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역대급 유망주 (7)
* * *
박지현이 나뭇가지로 흙 위를 쓱쓱 긁었다. 엉성한 지도가 그려진다.
“나예정 씨가 탈락하면서 남쪽 게이트는 막혔으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죠. 북쪽은 한유정 씨가 맡고 나머지는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괜찮아 보였다. 아니, 그거밖에 없었다.
김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한유정 씨가 북쪽 게이트 해결하는 대로 다른 곳 지원해주는 거로…….”
“아뇨.”
한유정은 고개를 저으며 박지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박지현이 나뭇가지를 건넸다. 한유정이 신발로 바닥을 쓸며 물었다.
“두 분, 몇 스테이지까지 완벽히 막을 수 있겠어요?”
서로 눈치를 살피던 박지현과 김은정이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13 스테이지까지… 는 어떻게 될 거 같습니다.”
“다른 분도요?”
“예. 저희 둘 다 전력은 비슷하다고 보면 돼요.”
한유정이 흙 위로 다시 그림을 그렸다.
“두 분이 서쪽, 동쪽을 맡는데 제가 한 곳으로 지원 가면 다른 쪽은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어요. 정반대 방향이라 두 군데 다 커버치는 건 불가능하고요.”
박지현은 한유정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눈치챘다. 그녀가 바싹 마르는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그래도 안정적인 합격을 위해서는….”
“아뇨. 아까하고 똑같이 가죠. 절반으로 나눠서 두 분이 반쪽씩 막고, 제가 그사이에 처리할게요.”
그럴 줄 알았다.
박지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유정 씨, 그렇게 싸우면 한 번 뚫렸을 때 답도 없어요. 아까야 사람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던 거지만, 전투 공간이 줄어드는 건 절대 좋은 전략이 아닙니다.”
수성하는 게 전투에는 더 좋다. 하지만 이건 수성전이 아니라 포인트에 도착하는걸 막아야 한다.
최대한 멀리서부터 싸우는 게 변수를 줄이는 데 좋았다.
한유정이 담담히 말했다.
“안정적으로 가면, 이걸로 두 분이 다시 점수회복 가능하시겠어요?”
“네?”
“합격권까지는 무난하겠죠. 그런데, 앞으로 있을 추가점수를 모두 얻지 못하면 간신히 합격권에 턱걸이하는 수준일 거에요.”
유망주들은 길드의 지원까지 받으며 훈련했다. 그런데도 간신히 턱걸이하는 수준이라면, 그 뒤의 미래는 뻔했다.
투자할 가치가 전혀 없는 상품으로 전락할 터다.
박지현과 김은정이 시선을 마주쳤다.
암묵적인 의견이 오갔다.
결국, 모 아니면 도였다.
그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
유망주들은 한유정이 탐탁지 않았다.
그도 그럴만했다. 미리 점수를 벌어놨어야 할 초반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등장했으니까.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할 말이었다.
또 심사가 뒤틀려서 어딘가로 사라져버리면, 그녀들도 나예정과 같은 꼴을 당할 게 뻔했으니까.
나예정이 과락으로 탈락하며 전체적인 난이도가 하락했다. 남쪽 게이트가 막힌 것이다. 방금까지는 4만큼의 난이도를 세 명이 막았다면, 지금은 3만큼의 난이도를 세 명이 막으면 됐다.
더군다나 나예정의 대신으로 들어온 게 한유정이었다.
기존의 중상위권 점수까지는 복구하지 못하더라도, 합격권까지는 충분할 것이다.
박지현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녀가 바닥에 앉아 칼에 묻은 피를 닦고 있을 때였다. 김은정이 옆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물었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뭐가 말입니까?”
“한유정이요.”
김은정의 턱짓에 박지현이 고개를 돌렸다. 한유정은 게임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1차 시험에서 잘한 거 알고, 아까도 몬스터들 화끈하게 처리한 건 봤는데.”
김은정이 턱을 괴며 말했다.
“한 마리도 안 놓치고 마지막까지 간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돼요?”
점수로 랭킹을 매기는 시험의 구조상, 차등적인 구분이 필요했다.
처음 10 스테이지까지야 못 막는 게 이상했다.
하지만 이후부터는 달랐다.
“현직 헌터들도 가능할까 의문이 드는데. 괜히 뻘짓하는 건 아닌가 몰라.”
“그렇다고 저희가 뭐 어쩌겠습니까.”
박지현이 찝찝한 얼굴을 했다. 그녀라고 모르는 게 아니었다.
길이 하나뿐이니까, 되든 말든 여기로 달려야만 하는 거다.
“이거밖에 방법이 없는데.”
김은정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녀가 한유정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속삭였다.
“미치겠네, 대체 둘이 무슨 사이길래 이러는 거야?”
“말 들어보니까 나예정 씨가 먼저 시비건 게….”
“아뇨, 그건 저도 알겠는데요. 이상하잖아요.”
김은정이 한유정을 쳐다봤다.
화가 가라앉았는지 다시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대체 저런 인상에서 어떻게 아까 같은 그림이 나오는 거지?”
*
다음 웨이브가 시작됐다.
박지현과 김은정의 관심은 한유정에게 쏠려있었다.
그녀들은 방패로 몬스터들의 공격을 막는 와중에도 눈만큼은 한유정을 쫓았다.
마지막에 등장했을 때.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기는 했다. 그렇다고 양심 없이 아까 정도의 신위를 기대하진 않았다. 분명 특수한 스킬일 것이다. 횟수 제한이 있거나 몸에 부담이 많이 가는.
그거의 절반만 보여줘도 됐다. 그것만으로도 마지막까지 막아낼 거라는 확신이 생길 거만 같았다.
이제 수십 점밖에 남지 않는 그녀들은 간절하게 기도했다. 기대 속에서 한유정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들은 서로를 감싸 안고 방방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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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송 팀장과 대화를 나누는데 한유정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아저씨, 저 방금 시험 끝났어요. 어디세요?]
[잠깐 사람 만나고 있었어. 시험장으로 내가 갈게.]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송 팀장과 가볍게 악수를 하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팔짱을 끼고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건너편 인도에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예정이었다.
뭐야?
한유정은 방금 끝났다고 연락 왔는데 어떻게 벌써 여기까지 나왔지?
그건 그렇고 참 운도 지지리 없다.
사방팔방으로 뻗어있는 게 신호등이고 길인데 이리 딱 마주치는지.
송 팀장한테 가는 길이었나?
신호가 바뀌었다. 횡단보도를 걷는데 나예정이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힐끔 눈빛만 마주치고 지나치려는데, 나예정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뭡니까?”
나예정이 어딘가 고민에 빠져서는 내 손목만 빠득빠득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겁에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일련의 변화를 보고 생각했다.
진짜 미친년이 분명하다.
“내가 이대로 그냥 넘어갈 거 같아요?”
“예?”
“우리 매니저 오빠한테 다 말해놨어요.”
나예정이 입가를 비뚜름히 올린다.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꼈다.
“기대해요. 그쪽 길드에 안 좋은 소식 들려줄 테니까.”
정정한다.
순도 100% 미친년이다.
길 가던 사람 붙잡고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다가 퍼뜩 송 팀장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아, 설마 아까 말했던 동료 이야기가…….
얼추 아다리가 짜 맞춰진다.
마치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한 거 같은 얼굴인데, 그 한 수가 사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노르망디 수통이다.
불쌍해져서 주먹을 불끈 쥐고 응원했다.
“네, 뭐, 힘내십쇼. 화이팅.”
“재수 없어.”
날 노려보던 나예정이 몸을 홱 돌렸다. 누가 할 소리를? 정장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시험장으로 걸어갔다.
얘가 어딨지? 보이지가 않는다. 분명 휴게소에 있겠다고 했는데.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과 함께 바로 옆에서 벨 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끊으며 돌아봤다.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물었다.
“유정아, 거기서 뭐 하냐…?”
한유정이 벤치에 시무룩하게 앉아있었다.
가끔이지만 애도 엉뚱한 구석이 있는 거 같다.
그런데 난 옆에 있던 걸 왜 발견 못한 거지?
“반성하고 있었어요.”
“반성? 무슨 반성?”
한유정이 무릎에 고개를 파묻는다. 그러면서 신부한테 고해성사하듯 고백한다. 후회가 뚝뚝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감정이 앞서서 너무 멍청하게 행동했던 거 같아요. 아저씨가 고생하면서 판 깔아놨는데. 제가 다 망쳤어요. 죄송해요.”
뭔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나한테 미안한 일이 있었나 보다.
“일단 진정하고 이거부터 마시고 이야기하자. 무슨 일이야?”
벤치 옆의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건넸다. 한유정이 먹구름 낀 얼굴로 받는다.
“2차 시험 치면서 나예정하고 싸웠어요.”
“나예정하고? 왜?”
“옆에서 자꾸 아저씨 욕해서요.”
어이구, 밴댕이가 그새 참지 못하고 한유정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내 욕을 했나 보다.
2차 시험은 협동성이 중요한 팀 경기다. 그런데 한유정과 나예정이 서로 신경전을 벌이다 보니 분위기가 안 좋았을 거다.
그게 시험 성적하고 직결된 거고.
“나예정이 뭐라고 했는데?”
“아저씨가 미성년자나 홀리고 다니는 한심한 사람이래요.”
음료수를 마시다가 바닥에 내용물을 몽땅 뿜었다. 가슴을 붙잡고 쿨럭였다. 작은 손이 내 등을 토닥인다.
젠장, 사레들렸네. 손등으로 턱을 닦으며 물었다.
“아니, 대체 그런 말이 어쩌다가 나온 거야?”
“화장실에서부터 심통 나 있던데 괜히 심술부린 거 같아요.”
“그으래?”
하긴, 한유정이 원조 교제한다고 누군가 헛소리를 지껄이면 바로 인중에 주먹을 꽂아 넣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한편으로는 가슴이 따뜻해진다.
저런 말을 들었다고 화내고 싸운 걸 보면.
“헛소리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 없어.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한유정이 반 박자 늦게 대답한다.
“어, 아뇨.”
“그치? 다음에 그런 말 하면 그냥 개소리하는구나, 무시하고 넘겨. 일일이 반응할 필요 없어.”
“죄송해요.”
격려를 해줘도 얼굴이 도통 필 생각을 안 한다. 많이 상심한 모양이다.
점수가 그 정도로 나빴나?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
“성적이 많이 안 좋아?”
“……네.”
“괜찮다니까.”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그래요.”
“점수표 보여줄래?”
한유정이 머뭇거리며 접은 종이를 건넸다.
종이를 펼친 내가 와락, 웃음을 터트렸다.
“17등이잖아? 풀 죽어 있어서 탈락한 줄 알았네.”
아마 사람들이 한유정에게 기대하는 거보다는 낮을 거다.
그래도 어디 가서 목에 힘주고 다닐 정도는 됐다.
“난 헌터 시험 문턱에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내가 헌터 노릴 때 17등이었으면 하루종일 술판 벌였어!”
예상외의 반응이었는지 어어, 당황하던 한유정이 내 어깨에 이마를 푹 기댄다.
“아저씨가 무시받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되잖아요. 그리고 아줌마는 전부 1등 했었는데….”
뭐야, 그거 진심이었어? 농담인 줄 알았는데.
“됐어, 아직 3차 시험도 남았잖아. 그리고 헌터 하다가 영 시원찮으면….”
“시원찮으면요?”
평소에 자주 하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아이돌이나 배우나 노려볼까? 엔터테인먼트 팀 만들어서.”
“제가 아이돌을요?”
한유정이 휙 고갤 들어 내 눈을 바라본다. 눈동자에 은은한 기대감이 담긴다. 그녀가 내 눈칠 살피며 작게 뇌까렸다.
“제 얼굴로는 안 될 거 같은데….”
“왜? 조 기자도 너 보자마자 아이돌 아니냐고 물었잖아. 난 충분히 가능하다 보는데.”
오히려 아까운 편이지.
어딘가 잔뜩 들뜬 목소리가 내게 묻는다.
“진짜요? 아저씨가 보기에는 제가 아이돌 해도 어울릴 거 같아요?”
“응, 카메라 울렁증만 고치면.”
한유정이 어색하게 웃는다.
“그럼 안 될 거 같아요.”
“마음의 평화도 있잖아. 촬영장마다 내가 따라다니면서 케어해주면 어때?”
“그럼 될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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