성자들이야 몸 튼튼하고 체력 좋은 게 강점이다.
염동술사인 그녀만 제외하면 대부분 1인분 값은 했다.
그렇다고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동서남북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들이 꼭 똑같은 종류만 나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저는 남쪽 게이트를 맡을게요.”
나예정이 먼저 선수 쳤다. 박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생각이군요.”
남쪽 게이트에서는 대형 몬스터들 위주로 출현했다. 그만큼 숫자는 적었다.
전사들은 동쪽과 서쪽을 맡았다.
박지현이 한유정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한유정 씨는 북쪽 게이트를 막아야 하는데, 괜찮으시죠?”
북쪽 게이트는 일반적으로 팀원들 중 가장 강한 헌터가 맡았다. 나예정이 대신 대답했다.
“쟤 아니면 누가 맡아요? 제2의 이지아라는데, 당연히 에이스가 맡아야죠.”
자연스레 북쪽 게이트는 한유정의 담당으로 됐다. 한유정은 말없이 허공을 바라봤다. 홀로그램으로 뜬 창에 여러 가지 상품들과 가격이 적혀 있었다.
가상현실 공간 속 상점창이었다.
나예정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필요 물품부터 구매할게요.”
성격 까칠한 사람하고 각을 세우는 건 누구나 기피하는 법이었다. 나예정은 한유정을 압박하며 대화의 주도권을 쥐었다.
“처음 자본금이 500골드니까… 일단 저는 기력 회복 아티팩트(450골드)하고 포션(50골드)을 구매할게요.”
나예정이 상점창에서 구매함과 동시에 아이템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그녀가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고 포션은 혁대에 걸었다.
2차 시험에서 골드는 귀중한 자원이었다. 바깥의 아티팩트 같은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능력치를 직접적으로 올려주면서 밸런스를 붕괴시키지는 않았지만, 체력의 회복 속도를 소소하게 올려주거나 팀원 간의 무전을 가능하게 하는 등 여러 편의 기능을 지원했다.
나예정의 작전에 따라 유망주들이 물품들을 구매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한유정에게 향했다.
“무전기가 필요할 거 같은데….”
흩어져서 각자 작전을 수행하는 만큼 무전기는 필수 물품이었다.
한쪽 게이트에서 몬스터를 놓칠 수도 있었다. 시험이 진행될수록 그런 상황은 반드시 나왔다.
이때 무전기가 있으면, 손이 남은 헌터가 기지로 복귀해서 막으면 됐다.
담당 게이트에서 본인 전투 스타일에 맞지 않는 몬스터들이 나온쳐도 마찬가지였다.
무전기로 빠르게 상황을 전달하고 포지션을 교체하면 됐다.
상점창에서 구매하는 비용은 단돈 25골드에 불과했지만, 효용성은 단연코 최고였다.
“한유정, 너는 100골드로 무전기 4개 구매하고 나머진 알아서 사용해.”
나예정의 명령에도 한유정은 그저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야, 내 말 못 들었어? 시작할 시간 됐으니까 빨리 무전기 사서 돌리라고!”
험악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한유정의 머리 위로 빛이 나타났다.
툭.
허공에서 휴대용 게임기와 칩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
“…?”
“…?”
한유정이 주섬주섬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웠다. 그녀가 게임기를 구동 시켜 액정을 확인했다.
가상 공간이라 그런가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금 가지 않고 멀쩡했다.
그리고는 칩을 게임기에 장착시키고 멀쩡히 작동하는지 확인한다. 불안했는데 잘만 됐다.
한유정은 게임기를 혁대에 걸었다. 칩들은 전부 주머니에 넣었다. 치마 주머니가 볼록 튀어나왔다.
유망주들이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쳐다봤다. 나예정이 입술을 덜덜 떨며 물었다.
“야, 하, 한유정… 너 바, 방금 뭐한 거야?”
한유정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게임 샀는데요.”
“게임? 아니, 게임 산 건 알겠는데, 시발, 게임을 왜 지금 사냐고?”
“게임하려고요.”
당황한 나예정이 눈을 끔벅였다. 그녀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밖에 나가서 하면 되잖아?! 그걸 왜 지금 사고 있어, 미친년아!!”
한유정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개인적으로 쓰는 용돈이 한 달에 10만 원밖에 안돼요.”
“…뭐?”
“게임 하나 사는데 보통 7만 원이 넘어요. 확장팩까지 있으면 기본이 15만 원이고요. 하나 고를 때도 신중해야 하거든요.”
상점창을 둘러보다가 게임을 발견한 한유정은 생각했다.
어차피 필요 없는 포인트, 여기서 다음에 구매할 게임을 고르는 데 참고하면 어떨까 하고.
시간도 때울 겸 괜찮은 선택 같아 보였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한유정의 입장이었다. 헌터 시험에 사활을 건 유망주들에게는 미친 짓 거리였다.
“장난쳐? 다른 사람들은 아티팩트 산다고 돈 다 썼는데, 고작, 고작 게임에다가 귀중한 골드를 낭비해?”
상점창에 간식이나 기타 유흥 물품들을 판매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험 막바지 때 쓰라고 비치해놓은 것이다.
나예정은 시계를 확인했다. 시험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게임기 팔아, 빨리! 나가면 게임 살 돈 내가 챙겨줄 테니까!”
아이템을 되팔면 구매한 값의 절반밖에 돌려받지 못한다. 보통은 잘못 사면 잘못 산대로 시험을 시작했다.
하지만 게임기처럼 쓸데없는 걸 구매했다면 차라리 팔고 반값이라도 건지는 게 나았다.
“포션 되팔면 얼만데요?”
“뭐?”
“25골드인데, 그럼 무전기 가격 딱 나오잖아요.”
한유정이 심드렁히 말했다.
“세분이 포션 팔고 무전기 구매하세요. 그럼 괜찮잖아요.”
“……너는? 무전기 없으면 필요할 때 어떡하려고?”
“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한유정의 실력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나예정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슬그머니 올라오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건 바로 불안감이었다. 그녀뿐만 아니었다. 다른 유망주들도 떨리는 눈빛으로 한유정을 쳐다봤다.
북쪽 게이트를 막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한유정이라도 한눈팔기 힘들 터다.
어쩌면 막다 못해 다른 게이트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 반대의 상황도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아예 무전기가 필요 없다는 듯 말하는 건…….
그녀들은 한유정의 비협조적인 태도에서 무언가 어긋났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하지만 직감은 직감뿐이었다.
이성은 말도 안 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헌터 시험 결과에 따라 이후의 길이 결정된다. 배짱부리는 건 그만큼 실력에 자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나예정이 타이르듯 말했다.
“웨이브 막고 나서 골드 들어오면 무전기 사야 해. 알겠지?”
그녀 스스로는 잘 몰랐지만, 어느새 입 밖으로 나온 말투가 제법 나긋나긋해져 있었다.
한유정을 쳐다보던 날 선 눈빛도 독기가 쫙 빠졌다.
엉덩이에 꼬리가 달려있었다면 아마 붕붕 휘두르고 있었을 터다.
한유정은 어깨를 으쓱이며 사라졌다.
* * *
[곧 1차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준비해주세요.]
나예정이 게이트를 노려보며 전투 준비를 했다. 가파른 협곡 사이로 외길이 커다랗게 뚫려있었다.
“한유정… 진짜 뭐 하는 년이지?”
나예정이 손톱을 질근질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설마 1차 시험에서 점수 좀 받았다고 드러눕는 건가?’
그런 생각 없는 꼴통은 아닐 거다. 앞으로의 미래가 달린 일이다. 아무리 실력에 자신 있어도 여유 부릴 리가 없었다.
한유정이라면 3차 시험에서도 충분히 고득점을 받아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유망주들도 만만치 않았다.
당장 2등만 해도 2,600점을 기록했다. 한유정보다 500점 모자랐지만, 2차 시험의 결과로 충분히 뒤집어질 수 있었다.
[1차 웨이브를 시작합니다.]
생각에 잠긴 사이에 게이트가 활성화됐다. 1차 웨이브로 등장한 몬스터는 이족 보행 악어였다. 숫자는 어림잡아 열 마리 정도.
몬스터들이 외길을 따라 진군했다. 거리를 짐작하던 나예정이 손을 휘저었다.
덜컹!
협곡 꼭대기. 거대한 바위를 지탱하던 디딤돌이 염동력에 바스러졌다. 흔들거리던 바위가 협곡 아래로 추락했다.
휘이이잉!
괴물들의 머리에 거대한 그림자가 생겼다. 세로로 찢어진 파충류 눈이 위로 향했다. 거대한 돌덩이가 괴물들을 깔아뭉갰다.
콰직!
피륙이 사방으로 튀었다. 핏줄기가 나예정의 발치까지 길게 뻗었다. 살아있는 몬스터는 한 마리도 없었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맵은 참 좋은데.”
전투의 배경이 되는 맵은 랜덤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평야가 될 수도 있었고, 질퍽이는 늪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걸린 장소가 협곡이었다. 위에는 염동술로 떨어트릴 바위가 가득했다. 꼭 그녀에게 활약하라고 누군가 판을 깔아놓은 것만 같았다.
치지직!
나예정이 무전기에 입바람을 훅훅 불었다.
“남쪽 클리어했어요.”
다른 유망주들이 차례대로 보고했다.
서쪽 넘어간 몬스터 없습니다.
동쪽 이상 무.
나예정이 다시 무전기를 들었다.
“북쪽은? 문제없어?”
한참 동안 기다려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게임기는 팔지 않은 모양이다. 짜증이 울컥 치밀어올랐지만 금방 가라앉혔다.
스타트는 좋았다.
팀원들은 나예정을 제외하면 모두가 2,000점을 넘겼다. 한유정은 마음에 들지 않고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지만, 괜찮았다.
1차 시험 고득점자였으니까.
팀원으로는 이만한 인물이 없었다.
시험을 시작하면 그녀 스스로가 실점의 요인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맵이 능력을 활용하기 너무 좋았다.
산뜻한 출발에 나예정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김현우와 말다툼하고, 이지아에게 눈도장 찍히고, 한유정과 사소한 시비가 있었지만.
될 놈은 된다고 막상 시험을 시작하니까 이만큼 좋은 상황도 없었다.
“두고 보자고. 니들이 언제까지 뺀질거릴 수 있나….”
나예정이 이를 빠득빠득 갈 때였다.
[몬스터가 포인트에 도착했습니다. 점수가 하락합니다.]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나예정이 눈을 크게 떴다.
고작 1차 웨이브인데 벌써 스코어가 하락했다고?
“아이씨, 첫 스테이지부터 누구야? 그래도 하나니까….”
실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때였다.
시야 위로 메시지창이 도배라도 하는 듯 우르르 떠올랐다.
[몬스터가 포인트에 도착했습니다. 점수가 하락합니다.]
[점수가 하락합니다.]
[점수가 하락합니다.]
[점수가 하락합니다.]
[점수가 하락합니다.]
[점수가 하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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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가 하락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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